바람이 빚은 경관과 신들의 이야기
제주의 진가는 멋진 관광지에만 있지 않다. 중산간부터 바닷가까지 긴 세월에 걸쳐 주민들이 뿌리 내리며 살고 있는 곳, 바로 마을에서 더욱 멋진 제주를 만날 수 있다. 심규호 중국학회회장이 신발 끈을 질끈 묶고 제주 마을로 향한다. 심규호 회장이 들려주는 흥미로운 마을 이야기를 [제주의소리]를 통해 만나보자. [편집자 주]
바람의 마을 행원
바람이 많기로 이름난 제주에 특히 바람이 센 곳이 적지 않지요. 바람 하면 생각나는 곳이 대정인데, 어디 대정뿐이겠는가? 제주의 바람은 참 유별나서 비오는 날 우산을 들기가 힘들 정도이다.
행원에는 겨울 북서풍이 매섭게 분다. 그 바람을 타고 모살(모래)이 점점 육지에 쌓여 사구를 만든다. 구좌읍은 애월읍 다음으로 오름이 많은 곳이다. 구좌읍 전체 37개의 오름이 있는데, 송당리가 24개로 가장 많고, 행원에는 하나도 없다. 물론 조개동산, 돌동산, 베락맞은동산처럼 비교적 높은 구릉이 없는 것은 아니나 물ᄌᆞ물이동산이나 연듸봉(蓮臺峯, 연기동산)처럼 모래가 날아와 생긴 높은 곳, 사구동산이다. 오름처럼 생겼을 뿐 현무암으로 이루어진 오름이 아니라는 뜻이다. 가끔씩 잊어버릴 때도 있을 터이다. 예컨대 연대봉은 생태탐방로가 잘 꾸며져 있다. 소개하는 글을 보니 연대봉은 행원리를 보호하는 마을의 진산鎭山으로 한라산의 맥을 이어받은 영험한 산이라고 나와 있다. 사구동산인데 한라산의 맥을 이어 받았다기보다 바다와 바람, 그리고 모래의 기운이 뭉쳐져 있는 곳이라고 봐야 옳지 않겠는가.

행원리 바람의 힘
제주는 1975년 제동목장에서 육상풍력발전을 시작했다. 2006년에는 탐라해상풍력 발전사업 허가를 통해 해상풍력도 국내 최초로 시작되었는데, 행원리에 '행원풍력단지'가 조성된 것은 1997년이다. 한림읍 월령에서 100KW짜리 풍력발전기를 시험 운행한 이후 행원리에서 600KW 풍력발전기를 본격적으로 가동하기 시작했다. 지금은 비양도에 5000KW 풍력발전기가 있다고 한다. 바람을 동력으로 삼고자 하는 사람의 능력은 유한한데, 바람은 무심한 듯 한결같다.

바람이 만드는 자연, 인문경관
경관景觀이라고 하면 제일 먼저 자연경관이 떠오른다. 이외에도 문화경관, 인문경관이란 말도 있다. 자연경관이 사람이 개조하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경관이라면 문화경관은 자연 경관에 인공을 가하여 이룩한 논밭이나 상공업 공간, 교통, 도시 등의 경관이고, 인문경관은 여기에 지방의 풍습이나 예술, 사회, 인구 등 인문적 환경 조건에 의해 생기는 풍경까지 포함한다.
마을의 모습은 곧 문화경관이자 인문경관이다.
바람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바람에 의해 생겨난 온갖 소리와 흔들림, 날림 등으로 인해 그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바람 많은 제주는 그 바람으로 인해 제주 특유의 자연경관은 물론이고 인문경관도 만들어진다.
나무는 한쪽으로 기울어진 편향수(wind-shaped tree)는 물론이고 제주의 초가에서 이중문을 두거나 처마가 낮고 지붕의 경사가 완만한 것, 그리고 이문간(문간채)과 구멍이 숭숭 뚫린 돌담 등이 제주의 바람 영향으로 이루어진 인문경관이자 문화경관이다.
바람은 좋은 점만 있는 것이 아니다. 현기영 선생은 『바람 타는 섬』에서 이렇게 썼다.
"제주 땅의 겉흙은 화산재로 되어 있어 조 파종에 밭 밟기를 안하는 곳이 없지만 그 중에서도 흙이 제일 푸석푸석하기로는 이 구좌면 일대의 땅이었다.……바람만 불면 검은 화산재 흙이 뿌옇게 구름처럼 날아올랐으니 농사짓기도 힘들었지만 흙먼지에 안질을 자주 앓고 흰옷을 입으면 금세 더러워지곤 했다."
행원리 신당 이야기
행원리 본향당은 큰당, 웃당이라고 부르고, 해신당은 남당이라고 부른다. 본향당은 포구 남쪽 해안도로와 가까운 사농물이 있는 곳에 자리하고 있는데, 당신은 나주목사, 나주판관, 요(용)왕대부인(龍王大夫人)으로 마을 사람의 출생·사망·호적·생업 등 마을 전체의 일을 관장하는 본향신이다. 당의 본풀이에 의하면 나주목사, 나주판관은 나주에서 들어와 마을의 수호신이 되었다고 한다. 위쪽에 있다고 하여 웃당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당집 상량문에 개국 541년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니 대략 1932년에 당집을 건립한 것으로 보인다.
행원리 본향당의 무신도
특이한 점은 당집에 무신도가 그려져 있다는 것이다. 육지의 경우 신당마다 무신도가 있다고 할 정도로 일반적이지만 제주는 다르다. 제주의 경우 내왓당 무신도(제주대 박물관 소장)가 널리 알려져 있는데, 흔치 않은 것이기에 더더욱 소중하다. 행원리 무신도는 조악하다는 느낌이 든다. 원본은 불에 타 사라지고, 누군가에 의해 모사된 것이기 때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연구할 가치가 충분하다. 특히 유건儒巾을 쓴 사람의 형상이긴 하되 새의 깃털이나 닭 벼슬처럼 보이는 것이 도대체 왜 그런 것인지 정말 궁금하다.
본래 무신도는 무신, 즉 신의 초상화이다. 우리가 제사 지낼 때 신위를 모시거나 초상화를 올려놓는 것처럼 당집의 신들도 제의를 할 때 신위를 모셔야 한다. 무신도는 바로 그 신위 역할을 한다. 만약 무신도가 없다면 인공물을 신체神體로 삼는다. 예를 들어 적, 황, 녹(남색) 세 가지 색깔의 옷감을 신목 가지에 걸어놓는 물색이나 지전, 또는 목조신상이나 동자미륵, 무구 등이 신체 역할을 맡는다. 그런가하면 돌이나 나무를 신체로 모시기도 한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당목으로 잘 알려진 팽나무이다(다만 보리밥나무, 우묵사스레피나무, 멀구슬나무, 담팔수 등을 당목으로 사용하는 곳도 있다). 김녕리 미륵당의 형상석 같은 것도 신석神石의 일종이다. 이외에도 창호지나 색지 등으로 여러 가지 모양을 만들어 병풍이나 제상에 세워놓는 기매로 신위로 사용된다.
남당
남당은 큰당이 있는 사농물 맞은편 바닷가에 있다. 당신은 마을의 남당칠머리라는 곳에서 솟아난 남당 하르방과 남당 할망, 그리고 큰도안전, 큰도부인, 중의대사 등으로서 어선, 어장, 해녀, 육아 등을 관장하는 신이다. 특히 중의대사는 중의또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본풀이에 따르면, 아버지는 강원도, 어머니는 철산에서 태어났다. 어쩌다 제주에 들어왔는데, 조천읍 북촌리의 잔칫집에서 돼지고기를 넣어 끓인 국수를 얻어먹어 자신도 모르게 고기를 먹지 말라는 계율을 어긴 셈이 되고 말았다. 중이 절이 없으면 어떻게 하나?

행원리의 심방 이중춘


심규호
한국외국어대학교 중국어과 졸업, 동대학원 중문학 박사. 제주국제대 교수, 중국학연구회, 중국문학이론학회 회장 역임. 현 제주중국학회 회장, 별꼴학교 이사장.
저서로 '육조삼가 창작론 연구', '도표와 사진으로 보는 중국사', '한자로 세상읽기', '부운재'(수필집) 등이 있으며, 역서로 '중국사상사', '중국문학비평소사', '마오쩌둥 평전', '덩샤오핑과 그의 시대', '개구리', '중국사강요', '완적집', '낙타샹즈' 등 70여 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