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수치스럽지만 너무 재미있음” 〈붉은 사막〉의 기묘한 즐거움

몹시 훌륭한 게임은 ‘갓겜’이라 불린다. 졸작은 ‘똥겜’이라 한다. ‘똥갓겜’이라는 수수께끼 같은 수식어가 어울린다고 평가받는 게임이 있다. 한국 게임사 펄어비스가 3월20일 출시한 〈붉은 사막〉이다.
〈붉은 사막〉은 대작이다. 개발비 1500억~2000억원이 들었다고 알려져 있다. 역대 한국 게임 중 최대 규모로, 국산 블록버스터 영화 세 편의 제작비에 맞먹는다. 개발 기간 약 7년 동안 수많은 제작·기획 인력이 붙었다. 이렇게 공들인 게임을 ‘AAA 게임’이라고 한다. 주목받을 이유는 또 있다. 〈붉은 사막〉은 ‘오픈 월드’ 게임이다. 말 그대로 ‘세계’를 구현하는 장르다. 방대한 무대에서 자유롭게 이동하며 풍성하게 상호작용을 할 수 있다. 넓은 세상을 만든 게임(오픈 월드)은 많고, 돈을 많이 들인 게임(AAA 게임)도 있다. 둘을 합친 게임은 한국에 없었다. ‘국내 최초의 오픈 월드 AAA 게임’이란 수식어는 이런 의미다.
그런데 이 기념비적 대작의 뚜껑을 열어보니 ‘괴작’이더라는 풍문이 돌았다. ‘장단점이 있다’ 수준이 아니었다. 극단적 호평과 악평의 비중이 높았다. “이 게임이 내 ‘올해의 게임’인 이유”라는 제목의 글에서 한 평론가는 “별 5개 만점에 6개를 주겠다. 처음 놀이공원에 간 어린아이처럼 즐거웠다”라고 평했다(〈유로게이머 독일〉). 반면 다른 평론가는 “무언가 발견했을 때의 흥분은 늘 실망으로 끝났다. 무의미하게 오랫동안 돌아다니는 것만 남아 있다(〈폴리곤〉)”라고 적었다. 국내 커뮤니티의 반응도 양극단으로 나뉘기는 마찬가지였다. 기대치가 높았기에 비판에 힘이 더 실렸다. ‘게임을 호평하는 이들은 개발사 주식 소유자’라는 공격까지 나왔다.
호불호가 극명히 나뉘는 작품은 흔하다. ‘〈붉은 사막〉 소동’의 특이한 점은 다른 데 있다. 게임의 완성도를 맹공하는 사람 다수가 정작 플레이를 멈추지 않는다. 게임 유통 플랫폼 ‘스팀’에는 자신이 구매한 게임을 평가하는 리뷰 공간이 있다. 리뷰에는 작성자가 플레이한 시간이 자동으로 기록된다. 3월21일 “내 2026년, 아니 역대 최악의 게임” “모든 부분에서 쓰레기 같은 사장되어야 할 게임” “개발자들이 다른 게임을 플레이해본 적은 있냐고 묻고 싶다”라고 쓴 리뷰가 남아 있다. 21시간 플레이 후 평가다. 이 리뷰를 쓴 작성자는 4월15일까지 〈붉은 사막〉을 100시간 이상 더 했다. “빛 좋은 개살구, 솔직히 돈 아깝다”(누적 75시간), “조작 구성한 개발자는 월급도 버튼 누르고 받아라”(누적 90시간), “참고 해보려 했는데 도저히 못 하겠다”(누적 130시간)···. 이 난해한 현상은 무엇일까. 직접 게임을 해보았다.
시작한 지 30분 만에 국내외 모든 혹평을 절감할 수 있었다. 미적거리는 캐릭터가 갑갑했고 임무 진행 동선은 불합리하게 느껴졌다. 단축키가 직관적이지 않아 낯선 피아노곡을 치는 듯했다. 보기 싫은 게임 내 대화를 건너뛸 수 없었다. 가장 큰 문제는 서사다. 주인공이 왜 이런 상황에 놓였는지, 어떤 목표를 추구하는지 불명확하다. 그러니 몰입이 안 된다. 시키니 도둑을 잡고, 가는 김에 악당도 죽이는 등 ‘겸사겸사’ 이어지는 사건의 연속이었다.
욕하면서 끊지 않는 이유를 맛보다
놀랍게도 ‘메인 퀘스트(주 임무)’가 이끄는 중심 서사를 벗어나면서 상황이 변했다. 지도 저 너머로 가면 성능 좋은 장비를 얻을 수 있다는 정보를 온라인에서 찾았다. 매력이라곤 없는 동료들의 도움 요청을 내팽개친 채 북서쪽으로 향했다. 만년설 쌓인 고산이 눈앞에 등장했다. 힘겹게 산을 오르다 보니 언젠가부터 등 뒤에 독수리가 날아다니고 있었다. 산등성이에 자리 잡은 폭포 뒤, 숨겨진 동굴로 들어갔다. 보물 상자가 있었다. 마음에 드는 장비를 ‘강화’하기 위해 재료를 모았고, 장비를 갖춘 김에 괴물도 잡았다. 정신 차려보니 수면 시간이 지나 있었다.
이상한 체험은 또 있다. 적지 않은 시간을 그래픽 설정에 쏟았다. 첫 번째는 오류 때문이다. 실내조명이 우글거리고, 잔디가 깜빡거리는 현상이 잊을 만하면 나타났다. 더 중요한 이유도 있다. 실제 세상처럼 여겨질 만큼 아름다운 ‘세계’를 감상하기 위해서다. 무색무취의 대사와 난해한 줄거리에 진저리 칠 때마다 시점을 돌려 먼 곳을 보았다. 컴퓨터를 혹사해 가능한 최고 수준 그래픽으로 바꾸어놓았다. 매번 그렇게 다시 몰입할 수 있었다. 서사가 해치는 작품의 현실성을 최신 그래픽 엔진으로 구현한 환경이 대신하는 듯했다.
2010년대 들어 ‘게임이 영화의 미래인가’라는 화두가 떠오른 적이 있다. ‘서사를 구현’하기 위해 각본가와 연기자를 고용하는 AAA 게임이 폭증하던 때다. 영화가 하는 일을 게임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런데 게임이 제공하는 ‘쌍방향 체험’은? 영화로는 할 수 없다. 실제로 둘의 경계를 넘나드는 작품이 영화와 게임 양쪽에서 나왔다. 넷플릭스 〈블랙 미러: 밴더스내치〉(2018)는 특정 장면에서 캐릭터의 언행을 고르면 그 선택에 따라 작품 전개 방향이 변한다. 이런 영화를 인터랙티브 무비라고 부른다. 한편, ‘영화 같은 게임’은 수도 없이 많다. 인터랙티브 무비에 가까운 게임뿐 아니라 AAA 게임 다수가 ‘영화 같은 연출’을 지향한다.
영화 같은 게임은 성공했다. 매해 게임상을 휩쓰는 게 이런 게임들이다. 그러나 ‘가성비’ 탓에 회의론도 나온다. 연기자의 얼굴에 장치를 연결하고, 최상급 그래픽 엔진을 구매하며, 흡인력 있는 각본을 갖춰야 간신히 ‘평범한 영화 수준’의 몰입을 얻을 수 있다. 인터랙티브 무비의 전망은 더 어둡다. 여전히 사람들은 평범한 영화를 감상한다. 쌍방향성이 미덕만은 아니었다. ‘여러 결말’에는 한계가 있고, 오히려 서사에 몰입하는 걸 방해한다는 이들이 있다.
〈붉은 사막〉은 영화의 외피만 두른 게임이다. 의도된 전략인지 능력 부족이었는지는 불분명하다. 결과적으로 영상미와 연출만 담고, 모두가 ‘핵심’이라 여기던 이야기를 버렸다. 많은 이가 이 게임의 서사를, 개연적이지 않은 수준을 넘어 무성의하게까지 느꼈다. 8만원짜리 게임을 그만두기 싫어서 제각기 다른 콘텐츠에 눈을 돌리게 되었다. 캐릭터로 격투 게임을 묘사해 유튜브 쇼츠로 올린다. 멋진 풍경을 만날 때마다 스크린샷을 찍는다. 압도적 규모의 세계를 돌아다니며 숨겨진 장비를 모은다. 개발자의 의도를 벗어난 딴짓을 하면서 맛본 각 콘텐츠는 의외로 제각기 깊이가 있었다. 그렇게 각자의 방식으로 서로 다른 ‘서사’를 쌓았다. 게이머들은 ‘수준이 형편없다’고 불평하는 그 게임에 시간을 들이는 자신을 보며 묻게 되었다. ‘혹시 게임은, 전체적 완성도와 재미가 별개인가?’
4월15일 펄어비스는 〈붉은 사막〉 판매량이 500만 장을 넘었다고 밝혔다. 국내 콘솔게임 사상 가장 빠른 속도다. 판매량이 모든 걸 말해주지는 않는다. 이 작품을 명작이나 수작, ‘인생 게임’으로 서슴없이 꼽는 이는 드물 것이다. 그럼에도 이 게임이 업계에 도발적 발걸음을 남겨놓은 것은 분명하다. 스팀 평가 가운데 기자가 가장 깊이 공감했던 건 “정말 수치스럽지만 너무 재미있음”이다. 가슴을 울리는 감동적 연출은 없고, 어기적대는 캐릭터와 기계 같은 동료만 있다. 그래도 재미있을 수 있는 게 게임이라는 사실을 게이머 경력 30년 만에 깨달았다. 설산에서 나타난 곰과 사투를 벌이다 보니 수치심은 점차 흐릿해졌다.
이상원 기자 prodeo@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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