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르무즈 해협 다음은 믈라카?…불안감 번지는 아시아[뉴스 깊이보기]
미·중 경쟁과 미·이란전쟁, 영유권 분쟁
복잡하게 얽힌 가운데 ‘나쁜 선례’ 경계

미국·이란 전쟁이 두 달째 접어든 가운데 불안정한 호르무즈 해협의 선박 통항 상황을 지켜보는 아시아 국가들의 표정이 어둡다. 아시아 물류의 중심지인 믈라카 해협 역시 ‘지정학의 인질’이 될 가능성이 있다는 우려가 번지고 있다.
로이터통신 등에 따르면 푸르바야 유디 사데와 인도네시아 재무장관은 최근 믈라카 해협을 통과하는 상선에 통행세를 부과하는 방안을 공개 제안했다가 국제사회의 반발에 직면해 발언을 철회했다. 푸르바야 장관은 지난 22일 자카르타에서 열린 심포지엄에서 “우리는 전략적인 글로벌 에너지 교역로에 있다”며 “그런데도 우리는 통행료를 걷고 있지 않다”고 말했다. 그는 이란의 호르무즈 해협 통행료 부과를 언급한 뒤 “믈라카에도 같은 논리를 적용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해협을 공유하는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가 강력하게 반발했다. 이에 수기오노 인도네시아 외교장관이 23일 “인도네시아는 무역국가로서 항행의 자유를 지지한다”며 해협 통행료 징수는 국제법에도 어긋난다고 밝혔다. 논란이 되자 푸르바야 장관은 24일 “진지하게 한 말이 아니었다”고 해명했다.
믈라카 해협 통행료 징수 제안은 표면적으로는 ‘해프닝’처럼 수습됐지만 아시아 국가들 사이에서는 위기감이 번지고 있다. 인도네시아 현지 언론은 푸르바야 장관의 발언은 인도네시아가 국제사회의 ‘주변국’에 머무르지 않고 ‘핵심적 역할을 하는 국가가 돼야 한다는 프라보워 수비안토 대통령의 지론과 상통한다고 짚었다.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는 이르반샤 인도네시아 해양안보국장은 지난 주말 믈라카 해협을 “거대한 해상 유료 도로(giant sea toll road)”라고 불렀다고 전했다.
믈라카 해협은 인도네시아의 수마트라섬과 말레이반도 사이 약 800㎞에 걸쳐 뻗어 있고, 가장 좁은 곳의 폭은 2.7㎞이다. 인도양과 남중국해, 태평양을 교차하는 지점에 있으며 동아시아와 중동·유럽을 최단 경로로 잇는 항로이다. 전 세계 해상 물동량의 24%, 석유 거래의 45%가 믈라카 해협을 통해 이뤄진다. 말레이시아 해양부에 따르면 2025년 10만 2500척의 선박이 이 해협을 통과했다. 수심 등 지형 조건이나 세계적 물류 허브인 싱가포르에서 환적 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믈라카 해협을 대체할 항로는 없다고 여겨진다.

믈라카 해협을 경유하는 해상 운송에 차질이 생기면 세계 무역이 마비된다. 특히 중국의 에너지 안보가 크게 흔들린다. 2003년 후진타오 당시 중국 주석은 믈라카 해협에 대한 군사적 취약성을 ‘믈라카 딜레마’로 표현한 바 있다. 이는 중국의 해군력 증강 정책과 일대일로 프로젝트 등 육상 에너지 수송로 개척 등으로 이어졌다. 여전히 중국에 수입되는 원유의 70~80%는 믈라카 해협을 통해 들어온다.
당장 믈라카 해협이 안보 불안에 휘말릴 가능성은 작다. 중국과 동남아시아 국가 간의 남중국해 영유권 분쟁이 첨예한 가운데서도 국제 해협인 믈라카 해협에서의 자유항행 원칙은 마지노선으로 여겨져 왔다.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싱가포르는 1971년 믈라카 해협의 관리를 조율하기 위한 3자 협력 체제를 수립하면서 이 해협은 자유로운 통항이 가능한 국제 해협이라고 재확인했다.
하지만 호르무즈 해협 통항 문제의 해결 방식에 따라 믈라카 해협은 잠재적인 지역 분쟁의 씨앗이 될 수 있다. 미국은 최근 이란에 대한 최대한의 경제적 압박을 가하는 작전을 펼치면서 중국 정유회사를 제재하고 인도양에서 이란 상선을 나포했다. 앞서 중국의 ‘믈라카 딜레마’를 극복하려는 노력은 미·중갈등이 심해지는 계기가 됐다. 중국은 해군력을 증강하는 한편, 일대일로(육·해상 실크로드) 프로젝트를 통해 인도·태평양에서 미군 기지와 인접한 주요 지역들에 항만 네트워크를 구축했고, 이는 미국의 경계심을 키웠다.
남중국해에서 미·중 군사 경쟁이 극심해지는 상황도 우려를 더 하고 있다. 미국과 인도네시아는 지난 14일 양국 간 국방 협력 관계를 ‘주요 국방 협력 동반자 관계’로 격상했다. 이 조치로 인도네시아가 미국 중심의 안보 질서에 더욱 깊숙이 편입됐다는 평가가 나온다. 지역 분쟁인 남중국해 영유권 분쟁과 미·중의 장기 패권 경쟁, 미·이란 전쟁이 연결되는 조짐을 보이는 것이다. 호주 학술매체 더 컨버세이션은 “만약 대만 사태, 호르무즈 해협 분쟁의 여파, 동맹 관계의 변화 등 어떤 계기로는 미·중 군사경쟁이 심화한다면 믈라카 해협은 그 중심에 서게 될 것”이라고 짚었다.
충더시안 싱가포르 난양공대 라자라트남 국제대학원 교수는 “현재 믈라카 해협이 국제 해협이라는 합의가 유지되고 있지만 (이 합의는)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기보다는 적극적으로 유지하려고 해야 한다”고 SCMP에 말했다.
베이징 | 박은하 특파원 eunha999@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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