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후 8개월 아들 진, 조선 방문 열흘 후 사망… 영친왕 부인 이방자

이한수 기자 2026. 4. 30. 0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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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에서 찾았다 오늘 별이 된 사람]
1989년 4월 30일 88세
이은과 이방자. 1923년.

대한제국 마지막 황태자인 영친왕 이은(1897~1970)의 부인 이방자(1901~1989)는 언론에서는 ‘여사’라고 칭했으나 주위에선 ‘마마’ 또는 ‘비(妃) 전하’로 불렀다. 망국의 마지막 왕비를 호칭으로나마 예우했다.

이방자는 1901년 메이지 천황(일왕)의 5촌 조카로 일본 황족인 나시모토노미야 모리마사의 장녀로 태어났다. 일본 이름 마사코(方子). 15세 때인 1916년 19세 영친왕과 약혼했다. 영친왕은 9년 전인 1907년 볼모로 일본에 건너와 있었다.

약혼 사실은 신문을 보고 알았다. 어린 나이지만 정략 결혼이란 사실을 모르지 않았다. 80세 때인 1981년 12월 9일부터 조선일보에 13회 연재한 ‘전환기의 내막-영친왕의 환국’에서 회고했다.

1981년 12월 9일자 7면.

“내가 전하를 만난 것도 일본의 정략이었다. 선일융화(鮮日融和)의 상징이 우리의 결혼이었다. 내 나이 16세(만 15세)이던 어느 날 아침 무심코 펼친 신문은 나를 깜짝 놀라게 했다. 큰 활자의 제목과 함께 내 사진이 실려 있었다. 이(李) 왕세자 은(垠) 전하의 사진도 나란히 있었다. 우리의 약혼 발표 기사였다. 나도 놀라게 한 나의 약혼 발표였다.”(1981년 12월 9일 자 7면)

이방자는 남편도 ‘정략 결혼의 희생자’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회고했다.

1967년 12월 21일자 4면.

““전하는 이번 일을 어떻게 생각하고 계실까….” 나처럼 신문을 보고 깜짝 놀라는 입장은 아니었다 하더라도 전하의 의사가 아닌 것만은 상상할 필요도 없는 사실이다. 부모에게 응석 부릴 나이에 인질과 같은 입장으로 일본에 오셨다는 말을 듣고 나는 “불쌍하셔라…” 하고 생각했었다. “어쩔 수 없는 정략 결혼…”을 하고 보니 전하도 나와 같은 희생자라는 생각이 들었고 친근감도 솟았다.”(1981년 12월 9일 자 7면)

당초 결혼식은 1919년 1월 25일로 예정됐다. 그러나 부왕 고종이 결혼식 4일 전인 1월 21일 세상을 떠났다. 독살당했다는 소문이 일었다. 결혼식은 미뤄졌다. 조선 전역에서 3·1 만세운동이 퍼졌다. 대한제국의 황태자가 일본 여자와 결혼해서는 안 된다는 여론도 들끓었다. 이은은 고종 장례에 참석하러 조선에 다녀온 후 충격을 받은 이방자를 위로했다. 이때 이방자는 “어떤 고난이 따라도 이 분과 운명을 같이하자”고 다짐했다.

1970년 4월 29일자 7면.

“전하는 다시 동경으로 돌아왔다. 어머니와 함께 지체 없이 전하를 방문하고 애도의 말씀을 올렸다. 전하는 온화한 미소로 충격받은 나를 오히려 위로했다. 따뜻한 그분의 마음이 와 닿는 듯했다. “어떤 고난이 따라도 이분과 운명을 같이하자.” 나는 굳게 다짐했다. 양국 관계가 악화되어 신변에 위험이 박두하더라도 전하를 따르기로 마음을 굳혔다.”(1981년 12월 13일 자 7면)

이방자는 1920년 4월 28일 이은과 도쿄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이듬해 8월 18일 아들 진(晋)을 낳았다. 비록 나라는 망했으나 “이(李) 왕조 29대 진 왕자의 탄생”은 조선 왕실의 경사였다. 이방자는 남편과 함께 아들을 데리고 1922년 4월 26일 처음으로 조선 땅을 밟았다. 수천 명 환영 인파가 몰렸다.

1981년 11월 1일자 6면.

“‘(부산) 항구에 도착한 시간은 오전 8시 45분. 전하의 형님인 의친왕(이강 공)이 배로 올라와 우리를 환영했다. 육·해군의 요란한 나팔 소리가 울렸다. 우리가 부두에 내릴 때 수천 명의 학생들도 환영했다.’ 내 일기는 그날을 이렇게 적고 있다. 나는 그때 감동했었다. 조선 사람들이 전하를 그렇게 환영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었기 때문이다.”(1981년 12월 16일 자 7면)

이방자는 결혼기념일인 1922년 4월 28일 궁중대례복을 입고 정식으로 순종을 알현했다. 이때는 곧 불행이 닥쳐올 줄 미처 알지 못했다. 생후 8개월 된 아들 진이 아버지 나라에 온 지 열흘 만에 세상을 떠났다.

“나는 조그만 진(晋)의 시체를 안고 울었다. 체면도 없이 소리 내어 울었다. 세월은 슬픔을 잊게 한다지만 나는 지금도 진의 죽음을 잊지 못한다. 그때 내 나이는 겨우 22살이었다.”(1981년 12월 18일자 7면)

1981년 12월 18일자 7면.

진의 사인은 ‘급속 소화불량’이라는 진단이었다. 독살설이 있던 고종의 죽음에 대한 복수라는 말도 나돌았다.

“처음 방문한 새 조국. 첫 아들 진을 잠재우고 떠나는 전하와 나. 부산까지는 동행해준 배웅객이 많아 예의도 지키고 그랬지만 배에 오르고 보니 외로움이 왈칵 솟아올랐다. 사랑하던 아들 진의 얼굴도 되살아났다. 진의 소화불량 원인은 우유를 잘못 먹은 탓이라던 생각도 났다. 좋은 분유가 없는 시대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그렇지 서울을 떠나기로 한 바로 전날 발병이라니…. (…) 어떻게 생각하는 것이 옳은지 갈피가 안 잡혔다. 부모의 사랑을 받은 것도 불과 몇 개월. 일본인의 피가 섞였다고,오직 그것 때문에 내 사랑하는 아들 진이 비명(非命)을 맞은 것은 아닌지,의문은 꼬리를 물었다. “부왕(고종)을 독살한 그 원한이라면 차라리 나에게 화살이 꽂힐 일이지….” 소리 없이 눈물은 계속 흘렀고 연락선도 계속 달렸다.”(1981년 12월 18일 자 7면)

1963년 11월 23일자 7면.

이방자는 일본 패전 후 이은과 함께 ‘재일 한국인’으로 등록했다. 1947년 미군 점령기 일본 왕공가(王公家) 규범이 폐지되고 일본 귀족이 평민이 된 조치에 따른 것이었다. 한때 일본 국적을 다시 얻기도 했다. 미국 유학 중인 둘째 아들 구(玖)의 졸업식 참석을 위해 여권을 만들어야 했다. 이방자는 첫아들 진을 잃은 후 9년 만인 1931년 12월 둘째 아들 구를 낳았다.

이방자와 이은은 이후 국적 문제 등으로 한국으로 돌아가지 못하다가 1963년 11월 22일 환국했다. 이은은 병상에 누워 말을 하지 못하는 상태였다.

“한국과 일본. 그 사이에서 황태자였던 그분과 일본 왕녀였던 내가 한 사람의 남편이 되고 일개의 아내가 되는 긴 드라마가 종막을 맞고 있었다. 우리 가족은 비행기에 오르자 1시간반여만에 조국에 돌아왔다. 김포공항의 환영은 성대했다. 공항에는 앰뷸런스도 대기하고 있었다. 낙선재에 있던 상궁들도 마중 나와 전하에게 절을 했다. 54년 만의 환국. 그러나 전하는 아무 말씀도 없었다.”(1981년 12월 29일 자 7면)

1977년 3월 10일자 5면.

이방자는 환국 후 창덕궁 낙선재에 기거했다. 사회복지법인 명휘원을 세우고 사회봉사 활동을 펼쳤다. ‘명휘’는 이은의 호. 각계의 후원을 받는 한편 스스로 자수·칠보·그림 전시회를 열어 기금을 마련했다.

이방자는 스스로 자신은 한국인이라고 했다. 1975년 인터뷰에서 “이제 저는 한국 국민입니다. 국적도 한국이고요. 전하께서 돌아가신 뒤에 일본으로 귀환하라고 권한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럴 생각 없다고 딱 잘라 말했어요”(1975년 9월 9일 자 3면)라고 했다.

1975년 9월 9일자 3면.

1963년 환국 후 26년째인 1989년 4월 30일 낙선재에서 88세로 별세했다. 남편 이은의 기일을 하루 앞둔 날이었다. 이은은 19년 전인 1970년 5월 1일 세상을 떠났다. 시누이인 덕혜옹주는 이방자 별세 9일 전인 1989년 4월 21일 사망했다. 이로써 조선 왕실은 완전히 종언을 고했다.

“조선시대 마지막 황태자비 이방자 여사의 별세는 파란 많은 조선왕조 5백년 역사의 실질적인 종언을 의미한다. 21일 고종의 마지막 혈육이었던 덕혜 옹주가 별세한 데 이어 이 여사가 세상을 떠남으로써 조선 왕실의 관작을 받은 사람은 이제 한 명도 남지 않게 됐다. (…) 문화재관리국의 한 관계자는 “이방자 여사가 낙선재에서 말년을 보낸 것은 그가 창덕궁 후원을 좋아하여 그 곳을 요청했기 때문일 뿐 소유권과는 관계 없다”고 말했다. 정부는 왕실 후예에 대한 예우로 이(李) 여사에게 최근까지 1천20만원의 생활비(시설관리비 및 간병요원 급료 포함)와 차량 등을 제공해 왔다.”(1989년 5월 2일 자 13면)

1989년 5월 2일자 13면.

이방자와 이은의 아들 이구는 2005년 7월 16일 도쿄 아카사카 프린스호텔 객실에서 사망했다. 아버지 이은의 사저가 있던 자리로 자신이 태어난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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