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 허예은 “농구를 키로 하나요?… 기술로 코트 지배할 때 희열”

권준영 2026. 4. 29.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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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cm 작은 거인’ KB 가드 허예은
슛 연습 20배는 더 하는 ‘악바리’
피지컬 열세, 다진 기본기로 극복
‘최애 선수’는 NBA 스테픈 커리
박지수 없이 승부처 해결사 역할
‘朴의 완벽한 파트너’ 꼬리표 떼
생애 첫 챔프전 MVP 영예 만끽

신체적 한계를 비웃듯 코트를 휘젓던 ‘작은 거인’이 마침내 가장 높은 곳에서 포효했다. 여자프로농구 청주 KB 가드 허예은(25)이 팀의 2025∼2026 챔피언결정전 3연승을 이끌며 생애 첫 챔프전 최우수선수(MVP)의 영예를 안았다. 완벽한 승리로 왕좌를 탈환한 순간, 165㎝의 ‘작은 거인’은 인생에서 가장 뜨거운 우승의 봄을 만끽했다.

29일 우승의 환희가 채 가시지 않은 청주체육관. 인터뷰를 위해 만난 허예은에게서 가장 먼저 읽힌 건 실력보다 앞선 ‘겸손’이었다. 그는 “내가 잘해서 받은 상이 아니라, 언니들이 뒤를 지켜주고 동료들이 내 패스를 믿고 달려준 덕분”이라며 팀원들에게 공을 돌렸다. 상대의 거친 압박에는 매서운 기술로 맞서고 동료에게는 한없이 따뜻한 ‘강강약약’의 리더십. 시리즈 내내 코트를 지배했음에도 허예은은 “농구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게 매력”이라며 다시금 운동화 끈을 조여 맸다. 코트를 지배했던 승부사의 독기는 간데없고, 다음 스텝을 준비하는 노력파 가드의 모습에는 여전한 설렘이 묻어났다.

청주 KB 허예은이 29일 청주체육관에서 가진 인터뷰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2025∼2026 여자프로농구 챔피언결정전 3연승을 이끌며 생애 첫 챔프전 최우수선수(MVP)에 오른 허예은은 우승의 기쁨 속에 환한 미소를 보였다. 청주=최상수 기자
◆“신체적 한계? 변명일 뿐… 땀은 배신하지 않는다”

2000년대 초반 미국프로농구(NBA)를 휩쓸었던 단신 농구 스타 앨런 아이버슨은 “농구는 ‘신장’아닌 ‘심장’으로 한다”는 명언을 남겼다. 허예은이 이 말에 딱 어울리는 선수다. 그의 농구 인생이 바뀐 건 중학교 3학년 시절 참가한 한국여자농구연맹(WKBL) 캠프였다. 당시 처음 접한 ‘스킬 트레이닝’은 신체 조건의 열세를 기술로 극복할 수 있다는 확신을 줬다고. 이후 그는 서울에 있는 스승을 직접 찾아가며 드리블과 레이업의 기본기를 바닥부터 다시 쌓았다. 남들이 슛 10개를 던질 때 200개를 던지는 독기는 그때부터 시작된 생존 본능이었다.

“어릴 땐 왜 키가 이것밖에 안 될까 고민도 했죠. 하지만 가와무라 유키(일본) 같은 선수들을 보세요. 결국 다 변명이더라고요. 피지컬이 전부는 아니에요. 제가 가진 기술과 스피드로 상대를 역이용할 때 희열을 느낍니다.”

허예은의 생존 전략은 ‘조급함’을 버리는 데서 시작된다. 상대의 거친 압박이 들어올 때면 그는 속으로 ‘더 여유 있게 코트를 보자’고 주문을 외운다. 내가 급해지면 팀 전체가 흔들린다는 리딩 가드로서의 책임감이다. 이러한 마인드 컨트롤은 경기 전 심호흡 루틴으로 이어진다. “지면 어떡하지”라는 불안감을 “내가 너무 잘하고 싶어서 생기는 마음”이라고 긍정하며 코트로 들어선다.

허예은 KB 스타즈 농구선수 /2026.04.15 천안=최상수 기자
허예은 KB 스타즈 농구선수 /2026.04.15 천안=최상수 기자
◆‘박지수의 조력자’ 넘어 ‘독립적 에이스’로

허예은 하면 빼놓을 수 없는 이름이 팀의 기둥 박지수다. 세간에서는 그를 ‘박지수의 완벽한 파트너’라 칭송했지만, 이번 시즌 허예은은 그 수식어를 스스로 깨뜨렸다. 박지수는 이번 챔피언결정전에서 발목 부상으로 코트에 서지 못했다. 팀의 절대적인 전력이 이탈하면서 안팎으로 우려의 시선이 쏠리기도 했으나, 허예은은 보란 듯이 판을 뒤집었다.

“어릴 때부터 지수 언니가 짊어진 짐이 너무 커 보였어요. 언니가 없을 때 그 부담감을 제가 온전히 짊어지고 증명해내고 싶었습니다.”

언니의 빈자리를 채우겠다는 책임감은 허예은을 승부처에서 피하지 않는 해결사로 만들었다. 이제 팬들은 박지수에게 의존하지 않고도 과감하게 림을 가르거나, 동료의 손에 자석처럼 붙는 ‘창의적인 패스’로 경기를 설계하는 허예은의 단독 주연 무대에 열광한다.

화려한 패스를 장려하는 김완수 감독의 믿음 아래, 허예은은 ‘박지수 없는 KB도 강하다’는 사실을 3연승 프리패스로 증명해냈다. 덩크슛이 없는 여자농구에서 드리블과 노룩 패스만으로도 팬들에게 ‘보는 재미’를 선사할 수 있다는 것을 몸소 보여준 셈이다.

허예은 KB 스타즈 농구선수 /2026.04.15 천안=최상수 기자
◆“패러다임 바꾼 커리처럼… 나만의 낭만을 쓴다”

비시즌에도 NBA 영상을 찾아보고, 스테픈 커리(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와 르브론 제임스(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의 맞대결을 보기 위해 무작정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을 만큼 허예은은 지독한 ‘농구광’이다.

특히 커리는 그의 우상이다. 왜소한 체격의 한계를 깨고 슈팅으로 농구의 패러다임을 바꾼 그의 모습에서 자신의 지향점을 찾는다. 작년 휴가 때 미국 현장에서 두 전설의 대결을 직접 눈에 담았던 기억은 그에게 “시대의 변화를 주도하는 선수가 되겠다”는 새로운 동기부여가 됐다.

코트 밖의 허예은은 더 나은 내일을 꿈꾸는 ‘성장형 선수’다. 올해 은퇴를 앞둔 대선배 염윤아를 보며 ‘저런 어른이 되고 싶다’고 다짐하고, 20년 넘게 팀을 지킨 박지은 트레이너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며 배움을 구한다. 룸메이트인 2년 차 후배 송윤아에게는 “공격을 절대 미루지 말고 부딪치라”며 기를 살려주는 따뜻한 선배이기도 하다.

이런 허예은에게 앞으로의 목표를 묻자 그는 담백하게 답했다.

“어떤 선수가 되고 싶냐고요? 그저 ‘농구를 정말 사랑했던 선수’로 기억된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 같아요. 아직은 농구 외에 혼자 할 줄 아는 게 별로 없지만, 언젠가는 농구장 밖에서도 나만의 색깔을 찾는 주체적인 삶을 살고 싶습니다.”

작은 키로 코트를 지배하는 그의 농구는 이제 막 정점에 다다르고 있다. KB의 황금기를 이끄는 허예은의 ‘낭만 농구’는 현재진행형이다.

청주=권준영 기자 kjykjy@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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