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전 세계인의 입맛을 사로잡는 ‘신포국제시장’ [알보달보 인천지역유산·(12)]
어떤 ‘라인’에 서겠습니까
대표 명물 ‘닭강정’ ‘공갈빵’ 긴 줄
외국인들도 좋아하는 인기 먹거리
시장 주변 ‘푸성귀전’ 조형물 눈길
한·중·일 모여 ‘국제’ 수식어 실감

지난 24일 오후 2시 인천 신포국제시장은 외국인 관광객으로 북적였다. 깃발을 높이 든 ‘가이드’를 따라다니는 인파 속에서 들려오는 말소리가 다채로웠는데, 영어와 중국어, 한국어가 뒤섞여 있었다. 좁은 시장통을 관광객들은 쉴 새 없이 눈을 이리저리 돌리며 시장을 살피느라 분주했고, 또 스마트폰을 내밀며 시장 이곳저곳을 사진 찍느라 바빴다.
내외국인을 구분하지 않고 뭐니 뭐니 해도 이곳 신포시장에서 관광객에게 가장 인기가 있는 것은 닭강정이다. 한국어를 전혀 하지 못하는 외국인도 ‘닭강정’ 세 글자는 외워서 시장을 찾아온다는 것이 이곳 시장 상인들의 이야기다. 이날도 이곳에서 가장 인기 있는 닭강정 상점에는 긴 줄이 늘어서 있었다.
신포닭강정을 운영하고 있는 박찬홍 대표는 “2~3개월 전부터 중국인 관광객이 부쩍 늘었다면서 내국인 관광객 손님의 20%는 넘는다”고 말했다. 한때 크루즈 관광객들이 꼭 방문하는 곳이었으나, 외교 문제가 불거진 이후 발길이 끊겼다가 다시 중국인 관광객들이 찾고 있다는 것이 박 대표의 설명이었다.
십수 년 전부터 전통시장인 신포시장에 ‘국제’라는 말을 붙여 부르는 이들이 생겼다. 당시에는 ‘전통’과 ‘국제’가 영 어색하기 짝이 없는 조합이라고 생각했고 그 어색함은 최근까지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낮 시간 외국인 관광객이 북적이는 풍경을 목격하고 나니 생각을 고칠 수밖에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2020년부터 이곳 신포국제시장상인회 일을 도맡아 하고 있는 조은영 사무국장이 신포시장에 붙어있는 ‘국제’를 설명할 수 있는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줬다.
“제가 상인회 일을 하기 직전에 송도국제도시에서 일한 경험이 있어요. 그곳에서도 외국인을 자주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전통시장인 이곳 신포국제시장이 송도국제도시보다 훨씬 더 ‘국제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이곳 시장에서는 송도국제도시에서 만나지 못했던 국적이나 피부색을 가진 외국인을 훨씬 더 자주, 그리고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외국인이 자주 찾는 시장이다 보니 이곳 시장 상인들은 나이와 업종을 불문하고 물건을 팔 때 필요한 중국어·영어·일본어는 기본적으로 구사하고 있다는 것이 조 사무국장의 설명이다. 조 사무국장은 “시장 상인분들이 자연스럽게 터득할 수밖에 없었던 ‘생존전략’이 아닐까 한다”고 말했다.
신포국제시장의 그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왜 이 전통시장에 ‘국제’라는 수식어가 붙어있는지, 또 그게 터무니없는 조합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신포국제시장 명물인 닭강정과 공갈빵을 사느라 줄 서기 바빴던 이들에게는 쉽게 눈에 띄지 않는 조형물이 하나 있는데, 그 조형물이 이러한 점을 설명하는데 가장 제격이라고 말할 수 있다. 시장 안쪽 골목을 걷다 보면 시장 손님을 위해 설치한 공동화장실이 있고, 화장실 앞에는 ‘신포동 푸성귀 전’이라는 설명이 붙은 조형물이 하나 세워져 있다.

양파, 양배추, 당근, 토마토, 피망 등 채소가 시장 바닥에 진열되어 있고, 그 뒤에는 한국인 모자(母子)와 중국 복장을 하고 있는 중국인 상인, 그리고 기모노를 입고 채소를 고르는 모습의 일본 여인의 모습을 재현한 조형물이다.
신현기 신포국제시장 상인회장은 “이 조형물이 신포국제시장의 뿌리가 어디에 있는지 가장 잘 보여주는 상징”이라며 “복장이 모두 다른 조선인, 중국인, 일본인이 채소를 사고팔던 모습이 그야말로 ‘인터내셔널’ 아니겠냐”고 말했다.
조형물의 표지석 설명은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19세기 말엽 신포동에 푸성귀 전이 생겨났다. 중국 산동성 출신 강씨, 왕씨에 의해 처음으로 재배된 서양의 푸성귀는 당시 인천에 거주하던 일본인과 서양인들이 즐겨 찾는 야채들이었다. …(중략)…신포동 푸성귀전의 탄생은 우리 지역에 야채를 전문적으로 내어 파는 근대 시장의 기틀을 최초로 마련했다는 데에 그 역사적 의미가 있다”(2005년 9월)
신현기 상인회장은 “푸성귀전 조형물이 그저 그런 조형물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잘 들여다보면 신포시장의 정체성을 압축한 역사의 표지석”이라며 “양파 하나, 당근 하나에도 백 년이 넘는 이야기가 담겨 있다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개항 이후 신포에 자리잡은 華農들
직접 재배한 채소 판매하던게 기원
한국전쟁 전후 신포시장 정식 명칭
2000년대 들어 관광지로 자리매김

신포국제시장의 역사는 인천 개항의 역사와 궤를 같이한다. 1883년 인천항 개항 이후 1884년 인천화상조계장정이 체결되면서 청나라의 조계지가 설정되었다. 이후 중국 산동 지역에서 건너온 화농(華農)들이 인천 신포 일대에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이들은 당시 조선 사람들이 즐겨 기르지 않던 양파, 당근, 토마토 같은 채소를 직접 재배하고 팔았는데, 이들 화농이 일군 이 푸성귀전이 바로 신포시장의 기원이다. 이후 이 작물들이 전국으로 전파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역사 때문에 지금도 각종 반찬거리와 채소 등을 주로 파는 시장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화농들은 한때 500명에 달했다고 한다. 이들은 도화동, 학익동 등지에 모여 살며 농사를 지었다고 한다.
신포시장이 정식 상설 시장으로 자리매김하게 된 것은 1890년대 초에 설립된 어물객주 정흥택, 정순택 형제의 생선전이 만들어진 이후다. 이들은 1899년 자본금 2천680원으로 설립된 ‘인항어상회사(仁港魚商會社)’의 사원으로도 이름을 올렸다. 인항어상회사는 조선인이 세운 어시장으로, 1908년에서 1911년 사이 일제 농상공부 수산국이 조사한 ‘한국수산지’에도 그 이름이 남아 있다. 당시 주로 취급한 어종은 숭어, 민어, 농어, 갈치, 전어, 병어 등이었고, 인천 앞바다와 영종도, 무의도, 용유도 등에서 잡아 올린 신선한 생선들이 이곳을 통해 팔려나갔다.
주목할 점은 이 조선인 어시장이 일본인이 경영하는 어시장보다 한때 거래 규모에서 앞섰다고 한다. 조선인 어부들은 일본인이 만든 어시장보다 인항어상회사나 조선인 객주를 통해 거래하는 것을 좋아했다.
한일병합 이후 조선총독부는 비위생적이고 무질서한 조선의 시장 문화를 변화시키고 이를 통해 세수를 확대하려는 목적에서 1914년 시장 규칙을 공포한다. 그에 따라 1929년 12월, 해산물을 취급하는 제1공설시장이 벽돌 구조의 건물로 문을 열었고, 1932년 7월에는 청과물 중심의 제2공설시장이 준공됐다.

광복 이후 주체가 명확하지 않은 상태에서 상인 개개인이 영업하는 형태로 무분별하게 운영되다가, 한국전쟁을 전후해 ‘신포시장’으로 이름을 달았다. 먹을거리로 각광받는 신포시장은 1970년대에 전성기를 맞는다. 가까이 인천시청이 있었고 인천 중심부의 유동인구를 배후에 둔 이 시장은 자연스레 인파가 북적였다. 인천시청이 남동구로 이전하면서 이 일대의 상권은 서서히 위축됐고, 신포시장도 예외는 아니었다. 단골 손님이 줄고 점포들이 하나둘 문을 닫기도 했다. 2003년, 신포시장은 대대적인 현대화 작업을 거쳐 지금의 면모를 갖췄다. 2000년대 들어 차이나타운이 인천의 관광명소로 인기를 끌면서 관광객의 발길이 시장으로도 이어지기 시작했다. 자유공원과 개항장 문화지구, 그리고 차이나타운, 신포시장 등이 자연스럽게 관광 동선으로 놓이게 됐다.
2010년 3월 중소기업청이 신포시장을 문화관광시장 지원 대상으로 선정하면서 시장의 이름도 공식적으로 ‘신포국제시장’으로 바뀌었다. 이때 ‘국제’라는 두 글자가 붙은 것이다.
인천시는 지난해 신포국제시장을 인천지역유산으로 선정했다. 인천 최초의 근대적 시장이라는 역사성과, 인천 개항장 일대의 대표적 시장이라는 지역성, 그리고 현대화되고 있는 가운데 아직도 시장 안에는 좌판 상인과 노포가 많이 남아있다는 이유 등을 들었다.
현재 신포시장에는 137개 점포가 영업을 이어가고 있다. 2024년 기준 외국인 방문객은 6만9천300명으로 추정되며 지출액은 1억1천320만원으로 추정된다. 개항장 주변의 많은 문화유산과 인접해 있어 활용도가 높다는 것이 인천시가 지역문화유산으로 선정한 이유다.
신현기 상인회장은 “신포국제시장이 인천을 찾는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시장으로 계속 성장했으면 한다”며 “인천의 역사와 문화를 온몸으로 느낄 수 있는 공간으로, 오래도록 살아남았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말했다.

/김성호 기자 ksh96@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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