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로 만나는 경북의 문화유산] 경주 흥덕왕릉

문정화 기자 2026. 4. 29. 1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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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기/ 경북대학교 역사교육과 명예교수
경주 흥덕왕릉은 신라 제42대 흥덕왕의 무덤으로 무덤제도가 잘 갖추어진 왕릉이다. 이 능은 원형 봉토분으로 지름 20.8m, 높이 6m이다. 비교적 커다란 둥근 봉토분으로 무덤 밑에는 둘레돌을 배치하여 무덤을 보호하도록 하였다. 둘레돌은 먼저 바닥에 기단 역할을 하는 돌을 1단 깔고 그 위에 넓적한 면석을 세웠다. 면석 사이에는 기둥 역할을 하는 탱석을 끼워 넣었다. 김진홍 기자

거의 30년만인가 보다. 1990년대에 학생들과 춘계 고적답사 중에 흥덕왕릉을 찾은 이후, 명색 신라사 연구자임에도 불구하고 이곳을 탐방할 기회가 없었다. 그렇지만 흥덕왕릉(국가지정 사적)은 가벼이 보아 넘길 수 있는 유적이 아니다. 우선 외형적으로 역대 왕릉 가운데서는 가장 잘 정비된 능원(陵園) 시설을 갖추고 있고, 왕릉이 조성된 배경에는 왕과 왕비의 지극한 사랑 이야기가 숨어 있기도 하기 때문이다. 처음 찾았던 그때 다복솔과 작은 소나무만 듬성듬성 하던 숲이 어느새 울창한 송림으로 자라나 최근에는 소나무 촬영 명소가 되고 있다고 하니 세월의 무상함을 느낀다.

◆흥덕왕은 누구인가

왕릉의 주인공 흥덕왕(777~836)은 이름이 수종인 신라 제42대 왕이다. 826년에 왕위에 올랐다가 836년에 하세하기까지 10년간 왕위에 있었다. 그의 할아버지는 신라 하대 시대의 실질적 개창자인 제38대 원성왕이고, 아버지는 원성왕의 태자로 책봉되었지만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죽은 인겸 태자로서 4형제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798년에 원성왕이 죽자 그의 장손인 준옹이 왕위를 물려받아 제39대 소성왕이 되었다. 곧 수종의 큰 형님이었다. 한편 수종은 준옹의 딸이자 자신의 질녀이기도 한 장화(章和)를 부인으로 맞아 소성왕의 사위가 되었다. 그런데 소성왕은 즉위 이듬해에 요절하고 왕위는 다시 수종의 장조카인 태자 청명에게 넘어가 제40대 애장왕이 되었다. 이렇게 왕위가 원성왕의 적장손으로 이어지게 되면서 인겸의 셋째 왕자로서 방계인 수종은 왕위로부터 점차 멀어지는 듯 보였다.
흥덕왕릉 문인석과 무인석

◆험난했던 왕위계승

하지만 시대의 변화와 함께 그에게도 왕위에 다가갈 수 있는 기회가 열리기 시작했다. 그 단초는 아이러니하게도 애장왕의 즉위가 제공했다. 태자 청명은 왕위에 오를 당시 나이가 13세에 불과했다. 신라에서는 왕이 어릴 경우 모후(母后)나 근친이 섭정을 맡는 것이 관례였으므로, 애장왕의 치세도 숙부인 언승의 섭정으로 시작되었다.

애장왕의 가장 큰 숙부였던 언승은 처음에 병부령으로서 섭정을 맡았지만 곧 최고의 관직 상대등과 비서실장 격인 어룡성 사신까지 겸하여 권력의 실세로 군림하였다. 그러나 애장왕이 즉위하고 5년이 지나 18세에 이르자 조정에서는 섭정을 끝내고 국왕이 친히 정치 일선에 나서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져 갔다. 애장왕 중심의 친정파와 언승을 추종하는 섭정파 사이에 대립과 갈등이 시작된 것이다.

이에 대해 애장왕은 805년에 어머니를 대황후, 왕비 박씨를 왕후로 격을 높이고 아우 체명을 측근에 기용하는 등 친정체제를 갖추는 한편 우호세력을 강화하여 섭정파를 강하게 견제하였다. 이에 수세에 몰려 권력을 송두리째 잃어버릴 위기에 직면한 언승 등 섭정파들은 비상 수단을 통해 권력을 지키려 했다. 그리하여 809년에 군사를 거느리고 왕궁으로 들어가 애장왕과 왕비를 시해하고 왕의 아우 체명까지 살해하는 반란을 일으켰다. 그리고 언승이 왕위에 올라 제41대 헌덕왕이 되었다. 요즘 선풍적인 인기를 끈 영화 '왕과 사는 남자'가 묘사했던 수양대군이 어린 조카 단종을 내몰고 스스로 즉위했던 사실과 판박이처럼 닮은 사건이 이미 신라에서 발생했던 것이다. 다만 신라의 애장왕 시해 사건은 언승과 수종, 충공 등 숙부 3명이 모두 참여하였던 점에서 수양대군의 아우들이 찬탈을 반대했던 사실과는 차이가 있다.

수종은 언승 섭정체제에서 집사부 시중을 지내는 등 요직을 거친 후 애장왕 시해 사건에 동참하여 헌덕왕의 즉위 공신이 됨으로써 권력의 핵심부에 진입할 수 있었다. 그런데 헌덕왕은 즉위 후 불법적 왕위계승에서 비롯된 정통성 문제에 시달렸으며, 해마다 가뭄과 홍수로 흉년이 들고 기근이 심해지는 등 사회적 동요까지 심해졌다. 이에 대한 수습책의 하나로 헌덕왕은 한동안 견제 대상으로 삼았던 아우 수종을 상대등으로 기용하였다. 그런데 이때부터 차기 왕위를 둘러싸고 국왕 및 태자 세력과 수종과 막내 아우 충공 연합세력 사이에 경쟁이 재연되었다. 822년(헌덕왕 14)에 수종은 부군(副君)이라는 지위로 월지궁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이는 수종이 우위에 서게 되었음을 말한다. 월지궁은 곧 동궁으로서 원래 태자가 거처하는 궁실이었다. 이곳에 부군인 수종이 입궁했다는 것은 그곳에 살았던 헌덕왕의 태자를 쫓아내고 자신이 차기 왕위 계승자의 지위를 확립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때 숙부 수종에게 쫓겨난 헌덕왕의 태자가 바로 팔공산 동화사의 중창주 심지(心地)화상이다.

이렇게 왕실계보상 왕위계승의 적통이 아니었던 수종은 1차로 장조카였던 애장왕을 시해하는데 가담하고, 2차로 또 다른 조카인 헌덕왕의 태자를 축출하는 정변을 통해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이다.
거북모양의 비석받침돌.

◆흥덕왕과 왕비 장화부인과의 사랑

'삼국유사'에는 「흥덕왕 앵무(鸚鵡)」라는 앵무새 한 쌍의 슬픈 사랑 이야기가 전해진다. "제42대 흥덕대왕이 보력(寶曆) 2년 병오년(826)에 즉위하고, 얼마 안 되어 어떤 사람이 당에 사신으로 갔다가 앵무새 한 쌍을 가지고 왔는데, 오래지 않아 암컷이 죽었다. 홀로 남은 수컷이 애처롭게 울기를 그치지 않자, 왕은 사람을 시켜 앞에 거울을 걸게 하였다. 새가 거울 속의 그림자를 보고 짝을 얻은 것으로 생각하여 그 거울을 쪼다가 그림자임을 알고서 슬피 울다가 죽었다."

이 설화는 허무맹랑한 이야기가 아니라 실은 흥덕왕과 먼저 죽은 왕비 장화부인과의 지극한 사랑 이야기를 모티브로 한 것이다. '삼국사기' 흥덕왕 본기에는 "흥덕왕 원년(826) 겨울 12월에 왕비 장화부인이 죽으니, 정목왕후로 추봉하였다. 왕이 왕비를 생각하며 잊지 못하고, 슬퍼하며 즐거워함이 없어서, 여러 신하들이 표문을 올려 다시 왕비를 맞아들일 것을 청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짝이 없는 한 마리 새도 짝을 잃고 슬퍼하는데, 하물며 좋은 배필을 잃은 사람은 어떠하겠는가. 어찌 무정하게 바로 다시 아내를 얻겠는가"라고 하면서, 끝내 듣지 않았다. 또한 시녀를 가까이 두지 않고, 좌우에 두고 부리는 사람은 오직 환관뿐이었다"라는 기사가 남아 있다. 이를 보면 흥덕왕은 사망한 왕비를 너무나 그리워한 나머지 평생 계비를 들이지도 않았고, 심지어 시녀들까지 모두 궐밖으로 물리칠 정도로 결백한 삶을 살았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이 위의 앵무새 한 쌍의 사랑 이야기에 투영된 것이다. 왕비가 죽은지 10년이 지나 흥덕왕도 죽었다. 왕은 장화왕비의 능에 자신도 합장할 것을 유언으로 남겼고, 신라 조정은 유언에 따라 왕과 왕비의 합장릉을 현재의 위치에 조성하였다.
무덤 밑 탱석에는 시계 방향으로 12지신상이 조각돼 있다.

◆흥덕왕릉의 능원 시설

봉분은 원형 봉토분으로 지름 20.8m, 높이 6m이다. 내부 구조는 횡혈식 석실이다. 장화부인 사망 직후 석실을 만들어 시신을 먼저 안치했다가 10년 후 흥덕왕이 죽자 다시 석실문을 열어 합장하였다. 따라서 왕릉은 826년의 1차 조성, 836년의 2차 조성을 통해 완성된 셈이다. 신라의 역대 왕릉은 위치 비정의 근거가 모호하여 종종 '전(傳) △△왕릉'으로 불린다. 하지만 이곳은 흥덕왕릉임이 유물을 통해 확실히 입증되었다. 지금까지 발견된 「흥덕왕릉비」 비편 중에서 제액(題額)으로 추정되는 '흥덕(興德)'이라는 예서체 글자가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통일신라기 여러 왕릉 중 흥덕왕릉은 능원 시설이 가장 잘 정비된 무덤이다. 다양한 석물로는 호석 시설(면석·탱석·12지신상), 석난간, 석사자, 상석, 신도(神道) 좌우에 서 있는 문인석과 무인석, 입구의 화표석(華表石), 능비 등이 있다. 이 가운데서 특히 호석에 새겨진 12지신상(十二支神像)은 예술적 측면에서도 우수한 작품으로 평가된다. 물론 전 진덕여왕릉, 전 성덕왕릉, 전 경덕왕릉, 원성왕릉(괘릉), 전 헌덕왕릉 등 왕릉 6기와 전 김유신묘에도 호석에 12지신상 조각되어 있지만, 이곳의 조각이 더 훌륭하다고 한다. 12지신상은 두 개의 면석을 건너 세워진 탱석에 1구씩을 돋을새김으로 조각했는데, 정북(正北)의 쥐상에서 시작하여 시계 방향으로 돌아가면서 소・호랑이・토끼・용・뱀・말・양・원숭이・닭・개・돼지상을 차례로 배치했다. 한 가지 재미있는 점은 12구의 신상을 3구를 하나의 세트로 하여 4그룹으로 나누고 두향(頭向)을 가운데는 정면, 그 왼쪽은 우향, 그 오른쪽은 좌향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역시 답사에는 세심한 관찰이 수반되어야 하는 것 같다.

석사자상 4구는 능침을 수호하는 신수(神獸)인데 봉분의 내 모서리에 배치되어 각각 서로 다른 방향으로 삼엄한 감시의 눈길을 보내고 있다. 봉분으로 향하는 신도의 좌우에 문인석과 무인석이 각 1쌍씩 서 있는데, 특히 무인상은 부릅뜬 두 눈과 뭉툭한 코 모양을 가진 서역인의 형상을 하고 있다. 유명한 괘릉의 무인상과 비교하면 크기는 크지만 조각 수법은 조금 떨어지는 느낌이다. 신도의 좌측에는 「흥덕왕릉비」를 세웠던 귀부가 남아 있다. 비신과 이수(螭首)는 깨져 없어졌다. 귀부의 조각 솜씨는 이전 시기의 무열왕릉비, 김인문비 귀부에 비해 역동성이 부족하고 경직되어 있다.

이문기경북대학교 역사교육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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