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 멈춰도 돼, 다시 걸을 수 있어”… 마포대교 위에서 만난 이웃들
마포대교 24시 르포
1970년 ‘제4한강교’로 태어난 마포대교가 올해로 개통 56주년을 맞았다. 한때 산업화의 상징으로 불렸던 이 다리는, 동시에 ‘자살대교’라는 이름도 함께 안고 있다. 하지만 14일과 15일, 새벽부터 밤까지 마포대교를 걸으며 만난 사람들의 모습은 조금 달랐다. 이 다리는 누군가에게는 출근길이고, 누군가에게는 산책로이며, 또 누군가에게는 하루를 버티게 해주는 공간이었다. 본지는 마포대교 개통 56돌을 맞아, 이 길 위에서 만난 이웃들의 내밀한 속마음을 담아봤다.

◇해 뜨는 다리 위, 하루가 시작된다
15일 오전 6시, 건물 사이로 해가 막 떠오르며 다리 위가 서서히 밝아졌다. 인적은 많지 않았지만 이미 하루를 시작한 이들의 발걸음이 이어졌다. 양복 차림의 중년 남성은 걸음을 재촉하며 “출근길이라 바쁘다”고 짧게 답한 뒤 자리를 떴다. 이어폰을 낀 채 자전거로 다리를 가로지르는 사람, 묵묵히 러닝을 하는 사람들도 눈에 띄었다.
오전 6시 10분쯤, 공덕 방향으로 향하던 김순철(83)씨는 폐지와 캔이 실린 자전거를 끌고 다리를 건너고 있었다. 여의도성모병원에서 검사를 받고 돌아가는 길이라고 했다. “간단한 검사는 새벽에도 한다”고. 김씨의 하루는 늘 이른 새벽에 시작된다. 평소에도 마포대교 일대를 돌며 폐지와 캔을 모은다. “큰돈은 아니고 라면값 정도 버는 거지”라고 했다. 담담한 말 한마디를 남기고 그는 능숙하게 자전거에 올라타 다시 길을 건넜다.
오전 7시, 여의도로 출근하는 직장인 나모(48)씨는 2년째 도보로 출퇴근하고 있다. “대중교통이랑 시간이 크게 차이 안 나더라. 이럴 바엔 걷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고 했다. 워킹맘인 그는 가족과의 저녁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일부러 출근 시간을 앞당긴다. 나씨는 마포대교가 “모드 전환 공간”이라고 했다. “걷는 동안 어제 일을 정리하고 오늘 할 일을 생각한다. 일상에서 업무로, 또 업무에서 일상으로 넘어가는 통로 같은 느낌이에요. 겨울엔 달 보면서 출근하기도 하는데 그게 힐링이에요. 이렇게 걷다 보면 ‘여기 참 예쁜 곳이었지’라는 생각도 듭니다.”
◇같은 다리, 각자의 고민을 안고 걷는다

전날 14일 오전 9시 반, 마포역 쪽에서 여의도로 향하던 직장인 최모(37)씨는 선글라스와 양산을 쓰고 다리를 건너고 있었다. 백팩 가방끈에는 분홍색 블라우스를 걸어둔 채였다. 그는 15년째 이 길로 출근한다. 지금은 한남동에 살지만 마포역 근처에 차를 세워두고 일부러 걸어 건넌다. “왕복하면 5㎞ 정도 되는데 운동 삼아 걷는다”고 했다. 걷는 동안에는 자연스럽게 생각이 정리된다고 했다. “어제 야근하면서 ‘회사 그만둬야 하나’ 같은 생각을 계속했다”며 “그래도 햇빛 받으면서 걷고 나면 머리가 좀 돌아간다”고 했다. 묵직한 고민도 다리 위에서는 조금 가벼워지는 모양이었다. 이 다리 위에서 위기 상황을 마주한 적도 있다. “작년에 난간에 매달린 중학생을 봤다”며 “간식 주면서 말을 걸었고 결국 회사 구내식당으로 데려가 밥을 사줬다”고 했다. 그 학생은 지금도 연락이 닿는 사이라고 했다.
오전 10시쯤 다리 중간에서는 육아휴직 중인 직장인 강병수(38)씨가 걷다 뛰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마포대교는 오늘이 처음”이라고 했다. 공덕동에 사는 그는 17개월 된 아들을 돌보기 위해 지난 2월부터 육아휴직 중이다. “아내가 나가서 좀 움직이라고 해서 나왔다”고 했다. 한강을 바라보던 그는 건너편 빌딩 숲을 가리키며 “저 안에 있었으면 지금 보고서 쓰고 있었을 것”이라고 했다. 요즘 그의 고민은 온통 육아다. 아이 건강검진 결과에 마음을 졸이고, 어린이집 적응을 걱정한다. “하루가 정말 빨리 간다”고 했다. 그는 취재 말미 기자를 보며 “멀리서 보고 혹시 힘든 상황인 줄 알고 도와주려 했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마포대교를 처음 찾은 날, 그는 남을 걱정하며 다리를 건넜다.
오전 11시 45분쯤 다리 위에서 만난 이병문(79)씨는 본인을 월남전 참전용사라고 소개했다. 마포역 쪽 한의원에서 침을 맞은 뒤 구로에서 열리는 참전자 모임에 가는 길이었다. “70년대에 서울로 올라왔을 때는 마포대교, 한강대교 정도밖에 없었는데 날도 좋고 마침 시간도 남아 오랜만에 젊은 시절 생각이 나서 걸으러 왔다”고 했다. 경찰로 일하던 시절 여의도 광장에서 열렸던 빌리 그래함 목사 행사, 국풍81 같은 기억들이 떠오른다고 했다. “걸어보니 세상이 엄청나게 변했다는 걸 느끼면서 과거를 저절로 반추하게 된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미래가 걱정된다는 말을 꺼냈다. “월남에 전투병으로 파병도 가고 하면서 피 흘려 일구고, 민주화도 이뤄냈고, 선진국 대열에도 들어선 나라인데 중동 사태도 그렇고 정치적으로도 그렇고 미래가 너무 불투명하니 걱정이 된다”고 했다. “우리는 살 만큼 살았는데, 다음 세대나 후손들이 살아갈 생각을 하니 걱정이 많이 된다”며 발걸음을 옮겼다.
해가 지고 가로등이 켜진 저녁, 마포대교는 또 다른 모습이었다. 4년 차 직장인 윤민아(28)씨는 을지로에서 마포역까지 지하철을 타고 온 뒤 일부러 내려 다리를 걸어 집으로 향한다고 했다. “헬스 가기 싫을 때 이렇게 걷는다”며 웃었지만, “일에 치이고 사람에 치인다”고 했다. “여기서는 아무 생각을 안 하려고 한다”며 “그냥 걸으면서 하루를 잊는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내가 언제까지 잘 먹고 살 수 있을까, 이 직장 오래 다닐 수 있을까” 같은 생각은 계속 남는다고 했다.
◇자살을 생각했던 다리, 이제는 다시 걷는 곳

밤으로 접어들수록 다리 위 공기는 한층 차분해졌다. 여의도 한강 공원에서 들려오는 버스킹 소리가 강 위로 퍼지고, 러닝을 하는 시민도 눈에 띄었다. 퇴근하는 직장인, 들뜬 외국인 관광객, 데이트를 마친 연인들이 서로 섞여 걸었다.
다리 위에서는 외국인 관광객들도 천천히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싱가포르에서 온 안티아·니란·빅토리아(21)씨는 서로 돌아가며 휴대전화로 영상을 찍고 있었다. 2주간의 한국 여행 마지막 날, 여의도 한강공원에서 피크닉을 마친 뒤 서울역 인근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일부러 이 다리를 걷기로 했다. “이렇게 좋은 날을 그냥 보내기 아까워서요.” BTS 팬인 이들은 뮤직비디오 ‘I NEED YOU’에 이 다리가 나온다며 “꼭 한 번 걸어보고 싶었다”고 했다. 1년 내내 여름인 싱가포르에서 온 그들에게 이번 여행의 마지막 날에 맞이한 한국의 봄 날씨는 “정말 축복 같다”고 했다.
비슷한 시각, 마포 쪽에서 걸어오는 이가 있었다. 퇴근하고 필라테스를 마친 정은경(50)씨였다. 그는 20년째 이 다리를 걸어 건넌다. 대중교통으로도 갈 수 있지만, 날이 좋으면 어김없이 걷는다. “비 오는 날은 좀 곤란하고, 한겨울엔 추워서 못 걷기도 하지만” 이렇게 걷기 좋은 날이면 발길이 자연스럽게 이쪽으로 향한다고 했다. ‘자살대교’라는 말을 모르는 건 아니다. “그런 이야기도 있지만” 하고 잠깐 말을 멈췄다가 이었다. “나에게는 그냥 이렇게 건너는 것만으로도 좋은 곳이에요.”

밤 9시 반, 마포대교 하단 데크. 교복을 입은 고등학생 허지안(16)양은 낙서가 빼곡한 벽 앞에 서 있었다. 잠시 문구들을 읽던 그는 마카를 들어 “안녕, 2년 만이야. 내년에 또 올게. 그땐 혼자 오지 마”라는 글과 고양이 그림을 남겼다.
허양이 이곳에 처음 온 건 2년 전, 중학생이던 시절이었다. “막연하게 죽고 싶다는 생각 때문이었다”고 했다. 하지만 그날, 난간에 서 있던 또래 학생을 붙잡았다. “그 언니가 ‘오늘 아니면 못 죽을 것 같다’고 했었다”고 했다. 이후 “말려줘서 고맙다”는 말을 듣고, 지금도 간헐적으로 연락을 주고받고 있다고 했다.
지금의 허양에게 마포대교는 다른 의미다. “여기 오면 나만 그런 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된다”며 “‘엄마를 생각하라’ ‘잠깐 멈춰도 돼’ 같은 문구들을 읽으면 같은 마음으로 사는 사람이 있다는 데서 위로를 얻는다”고 했다. “이렇게 예쁜데 여기서 죽긴 좀 아깝다는 생각도 든다”고 했다.
난간 위에는 낙서가 가득했다. 누군가 굵은 글씨로 이렇게 적어두었다. “잠깐 멈춰도 돼! 다시 걸을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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