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을 유럽에 알린 인물, 헨드릭 하멜

노성태 2026. 4. 29. 1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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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성태 원장의 남도인물열전](63)헨드릭 하멜
- ‘하멜 표류기’ 유럽에 조선을 알리다
2002년, 대한민국 축구대표팀은 광주월드컵 경기장에서 무적함대 스페인을 꺾고 4강에 오른다. 이때 대표팀 감독 히딩크가 날린 어퍼컷은 대한민국 국민의 감격과 환호를 대변하는 제스처였다. 어퍼컷의 사나이 히딩크 감독, 그의 국적은 풍차의 나라로 널리 알려진 네덜란드였다.

한국이 유럽과 인연을 맺은 최초의 나라가 히딩크의 나라 네덜란드였다. 1627년(인조 5), 얀 얀스 더 벨테브레이(Jan Janse de Weltevree)가 동료 두 명과 함께 제주도에 표착 후 귀화했고, 조선에서 받은 이름은 박연(朴燕, 1595~1656)이었다.

박연이 제주도에 표착한 26년 뒤인 1653년(효종 4), 이번에는 하멜을 비롯한 네덜란드인 38명이 제주도에 또 표착한다. 이들은 13년간 조선에 억류됐고, 이 중 살아서 되돌아간 자는 하멜 등 16명이었다.

하멜이 귀국 후 동인도 회사에 임금을 청구하기 위해 표류 과정을 정리한 업무보고서가 ‘하멜표류기’로 잘 알려진 ‘하멜보고서’였다.

1668년(현종 9) 암스테르담과 로테르담에서 출간된 ‘하멜보고서’는 유럽에서 선풍적 인기를 끌었고, 프랑스·독일·영국 등에서도 번역판이 발간된다.

‘하멜보고서’가 큰 인기를 끌었던 것은 전혀 알려지지 않은 신비의 나라 조선에 대한 정보와 조선과의 무역을 위한 기본 자료가 실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멜 일행이 쌓았다는 네덜란드 양식의 담장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조선과의 직접 교역을 위해 1669년(현종 10) 1천t급의 코레아(Corea)호를 건조한다. 동인도 출항 일지에는 네덜란드를 출발한 코레아호가 1670년(현종 11) 4월2일 바타비아(지금의 자카르타)에 도착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그러나 코레아호는 일본 에도막부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혀 조선에 들어올 수 없었다.

에도 막부는 네덜란드가 조선과 직접 교역한다면 데지마 상관을 폐쇄하겠다고 협박했고, 현실적으로 일본과의 교역이 수입에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던 동인도 회사는 막부의 대응에 굴복, 조선과의 접촉을 포기하고 만다.

- 하멜, 제주도에 표착하다
조선을 최초로 유럽에 알린 헨드릭 하멜(Hendrik Hamel, 1630-1692)은 네덜란드 자위트홀란트주의 도시인 호르큼(Gorkum, 현재는 호린헨)시에서 태어난다.

호르큼시의 문서보관소에는 하멜 가족의 출생 기록이 남아있다. 출생 기록 윗면에는 하멜 가문을 상징하는 산양이 그려져 있고, 문서의 하단 맨 오른쪽에 하멜에 대해 다음의 기록이 나온다.

“헨드릭 하멜은 동인도 회사의 일원으로 일본으로 항해하면서 한국 섬에 표착해 13년간 머물다가 작은 배를 이용해 일본으로 탈출했고, 마침내 고향 호르큼으로 돌아왔다. 그는 동인도 회사의 직원으로 두 번 항해했고, 호르큼으로 돌아와 1692년 2월12일 독신으로 세상을 떠났다.”

헨드릭 하멜의 일생을 간략하게 기록하고 있는데, 핵심은 동인도 회사의 직원이었다는 것과 한국에 표착해 13년간 머물렀다는 것, 그리고 독신으로 살았다는 내용이다.

하멜이 취직한 동인도 회사(東印度會社, East India Company, EIC)는 대항해 시대에 유럽 7개국에서 아시아의 무역을 독점하기 위해 세운 회사들이다. 영국이 가장 빠른 1600년에 건립했고, 두 번째가 하멜이 취업한 1602년 건립된 네덜란드의 동인도 회사였다. 네덜란드의 동인도 회사는 국가로부터 1799년까지 200년 동안 아프리카 희망봉에서 마젤란 해협에 이르는 지역에서 독점적인 무역과 화폐 주조 등의 권한을 부여받은 국책회사였다. 본부는 인도네시아 자바섬 서쪽 바타비아에 설치되었다.

하멜은 1653년(효종 4) 1월10일 네덜란드를 출발해 6월1일 본부가 있는 바타비아에 도착했다. 그에게 내려진 임무는 타이완 신임 총독인 레세르(Lesser, C.)를 임지에 내려주고, 무역품을 싣고 데지마(出島) 상관(商館)이 있는 일본 나가사키로 가는 것이었다.

동년 7월30일, 하멜 일행 64명은 무역선 스페르베르(Sperwer)호를 타고 타이완을 출발해 나가사키로 가는 도중 거센 풍랑을 만났고, 8월16일 제주도 근해에서 좌초된다. 64명 중 26명의 선원이 익사했고, 하멜 등 38명만 살아남아 모슬포 근해에 상륙한다.

이튿날인 8월17일, 제주목사 이원진이 이들을 발견하고 병사들을 보내 체포한다. 이원진은 유럽의 불청객 하멜 일행을 체포한 후 조정에 급히 사건을 적은 문서를 올린다. 이원진의 치계 내용은 ‘효종실록’에 기록돼 있다.

“배 한 척이 고을 남쪽에서 깨져 해안에 닿았기에 대정 현감 권극중과 판관 노정을 시켜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보게 했더니, 어느 나라 사람인지 모르겠으나 배가 바다 가운데에서 뒤집혀 살아남은 자는 38인이며 말이 통하지 않고 문자도 다릅니다. 배 안에는 약재·녹비(鹿皮) 따위의 물건을 많이 실었는데 목향 94포(包), 용뇌(龍腦) 4항(缸, 항아리), 녹비 2만7천이었습니다. 파란 눈에 코가 높고 노란 머리에 수염이 짧았는데, 혹 구레나룻은 깎고 콧수염을 남긴 자도 있었습니다. 그 옷은 길어서 넓적다리까지 내려오고 옷자락이 넷으로 갈라졌으며 옷깃 옆과 소매 밑에 다 이어 묶는 끈이 있었으며 바지는 주름이 잡혀 치마 같았습니다. 왜어를 아는 자를 시켜 묻기를 ‘너희는 서양의 크리스챤인가?’ 하니, 다들 ‘야야’(耶耶)했고, 우리나라를 가리켜 물으니 고려라 하고, 본도(本島)를 가리켜 물으니 오질도(吾叱島)라 하고, 중원을 가리켜 물으니 대명(大明)이라고도 하고 혹 대방(大邦)이라고도 했으며, 서북을 가리켜 물으니 달단이라 하고, 정동을 가리켜 물으니 일본이라고도 하고 낭가삭기(郞可朔其)라고도 했는데, 이어서 가려는 곳을 물으니, 낭가삭기라 했습니다.”

사료에 나오는 목적지 ‘낭가삭기’는 그들의 상관이 있는 나가사키(長崎)였다.

하멜 일행은 9개월 동안 제주도에 억류된다. 그해 10월29일, 통역으로 내려온 네덜란드인 벨테브레이(박연)를 만난다.

‘하멜표류기’에는 오로지 실무적인 이야기만 나눈 것으로만 나온다. 그러나 18세기 인물인 윤행임이 지은 ‘석재고’(碩齋稿)에는 “박연이 하멜 일행을 처음 만난 뒤 숙소로 돌아와 소매가 다 젖도록 울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하멜에게는 표류하고 나서 얼마 안 지나 만난 이역만리에 사는 네덜란드 사람 정도였겠지만, 박연(벨테브레이)으로서는 26년 만에, 그것도 이역만리에서 만난 동포였으니, 감회가 남달랐을 것 같다.

- 한양으로 옮겨진 후 강진으로 유배
1654년(효종 5) 6월 한양에 도착한 하멜 일행은 국왕 효종을 배알한다. 효종은 이들 중 몇몇 선원들에게 ‘남북산’과 ‘남이산’이라는 이름도 지어준다. 두 사람의 한국 이름은 ‘승정원일기’에 보인다. 효종이 이들에게 ‘남’(南)을 성으로 내려준 것은 네덜란드인을 ‘남만인’(南蠻人)이라 불렀고, 그래서 남만인의 앞 글자 ‘남’을 성씨로 내려준 것이었다. 이들의 후손들은 후일 병영 남씨가 된다.

북벌을 준비하던 효종은 이들을 훈련도감에 배치한다. 하멜 일행은 군인으로 대우를 받았지만, 생김새가 다른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고관들의 집을 방문해 구경거리가 되기도 했다. 한양에서의 생활은 고되고 힘들었다.

그런데 차에 사고가 터진다. 하멜 일행이던 제임스와 보스는 청나라 사신이 조선에 들어오자, 홍제교 근처에 숨어 있다가 청나라 사신 앞에 나타나 본국으로의 송환을 요청하고 여의치 않자 탈출을 시도했다. 이 사건은 청과 조선 사이에 외교 분쟁을 일으킬 수 있는 사건이었다. 조선 조정은 청나라 사신에게 뇌물을 써 수습했고, 하멜 일행은 2년여 만인 1656년 3월, 장 50대에 처해진 후 강진 병영으로 유배된다. 하멜 일행이 강진과 인연을 맺은 연유다.

강진으로 유배된 하멜 일행은 1663년(현종 4)까지 약 7년 동안 병영에서 보낸다.

‘하멜보고서’에는 13년 억류 생활의 절반 이상을 병영에서 보냈지만, 병영에서의 삶에 대한 기록은 의외로 적다. 이는 하멜 일행이 병영에서 일상적인 삶을 살았음을 보여준다. 병영에 도착한 후 스페르베르호의 무역품인 사슴 가죽을 되돌려 받았고, 그 사슴 가죽으로 옷을 만들어 입거나 일부는 팔아서 집과 생활필수품을 마련하기도 했다. 병영으로 옮겨온 뒤에는 각종 부역에도 동원됐다. 한 달에 두 번 병영성 광장의 풀을 뽑고 청소하는 일도 그중 하나였다.

오늘 7년 동안 거주했던 강진 병영에 하멜 기념관이 건립되고, 호르큼시에서 보낸 하멜 동상이 풍차와 함께 서 있는 이유다.
강진 병영성

하멜 기념관

하멜 동상

하멜 기념관 앞 풍차

- 여수를 탈출, 고국으로 돌아가다
억류된 지 10여 년이 지난 1666년(현종 7), 하멜 일행 중 생존자는 단 22명이었다. 강진 지방의 가뭄으로 식량이 부족해지자, 정부는 전라좌수영이 있는 여수에 12명, 순천과 남원에 각각 5명씩 분산 수용한다.

세 곳에서 그들은 나뭇가지를 잘라 화살을 만들고, 쌀을 찧고, 새끼를 꼬는 등 고달픈 노역은 계속됐다. 여수에서 바다를 만난 그들은 탈출을 꿈꾼다. 모든 재산을 모아 조그마한 배 한 척을 구입한 후 동년 9월4일, 하멜 등 8명이 배에 오른다. 그리고 그들의 상선이 있는 나가사키 데지마(出島) 상관에 도착한다. 제주도에 표착한 지 13년 만이었다.

노성태·남도역사연구원장
하멜 일행의 탈출 소식이 막부에 전해지자 막부에서는 조선에 문의하게 됐고, 조선에 남아있던 하멜 일행에 대한 송환 교섭도 진행된다. 1667년(현종 8), 조선과 막부의 송환 교섭이 끝나자, 데지마에 있던 하멜 일행은 일본의 출항 허가를 얻어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었고, 조선에 남아있던 8명도 네덜란드 상관이 있던 일본 나가사키로 떠난다.

표류한 하멜 일행 38명 중 13년의 억류 후 조선을 탈출할 때까지 22명이 죽고, 살아 돌아간 자는 16명에 불과했다. 조선은 국가적인 차원에서 이들을 억류했지만, 하멜 일행에게는 엄청난 고난과 불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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