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종훈의 근대뉴스 오디세이] 황해도 용당포 앞바다 학생 조난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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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침몰 사고로 304명이 희생된 비극은 여전히 깊은 상흔으로 남아 있다.
"해주 용당포에서 일어난 200여 명 생도의 조난 사건은 듣기만 해도 소름이 끼칠 만한 참혹한 일이다. 배가 전복된 것은 물론 바람과 파도의 죄(罪)라 하겠지만, 그 같이 험악한 풍랑에 어린 생도들을 싣고 들어간 선생들의 책임도 적지 않은 줄 안다. 그리하고 또 군함에서도 그러한 위험이 있을 줄을 예탁(豫度, 미리 헤아려 짐작함)은 못 하였다 할지라도 웬만하면 구경시키는 것을 정지는 못 하였던가. 구경을 시킨 편이나 구경에 미쳐서 생도들의 위험을 돌아보지 않은 선생들이나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조난한 생도의 학부형이 분함에 못 이겨 학교 교장을 때려죽였다는 소문은 과연 정말인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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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생자 속출, 유족들의 통곡
“왜 못 막았나”, 반복된 질문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침몰 사고로 304명이 희생된 비극은 여전히 깊은 상흔으로 남아 있다. 100년 전 4월에도 이런 참담한 사건이 있었다. 공식적으로 68명의 어린 학생들이 익사한 황해도 용당포(龍塘浦) 앞바다 조난 사고다.
1924년 4월 26일자 매일신보를 보자. “4월 25일 오후 1시 황해도 용당포에 정박 중인 구축함 관람을 하기 위하여 해주(海州), 석동(席洞), 서종(西鐘)보통학교 등 3개 학교와 동아강습소 생도 등 200여 명이 1톤쯤 되는 배를 타고 구축함에 가까이 갔을 때에, 마침 바람이 불어서 구축함과 충돌하여 일부분이 파괴되어 바닷물이 선중(船中)에 침입하여 생도 대부분은 물로 뛰어 들어가고 기타 생도는 경비선 외 5척 배가 출동하여 구조에 노력하였으나 물에 빠진 생도는 구조할 여망(餘望, 장래의 희망)이 없다더라.”
다음날 동아일보에 기사는 계속된다. “지난 25일 용당포에 정박 중인 구축함 매(梅), 남(楠)의 두 배(船)를 관람하고자 하여 약 250여 명이 일본식 짐배 산성환(山城丸·44톤)을 타고 정오쯤 되어 육지를 출발하여, 약 1해리 반쯤 되는 바다 가운데에 정박 중인 구축함 매(梅)에 접근하여 장차 구축함에 오르고자 할 때에 서로 충돌이 되어 드디어 전복되고 말았는데, 이 사이에 경비선과 구축함에서는 즉시 종선(從船, 큰 배에 딸려 있는 작은 배)을 내려 구조를 시작하였으나 159명을 구조하기에 지나지 못하였으며 다른 군함들도 정박 날짜를 연기해 가지고 수색에 진력 중이며, 연안에 있는 경비대에 대하여도 구조를 의뢰하였으나 25일 저녁 7시 반까지에 시체 4개를 건졌을 뿐인데 아마 80~90명은 그냥 물에 빠져 죽었다 할 수밖에 없는데, 빠져 죽은 사람들의 친척들은 어찌할 줄 모르고 눈물에 잠겨 행여 살았나 하고 기다리고 있는데, 그 참혹한 상황은 눈으로 볼 수 없다 한다. 이 소식이 황해도청에 오자 도지사 이하 경찰부장이 현장에 급행하였으며 총독부에서도 속관(屬官, 장관에게 속한 관원)이 현장으로 출장하였더라.”
생도 조난 사건의 책임은 과연 누구에게 있을까. 4월 29일자 매일신보를 통해 이를 짚어보자. “해주 용당포에서 일어난 200여 명 생도의 조난 사건은 듣기만 해도 소름이 끼칠 만한 참혹한 일이다. 배가 전복된 것은 물론 바람과 파도의 죄(罪)라 하겠지만, 그 같이 험악한 풍랑에 어린 생도들을 싣고 들어간 선생들의 책임도 적지 않은 줄 안다. 그리하고 또 군함에서도 그러한 위험이 있을 줄을 예탁(豫度, 미리 헤아려 짐작함)은 못 하였다 할지라도 웬만하면 구경시키는 것을 정지는 못 하였던가. 구경을 시킨 편이나 구경에 미쳐서 생도들의 위험을 돌아보지 않은 선생들이나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조난한 생도의 학부형이 분함에 못 이겨 학교 교장을 때려죽였다는 소문은 과연 정말인 것인가.”

조난 사고 이후 실종자와 시신을 찾기 위한 수색이 이어지는 가운데, 각지에선 온정의 손길이 잇따랐다. “황해도 해주 용당포 참사 사건으로 해녀(海女)까지 와서 수색에 노력한다 함은 이미 보도한 바어니와, 그 후에도 계속하여 해주에 있는 각 청년 단체와 조선일보 해주지국을 위시하여 각 신문지국에서 연합하여 수색에 노력하는 중인데, 날짜는 점점 오래고 시체는 찾지 못하므로 일반의 불평이 더욱 높아가는데, 요사이에 와서는 배가 출발할 때에 서 있던 경관과 선생에게 대하여 무책임하다는 질문이 더욱 많아서 죽은 이의 부형들은 경찰부장에게 가서 질문을 하는 중이며, 여론으로도 역시 그와 같이 물결이 심한 때에 배를 출발케 한 것은 당연히 교사와 경관의 책임이라고 불평이 자자하며, 이에 대하여 각 처에서 동정 물품이 많이 오는 중 해주 북행정에 사는 최경태(崔景台)와 최창환(崔昌煥) 두 분은 구조된 학생들에게 식료품을 제공하고 친히 각 여관으로 다니면서 위문을 하며, 동리에 사는 유훈영(劉壎榮)씨와 최병훈(崔丙薰) 두 분은 광목 2필씩을 면사무소로 보내 헐벗은 동족에게 나누어 주라고 하였으며, 그중에도 동정할 바는 해주 중정에 사는 박성섭(朴成燮)씨는 생활이 어려워서 하루 벌어 하루 먹는 사람이었건마는 끓는 듯한 동정의 마음을 금치 못하여 현금 3원을 면사무소로 보내 조난 동족에게 나누어 달라고 청구하였는데, 일반은 매우 감사함을 말지 아니 한다더라.” (1924년 5월 4일자 조선일보)
사건 발생 2년 뒤 희생자들의 한을 기리기 위해 용당포에 기념비를 세운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지금으로부터 2년 전 4월 25일에 해주 용당포에서 일어났던 조난 사건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몸 소름이 끼치는 비절참절(悲絶慘絶)한 불상사(不祥事)이다. 억울하게도 천진난만한 자녀를 잃어버린 조난 유족들은 하늘을 우러러 통곡하며 땅을 굴러 탄식하기를 몇천 번이나 하였지마는 한 번 영원의 길을 떠난 자녀가 다시 돌아올 수가 없는 것은 인생의 원칙이라, 할 수 없이 이 참혹하고도 억울한 죽음을 영원히 기념해 보자는 의논이 조난자 유족회에서 일치되어 힘을 합해서 석비(石碑)를 세우기로 하고 벌써 몇 개월 전에 석수(石手)에게 위임하여 비(碑)를 만들던 바, 그 비석은 장당리 제일 높은 곳에 주위가 약 5간(間, 약 909cm) 가량, 높이가 8척(尺, 약 242cm) 가량이나 되게 단(壇)을 쌓고 그 위에다 세웠으며 비석 고(高)가 10척(약 303cm)이요 주위가 8척 가량이며, 그와 같이 비석을 만들어 세우기까지에 비용은 800여 원이나 된다더라.”(1926년 4월 25일자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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