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人워치]'소믈리에 1호', 특급 호텔 '유리 천장' 깬 사연
대한민국 국가대표 소믈리에 1호
F&B 스페셜리스트에서 경영진으로 변신

그동안 호텔 업계에서는 특정 분야의 깊은 전문성을 인정받으면서도, 정작 호텔 전체의 살림을 책임지는 경영진의 영역으로 올라가는 데에는 보이지 않는 '유리천장'이 존재해 왔다. 소믈리에가 대표적이다. "와인은 잘 알지만, 손익계산서나 객실 가동률을 관리할 수 있겠느냐"는 편견 때문이다.
하지만 최근 이런 '유리천장'이 깨졌다. 소피텔 앰배서더 서울 호텔 & 서비스드 레지던스의 부총지배인 자리에 오른 정하봉 부총지배인이 그 주인공이다. 그는 대한민국 국가 대표 소믈리에 1호이자, 프랑스 샴페인·보르도 협회로부터 기사 작위를 받은 와인 전문가다. '와인 전문가'를 넘어 '호텔 경영 전문가'로 커리어를 넓혀온 그의 여정을 들어봤다.
한계는 없다
그가 호텔업에 첫발을 내디딘 것은 국내 와인 시장이 막 태동하던 2003년 JW 메리어트 입사 때부터다. 그는 "2000년대 초반 머지않아 국내 와인 시장이 폭발적으로 성장할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며 "호텔 역시 전문성을 갖춘 소믈리에의 필요성을 느꼈고, 2005년 국내 최초로 공식 '소믈리에' 타이틀을 부여받으며 본격적인 커리어를 시작했다"고 밝혔다.
이후 그의 행보는 거침이 없었다. 2008년 한국 소믈리에 대회 왕중왕전 우승을 거머쥐며 실력을 입증했다. 2010년에는 세계 소믈리에 대회에 한국인 최초 국가대표로 출전하는 등 국내 와인 역사에 독보적인 이정표를 남겼다.
그러나 그는 스스로를 특정 영역에 가두지 않았다. 소믈리에 출신이 부총지배인이라는 경영진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던 비결은 지독할 정도의 '자기계발'과 '통합적 사고'에 있다. 그는 호텔리어로서의 한계를 스스로 규정짓지 않기 위해 부서 간의 견고한 '칸막이'를 직접 허물어 왔다.

실제로 그는 식음료 이사에서 객실부로 자원하며 호텔 운영 전반을 몸소 익혔다. 식음과 객실이라는 호텔 운영의 두 핵심 축을 모두 섭렵한 뒤 경영진에 합류했다. 그는 "소믈리에는 고객 경험의 시작과 끝을 설계하는 직무"라면서 "현장의 '스페셜리스트'를 넘어 호텔 전체를 아우르는 '제너럴리스트'로 거듭나기 위한 필수적인 선택이었다"고 강조했다.
그는 지금의 자리에 오르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거듭했다. 새벽마다 책을 보며 하루를 준비하고, 주말이면 한남동과 성수동의 핫플레이스를 2~3시간씩 걸으며 현시대의 감각을 몸소 익혔다. 매년 '트렌드 코리아'를 세 번씩 정독하며 시대의 흐름을 파악하는 일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정 부총지배인은 "작년 12월 27일에 101번째 경영 서적을 완독하며 100권 읽기 목표를 달성했다"며 "경영, 경제, 심리, 트렌드 등 카테고리를 나누지 않는 방대한 인풋이 있어야만 고객의 복잡한 니즈를 파악하고 이를 현장 비즈니스에 투영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정 부총지배인은 후배들에게도 '칸막이 없는 성장'이 중요하다고 조언한다. 그는 "단순히 서빙을 잘하는 사람이 아니라 '서비스 전문가'가 되기 위해서는 F&B와 객실부 등 최소 3개 이상의 핵심 부서를 경험해야 한다"며 "타이틀을 아홉 번 바꾸며 부총지배인까지 온 나의 여정처럼 다양한 경험을 통해 자신만의 인사이트를 구축한 사람만이 호텔이라는 거대한 조직을 지휘할 자격을 얻게 된다"고 강조했다.
'서울 속 파리'에서 '서울다움'으로
2021년 소피텔 앰배서더 서울의 프리오프닝 멤버로 합류한 그는 초기 전략을 '프랑스 정체성'에 맞췄다. 고객에게 '프랑스에 진심인 호텔'이라는 이미지를 심는 데 집중했다. 일반적인 호텔 뷔페 대신 프랑스 지역 테마를 살린 미식을 선보인 것이 대표적이다. 정 부총지배인은 "프랑스 여행에는 많은 비용과 시간이 소요되는데, 이곳을 찾는 고객들이 가까운 곳에서 프랑스 여행의 감성과 기분을 느끼게 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개관 5년 차에 접어든 현재, 그의 전략은 '로컬화'로 진화했다. 그는 "초기에는 파리의 소피텔을 어떻게 서울에 입힐까를 고민했다면, 이제는 소피텔 서울만이 보여줄 수 있는 '서울다움'을 찾는 데 집중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는 브랜드의 원형을 유지하되 로컬의 색채를 입히는 '컬처럴 링크' 전략이다. 그는 외국인 투숙객 비중이 급증하는 현상을 포착하고, 미니바 아이템을 프랑스 과자에서 국내 유명 'K스낵'으로 전격 교체했다. 고객들이 작은 부분에서부터 한국을 느끼게 하기 위한 배려다.

또 한식당이 없는 구조적 한계를 오히려 기회로 삼아 6층 파리지앵 라운지 레스파스에서 '불고기'를 판매토록 했다. 정 부총지배인은 "외국인 고객이 서울에 왔다면 한 번쯤 경험하고 싶은 로컬 미식을 소피텔만의 감성으로 큐레이션하는 것이 중요하다"면서 "이미 라운지의 불고기 메뉴는 외국인 고객들 사이에서 높은 매출을 기록하며 브랜드의 새로운 경쟁력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호텔 운영을 '오케스트라'에 비유한다. 지휘자가 단원들의 악기 상태와 컨디션을 매 순간 살피듯, 그 역시 매일 아침 10시 각 부서장이 모이는 데일리 미팅을 주재한다. 이 자리에서는 전날 밤 발생한 사소한 서비스 장애부터 당직 지배인이 어떻게 고객의 불편을 해결했는지까지 모든 정보가 투명하게 공유된다.
정 부총지배인은 "오케스트라 공연에서 한 명만 연습이 안돼있거나 실수를 하면 전체 화음이 무너지듯, 호텔도 마찬가지다"라고 설명했다. 이어 "고객이 호텔에 머물며 겪는 10번의 접점 중 9번을 만족하더라도 단 한 번의 실패가 발생하면, 고객은 그 나쁜 기억으로 모든 노력을 평가절하하게 된다"며 "사람은 긍정적인 경험은 무심히 지나치지만 부정적인 경험은 크게 인지하기 때문에 현장에서는 단 1%의 빈틈도 허용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다음 목표는
정 부총지배인은 오는 2030년까지 서울이 전 세계 '어퍼 럭셔리(Upper Luxury)' 호텔 브랜드들의 최대 격전지가 될 것으로 전망했다. 어퍼 럭셔리란, 일반적인 럭셔리 등급 내에서도 최상위 구간에 포진한 초호화 호텔을 뜻한다. 이미 로즈우드, 만다린 오리엔탈, 아만 등 글로벌 최상위 브랜드들이 줄지어 서울 진출을 예고하며 공세를 펴고 있다.
치열해지는 특급 호텔 경쟁의 한복판에서 그가 내세운 소피텔 서울만의 필살기는 바로 '이모셔널 인게이지먼트(Emotional Engagement, 감성적 몰입)'다. 화려한 하드웨어를 넘어 고객의 마음을 파고드는 정서적 연결을 통해 대체 불가능한 브랜드 로열티를 구축하겠다는 전략이다.
그는 "시설과 서비스는 이미 상향 평준화됐다. 이제는 직원 한 명의 30초가 럭셔리를 결정한다"면서 "기술이 발달하고 AI가 모든 프로세스를 대체할수록 결국 사람이 주는 정서적 터치가 럭셔리의 최종 승부처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건네는 짧은 대화, 고객이 말하지 않은 취향을 읽어내는 세심함이 로열티를 결정한다는 논리다. 이를 위해 그는 숙련된 인재들이 이탈하지 않고 성장할 수 있도록 교육을 진행하는 등 R&D 예산을 경영 계획에 적극 반영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그는 호텔 산업의 성장성을 강조했다. 정 부총지배인은 "단군 이래 한국 관광 산업에 이처럼 긍정적인 전망이 있었던 적은 없었다"며 "방한 관광객이 사상 최대를 향하고 있고 서울은 글로벌 럭셔리 호텔의 격전지가 되고 있다. 지금은 이 산업에 도전하기 가장 좋은 시기"라고 강조했다.
그의 최종적인 지향점은 '총지배인'이다. 정 부총지배인은 "3년 뒤에는 5개 국어를 완벽히 구사하며 글로벌 VIP들을 직접 응대하고 케어하는 총지배인이 되는 것이 단기적 목표"라고 밝혔다. 하지만 그의 꿈은 호텔의 안에만 머물지 않는다. 은퇴 후에는 평생의 업인 와인에 인문학적 통찰을 결합해 대중과 깊게 소통하는 '와인 인문학자'로서의 삶을 구상하고 있다.
실제로 그는 현재 한국국제소믈리에협회(KISA) 수석 부회장직을 수행하며, 유튜브 등 다양한 채널을 통해 와인의 문턱을 낮추고 대중과 호흡하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고 있다.
정 부총지배인은 "와인 한 병에 수만 가지 서사가 담겨 있듯, 호텔이라는 공간 역시 수많은 고객의 인생 이야기가 교차하는 곳"이라면서 "훗날 고객들에게 가장 따뜻한 환대와 잊지 못할 감성적 터치를 전달했던 진정한 호텔리어로 기억되고 싶다"고 밝혔다.
김다이 (neverdie@bizwatch.co.kr)
ⓒ비즈니스워치의 소중한 저작물입니다. 무단전재와 재배포를 금합니다.
Copyright © 비즈워치.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마곡 시대' 연 대명소노…IPO까지 순항할까
- 너도나도 '스페이스X 최대 편입' ETF…"근데 얼마에 살진 몰라요"
- 무신사의 오프라인 끝판왕…'무신사 백화점'이 온다
- 에이비엘바이오 기술수출 신약, 美 허가문턱서 변수
- 하림 회장은 왜 '슈퍼마켓'을 사려는 걸까
- [단독]제이알리츠, 이례적 'A등급' 부도, 신평사 안일한 대응 논란
- 일어설 힘도 없다…명품 플랫폼, '제 2의 발란' 사태 오나
- [공모주달력]매출 70배 뛴 피지컬 AI 마키나락스, 수요예측 주목
- 이 대통령 장특공제 폐지 '선긋기'…"비거주 보유 감면 축소"
- 한화시스템 '어닝 쇼크'에…신한證 투자의견 '중립' 하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