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프의 Pick]'기본'으로 지킨 100년…웨스틴 조선 전배성 셰프
5시간 양파 볶아 완성한 어니언 스프까지
정체성 지키며 시대에 맞춰 조금씩 변화

셰프의 요리는 종종 예술작품에 비유되곤 합니다. 셰프는 접시라는 캔버스 위에 자신만의 철학과 재료에 대한 경외심을 담아 수만 번의 칼질로 하나의 작품을 만듭니다. 예술가들의 그것과 견주어도 전혀 밀리지 않죠. [셰프의 Pick]은 그들의 이런 노력을 담아냅니다. 국내 호텔 셰프들의 이야기와 요리에 담긴 철학 한 조각을 음미해보려는 시도입니다. 최고의 셰프들이 전하는 화려하고 소박한 이야기를 맛 보실 준비가 되셨나요? 이제 출발합니다. [편집자]
1924년 조선호텔(현 웨스틴 조선 서울)에 '팜코트'라는 이름의 양식당이 문을 열었다. 한국 최초의 프렌치 레스토랑으로 한국 양식 문화의 출발점이었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산업화의 격랑을 거치며 이곳은 정치인과 사업가, 문화계 인사들이 모이는 사교의 장으로 자리했다.
팜코트는 1970년 '나인스 게이트'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었다. 서울의 사대문과 사소문에 이어 아홉 번째 문이라는 의미를 담은 이름이었다. 현재는 프렌치를 기반으로 한 아메리칸 다이닝의 모습으로 손님을 맞고 있다.
100년의 시간 동안 레스토랑의 모습은 여러 차례 바뀌었다. 하지만 팜코트 시절부터 이어져 내려온 레시피 노트는 여전히 주방에 남아 있다. 그 노트를 지키는 새로운 주방장이 지난 2024년 4월 나인스게이트에 부임했다. 1981년생의 전배성 셰프다. 보통 1970년대생이 주방장을 맡는 호텔업계에서는 젊은 축에 속하는 셰프다.
전 셰프는 나인스 게이트의 전통을 이어가면서도 시대에 맞는 변화를 시도하고 있다. 지난 14일 웨스틴 조선 서울 나인스 게이트에서 전배성 셰프를 만나 100년 전통의 레스토랑을 지키는 그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기본을 배우다
전배성 셰프가 요리를 시작한 것은 고등학생 때였다. 외아들이라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던 그의 집에는 친구들이 자주 놀러왔다. 그때 그가 친구들에게 요리를 해주며 즐거움을 느끼기 시작했다. 가장 인기가 좋았던 요리는 떡볶이였다. 간단한 요리였지만 친구들은 맛있게 먹었고 행복해했다. 한때 문학도를 꿈꾸던 소년이 조리과로 진로를 바꾼 순간이었다. 떡볶이는 그를 요리의 길로 이끌었다.
전 셰프는 "누군가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다는 것에 감명을 받았다"며 "진로를 고민할 때 내가 잘할 수 있는 것이 뭘까 고민하기보다 '이 길로 가야겠다'고 생각해 요리의 꿈을 키우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지금이야 셰프라는 직업이 각광받지만 당시만 해도 달랐다. 주변에 요리로 진로를 정한 사람도 거의 없었다. 그는 "단순하게 내가 좋아하는 것으로 남을 행복하게 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됐다고 생각했다"고 했다. 지금도 그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은 떡볶이다.

대학에 진학해 양식을 전공으로 택한 이유도 순수했다. 전 셰프는 "TV와 영화에서 보던 셰프들이 스테이크를 굽는 모습이 멋있어 보였다"며 웃었다. 2006년 요리사로서의 첫걸음을 두바이에서 시작하기로 한 것 역시 비슷했다. 그는 "미국을 갈까 고민도 했지만 당시 한창 뜨고 있던 도시인 두바이로 가기로 했다"며 "당시 에드워드 권 셰프가 버즈 알 아랍에서 일하는 모습을 TV에서 봤던 터라 두바이에 대한 호기심이 컸다"고 회상했다.
그가 요리사 경력을 시작한 첫 직장은 두바이의 인터컨티넨탈 호텔이었다. 첫 직장 생활은 녹록지 않았다. 근무 환경은 혹독했다. 그는 일주일에 간신히 하루만 쉬면서 매일 14시간 이상 일했다. 해외 근무 특성상 언어적 장벽도 있었다. 생소한 식재료들을 영어로 익혀야 했다.
문화적 차이도 컸다. 중동의 각국에서 온 다양한 민족이 주방에 섞여 있다 보니 부딪히고 싸우기 일쑤였다. 그렇게 1년 8개월을 일했다. 젊었기에 가능했던 강행군이었다. 그는 "지금은 그렇게 일하지는 못할 것 같다"며 웃었다.
하지만 배울 것도 많았다. 전 셰프는 "여러 문화를 겪으면서 사람을 이해하는 법을 배운 것이 큰 자산이 됐다"며 "처음에는 서로 다른 배경 때문에 부딪혔지만 그때 상대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법을 익힌 것이 현재도 큰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기본을 지키다
전 셰프는 두바이에서의 첫 직장 생활을 접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귀국 후에도 그가 선택한 것은 개인 레스토랑이 아닌 호텔이었다. 그는 "작은 업장에서 일하는 것보다 큰 곳에서 여러 사람과 함께 일하고 싶어 호텔을 선택했다"면서 "호텔에서 양식 셰프는 룸서비스, 라운지, 뷔페, 연회 등 다양한 분야에서 일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고 말했다.
전 셰프는 2010년 웨스틴 조선 서울에 합류했다. 그는 이탈리안 레스토랑 루브리카와 뷔페 아리아에서 6개월씩 일한 후 나인스 게이트로 옮겨 현재까지 14년째 이 레스토랑에 몸을 담고 있다. 주방장이 된 것은 정확히 2년 전인 2024년 4월이었다.

주방장이 되면서 그가 느낀 가장 큰 변화는 책임의 무게였다. 부주방장일 때는 주어진 역할을 수행하면 됐다. 하지만 주방장이 된 이후에는 달랐다. 그때그때 나가는 접시 하나의 퀄리티부터 메뉴 구성, 고객 응대까지 주방장의 모든 선택이 레스토랑의 평가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 전 셰프는 "주방장의 잘못된 지시 하나가 큰 파장을 일으켜서 잘못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점이 가장 어렵다"고 말했다.
주방장이 된 직후 1년간은 그의 요리사 경력에서도 가장 힘든 때로 꼽힌다. 어떻게 해야 할지, 뭐가 맞는지 알 수 없었던 때였다. 나인스 게이트에서만 10년 이상을 일했는데도 느껴지는 압박은 달랐다. 그는 "여기서 오래 일했는데도 주방장이 되니 무게감이 완전히 달랐다"고 말했다.

특히 무거웠던 것은 100년 전통을 지켜야 한다는 부담이었다. 나인스 게이트는 한국 최초의 양식당이라는 역사를 지닌 곳이다. 수십 년간 이곳을 찾아온 단골 손님들이 무척이나 많다. 이름을 대면 알 만한 유명 기업 오너부터 문화계 인사까지 다양하다. 그들이 기대하는 맛이 있고 그것을 지키는 것이 주방장의 첫 번째 책임이라고 전 셰프는 생각한다. 그는 "주방장이 바뀌었다고 음식이 변했다는 말을 들으면 안 된다"고 강조했다.
전 셰프의 요리 철학은 '기본'으로 요약된다. 그는 "기본이 흔들리면 정체성이 사라진다"며 "기본은 지키되 그 위에 새로운 시도를 더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 철학은 그가 요리를 해온 시간 속에서 형성됐다. 그도 젊었을 때는 분자요리와 같은 새로운 기법에 관심이 많았다. 최신 트렌드를 따라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깨달았다. 새로운 유행은 주목받다가도 금방 사라졌다. 결국 사람들이 다시 찾는 것은 '오리지널리티'였다. 전 셰프는 "화려한 기술도 좋지만 좋은 재료를 제대로, 바로 조리해서 맛있게 제공하는 것이 진짜 요리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100년의 맛
전 셰프의 요리 철학인 '기본'을 보여주는 메뉴는 바로 나인스 게이트의 '어니언 수프'다. 어니언 수프는 나인스 게이트의 긴 역사를 함께 해온 대표 메뉴다.
나인스 게이트의 어니언 수프는 엄청난 정성이 들어가는 요리다. 핵심 재료인 양파를 볶는 데만 무려 5시간이 걸린다. 센 불에서 구워 수분을 날리고, 중간 불로 색을 내고, 마지막에 버터와 어우러지게 캐러멜라이징하는 과정이 핵심이다. 전 셰프는 "양파를 오래 볶으면 소화도 잘 되고 단맛이 올라온다"며 "맛의 80%가 양파를 어떻게 볶느냐에서 결정된다"고 강조했다.
불 앞을 지키며 천천히 수분을 날리고 색을 입히는 과정은 조급함을 허락하지 않는다. 시간을 아끼겠다고 급하게 볶으면 그 맛이 나지 않는다. 5시간을 꼬박 지켜 정성을 다해야 양파 본연의 단맛이 제대로 올라온다. 잠깐 한눈을 팔았다가 한 번 태우기라도 하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한순간 방심하면 5시간이 물거품이 된다.

전 셰프는 "주방이 바쁘다 보니 한순간 방심할 때도 있어 몇 번 태운 적도 있다"면서 "그래서 한때는 양파 볶기가 제일 싫었다"고 웃었다. 대신 이렇게 볶아진 양파는 무척 맛이 좋다. 그는 "설탕도 들어가지 않고 양파만 볶았는데도 달달해서 그냥 빵에 발라 먹어도 맛있을 정도"라고 자부했다.
양파 볶기가 끝나도 일은 끝나지 않는다. 수프의 베이스가 되는 육수를 만들어야 한다. 비프 스톡을 끓이는 데 8시간, 치킨 스톡을 끓이는 데 6시간이 걸린다. 여기에 빵을 굽는 데 30분, 치즈를 녹이는 데 1시간, 최종적으로 모든 재료를 합쳐 끓이는 데 3시간이 더 필요하다. 이렇게 어렵게 한 접시의 어니언 수프가 완성된다. 전 셰프는 "메인 요리 전에 나가는 하나의 수프지만 시간은 가장 오래 걸리는 요리"라며 "여기에 드는 정성은 어느 메뉴 못지않다"고 강조했다.

어니언 수프는 단골 고객들이 가장 사랑하는 메뉴다. 어떤 고객은 어니언 수프만 먹으러 나인스 게이트에 방문할 정도다. 감기에 걸렸을 때, 속이 안 좋을 때, 한여름에도 보양식처럼 찾는다.
나인스 게이트의 대표 메뉴인 만큼 테이블에 오르기 전 마지막으로 확인하는 사람도 주방장인 전 셰프다. 그는 매일 손님에게 수프가 나가기 전 직접 맛을 본다. 단골 고객들이 가장 예민하게 반응하는 메뉴이기 때문이다. 전 셰프는 "저보다 더 오랜 시간 어니언 수프를 드신 분들이 많다"며 "조금만 맛이 바뀌어도 오늘은 간이 세다거나 치즈가 두껍다거나 하는 식으로 다 지적해 주실 정도"라고 말했다.
나인스 게이트에는 어니언 수프 외에도 팜코트 시절부터 이어진 또 다른 클래식 메뉴가 있다. 한우 안심 스테이크다. 충북 음성의 특별한 브랜드 한우를 사용한다. 음악을 들려주고 특별한 사료를 먹이며 방목해 키운 소로 만든 1++ 등급이다. 전 셰프는 "같은 투플 안심이지만 저희 것은 느끼한 것뿐만 아니라 고소한 맛이 있다"면서 "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하게 조리하는 것이 나인스 게이트만의 스타일"이라고 설명했다.
100년을 이어가는 법
기본을 지킨다고 해서 아무런 변화도 없이 전통만 답습하는 것은 아니다. 나인스 게이트의 어니언 수프도 전통적인 프렌치 방식에서 한 걸음 나아간 것이 특징이다. 기존에는 프랑스 정통 방식대로 비프 스톡만 사용했다.
하지만 비프 스톡만 넣으면 진한 고깃국물 특유의 느끼함이 남을 수 있다. 그래서 나인스 게이트는 몇 년 전부터 치킨 스톡을 함께 사용하기 시작했다. 나인스 게이트만의 비율로 섞어 끓인다. 그는 "요새는 좀 더 깔끔한 맛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며 "치킨을 더해서 느끼함을 줄이고 고소한 맛을 살렸다"고 설명했다.
나인스 게이트의 메뉴도 조금씩 변화하고 있다. 나인스 게이트는 현재 총 39개의 메뉴를 운영한다. 계절마다 그중 3분의 1 정도를 바꾼다. 대부분 코스 요리에 포함된 메뉴들이다. 하지만 어니언 수프, 한우 안심 스테이크처럼 오랜 시간 이어져 내려온 클래식 메뉴는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전통을 지키면서도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시도하는 것. 그것이 나인스 게이트가 100년을 이어오는 방식이다.

전 셰프는 지금도 '크리스피 삼겹살'과 같은 새로운 메뉴를 연구하고 있다. 조선호텔앤리조트가 이런 시도를 적극 지원하고 있다. 해외 리서치를 위한 출장부터 새로운 식재료 테스트까지 셰프가 자유롭게 실험하고 배울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고 있다.
전 셰프는 여전히 공부한다. MZ 세대 요리사들은 "왜"를 정확하게 설명해 줘야 납득한다. 전 셰프는 그래서 더 공부한다고 했다. 조리 원리를 제대로 알아야 팀원들을 하나로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주방장도 계속 현장에서 요리해야 한다"면서 "프라이팬을 한 번 잡는 사람보다 천 번 잡는 사람이 더 잘할 수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그렇다면 나인스 게이트는 전 셰프에게 어떤 의미일까. 그는 '나의 성장기를 함께한 친구'이자 '동반자 같은 파트너'라고 말했다. 전 셰프는 "여기에서 일하면서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고 집도 샀다"며 "나도, 이 업장도 성장하고 같이 자라는 느낌"이라고 설명했다.
전 셰프는 마지막으로 고객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했다. "제게는 회장님이든 나인스게이트에 처음 오신 손님도 똑같은 VIP입니다. 언제든 오시면 VIP처럼 대접해 드릴 테니 방문해 주시면 최선을 다해 만족하실 만한 요리를 선보이겠습니다."
정혜인 (hij@bizwatch.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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