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불·홍수에 투표소 폐쇄? "선거, 기후위험 대비해야"

곽은영 기자 2026. 4. 29. 1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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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 흔드는 물리적 위협 된 ‘기후위기’
“선거 인프라 계획에 기후위험 포함해야”
기후위기가 단순한 환경 문제를 넘어 민주주의의 근간 자체를 흔들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인공지능 생성 이미지)/뉴스펭귄

기후위기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투표'가 주목받는다. 기후대응에 관심 많은 후보나 정당에 투표해야 한다는 이른바 '기후선거'에 대한 관심이다.

하지만 최근 기후위기는 '투표 이후' 정치권이나 정부가 추진하는 정책 방향 문제에 앞서 '투표 자체'의 문제로 바뀐 사례가 많다. 세계 곳곳에서 100개 가까운 선거와 국민투표가 산불이나 폭염, 홍수와 같은 기후재난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기후위험을 선거 인프라 계획에 포함하고 비상 상황에서도 투표권을 보장할 법적 권한과 절차를 갖춰야 한다고 조언한다. 기후위기가 민주주의의 근간을 흔들 수 있다는 새로운 경향이다. 

폭염으로 선거 시스템 마비되고 인력 사망

규모가 큰 기후재난은 장소와 상황에 따라 선거를 물리적으로 방해한다. 투표소·도로·전력망을 직접적으로 파괴하거나 재난을 피해 대피한 유권자들의 투표소 방문을 어렵게 한다. 때로는 선거 일정을 늦추거나 이례적인 폭염으로 투표 장비가 오작동하는 사례도 있다. 

국제민주주의 및 선거지원연구소(International IDEA)는 22일 2006~2025년 52개국에서 최소 94건의 선거·국민투표가 자연재해로 차질을 빚었다고 분석했다. 2024년 한 해에만 18개국 23건의 선거가 영향을 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피해 사례는 매우 다양하다. 필리핀에서는 지난해 중간선거 때 폭염으로 기계가 멈췄다. 필리핀 선거관리위원회와 투표소 관계자들은 일부 개표·투표 기계가 높은 외부 기온으로 내부 열이 축적돼 오작동했고, 일부 투표소에서 재투표를 진행하는 상황이 발생했다고 보고했다. 

메트로 마닐라 퀘존시의 한 투표소에서는 과열된 기계가 이미 받아들였던 투표용지를 다시 뱉어내는 일이 벌어졌다. 투표용지 인식 오류가 발생하자 선관위는 오전 5~7시 조기투표를 진행하고 쇼핑몰 42곳을 투표소로 지정하는 방식으로 대응했다. 이는 기후위기가 디지털 선거 인프라의 안정성을 위협한 사례로 꼽힌다. 

2024년 4~6월 진행된 인도 총선은 기후위기가 선거에 끼치는 영향을 극적으로 보여준다. 당시 델리 일부 지역 온도는 52.9도까지 올랐고 우타르프라데시에서 하루에만 최소 33명의 선거 노동자가 사망했다. 로이터 등 외신은 2024년 5월 31일 비하르·우타르프라데시·오디샤 등에서 선거 업무 중이던 인력들이 열사병 의심 증세로 사망했다고 보도했다. 이에 낮 시간에는 선거운동이 중단되고 새벽과 야간에 진행됐다. 
기후재난은 선거의 시작부터 끝까지 영향을 미치는 구조적 변수가 되고 있다. (사진 클립아트코리아)/뉴스펭귄

산불로 선거 일정 바뀌고 홍수로 투표권 흔들리고

캐나다에서는 산불로 지방선거 일정이 바뀌었다. 2023년 캐나다 알버타에서는 산불로 220만 헥타르가 불타고 3만 8000명 이상이 대피했다. 노스웨스트 준주에서는 410만 헥타르가 불타 한때 인구의 최대 70%가 대피했다.

수백만 헥타르 산림이 소실되고 수만 명 대피하는 산불 재해에 알버타 선거관리기관은 대피한 유권자에게 투표 기회를 확대하고, 노스웨스트 준주는 대피 주민이 돌아올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선거 연기를 요청했다.

선거 전 홍수로 큰 혼란을 겪은 나라들도 있다.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는 2024년 지방선거 투표일을 불과 이틀 앞두고 중부와 남부 지역에서 발생한 대규모 홍수와 산사태로 일부 지역에서 투표 진행이 어려워졌다. 

선거는 치러졌지만 기관 간 소통 부족, 위기대응 역량 부족, 긴급 상황에서 선거 연기를 가능하게 하는 법적 장치 부족이 드러났다. International IDEA는 이 사건이 선거관리기구의 재난 대비와 조정 능력을 전면적으로 시험한 첫 사례였다고 평가했다. 

세네갈은 2024년 11월 조기 총선을 앞두고 세네갈강과 감비아강이 범람하면서 유권자들의 정상적인 이동이 불가능해졌다. 당시 주택과 농경지 피해로 5만 6000명 이상이 이재민이 됐고 학교와 보건시설 등 공공건물이 문을 닫았다. 단순 불편을 넘어 투표소 접근성 자체도 붕괴됐다. 이에 선거 당일 소방대가 북부 코르카디에 주민들을 배로 투표소까지 실어 나르는 방식으로 투표를 진행했다. 

모잠비크에서는 2019년 선거 전 두 개의 사이클론이 중부와 북부 지역을 강타하면서 유권자 등록과 투표 절차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다. International IDEA는 두 사이클론이 단순히 투표일 하루를 방해하는 데 그치지 않고 선거운동과 물류, 감시, 개표까지 선거 전 과정에 영향을 줬다고 밝혔다. 

"기후위험 선거 인프라 계획에 포함해야"

이처럼 최근 기후재난은 선거의 시작부터 끝까지 영향을 미치는 구조적 변수가 되고 있다.

도로와 전력, 건물 같은 물리적 인프라를 붕괴시켜 투표 자체를 불가능하게 만들거나, 폭염과 같은 기후재난은 유권자와 선거 인력의 생존까지 위협한다. 선거 연기 기준이 없거나 비상 대응 시스템 부족과 같은 제도적 공백도 수면 위로 끌어올렸다. 민주주의가 기후 안정성 위에서만 작동한다는 사실이 드러난 셈이다. 

앞으로 기후재난 빈도가 증가하고 극단적 기상 현상 강화, 도시화로 피해 규모가 확대될 것으로 전망되는 가운데 전문가들은 폭염이나 산불, 홍수 위험이 큰 시기를 피해 선거일을 조정하고, 기상청·재난대응기관·선거관리기관 등이 사전에 공동대응 계획을 세워야 한다고 조언한다. 

International IDEA는 보고서를 통해 "선거관리기관이 기후위험을 선거 인프라 계획에 포함하고 비상 상황에서도 투표권을 보장할 법적 권한과 절차를 갖춰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