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모약 성지'가 키운 창고형 약국… 시장 논리로 동네 약국 밀어낸다
자본 바탕으로 협상력 키워, 약값 내려
수익 극대화 몰두, 복약 지도 소홀 우려

27일 서울 용산구 전자랜드 신관에서 가장 목 좋은 자리인 1층 입구를 들어가자 지난 2월 문을 연 창고형 약국 메디킹덤이 손님을 맞았다. 이곳의 영업 면적은 1,178㎡으로 보통 50㎡ 안팎인 동네 약국보다 24배 컸다.
일반 약국과 규모만큼 달랐던 건 약을 파는 방식이었다. 가로 2.5m, 세로 2m의 진열대 수십 개에는 의사 처방전 없이 살 수 있는 일반의약품이 비타민, 파스, 감기약, 연고, 해열제 등 품목별로 놓여 있었다. 각 품목 진열대마다 특정 제품에는 '약사 추천'이란 팻말이 붙어 있어 눈길을 더 끌었다. 마치 화장품 가게에서 전면에 앞세우는 행사 상품 같았다.
매장 손님 50여 명은 검은색 플라스틱 장바구니를 담은 소형 카트를 밀고 다니면서 두런두런 살펴보곤 원하는 약을 채소, 라면 고르듯 선택했다. 일반의약품도 약사가 상담 데스크 너머에 있는 매대에서 찾아 주는 동네 약국보다는 대형마트와 더 닮은 모습이었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올라온 창고형 약국 게시글을 보고 이곳을 찾은 장모(27)씨는 "평소 약국에선 잘 사지 못했던 구강 균제를 두 개 샀다"며 "약사와 직접 얘기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나같은 소비자에겐 좋은 형태 같다"고 말했다.
창고형 약국이 수도권을 넘어 전국으로 확산하고 있다. 자본이 뒷받침하고 있는 창고형 약국은 다양한 상품, 저렴한 가격, 대형마트 같은 진열 방식으로 소비자를 끌어들이는 중이다. 하지만 창고형 약국이 투자금을 회수하기 위해 공격적인 영업에 나설수록 대량 구매를 부추겨 약물 오남용 문제가 심화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1호 창고형 약국 이후, 대형 약국 우르르

29일 업계에 따르면 1호 창고형 약국은 지난해 6월 경기 성남시에서 552㎡ 면적에 문을 연 메가팩토리약국이다. 공공데이터포털에서 약국 인허가 정보를 파악하니 메가팩토리약국 설립 이후 크기가 500㎡를 웃도는 약국은 지난해 8개, 올해 1~2월 10개 개설했다. 500㎡ 초과 신규 약국이 2022년과 2024년 1개, 2023년엔 0개였던 점과 비교하면 약국의 대형화 추세가 뚜렷하다.
최근 생긴 대형 약국은 창고형 약국을 표방하는 곳이 많다. 메가팩토리약국, 메가타운약국, 메가스토어약국, 메가맥스약국 등 대부분 약국 이름이 거대하다는 뜻의 영단어인 '메가(mega)'를 쓰는 공통점도 있다. 아울러 주로 병원에서 처방한 약을 조제하는 일반 약국과 달리 일반의약품 판매에 집중한다.
창고형 약국의 등장은 약국에 자본이 개입하는 신호탄으로 여겨진다. 약사 1명이 약국 1개를 개설할 수 있다는 약사법에 따라 약국은 그동안 소형 점포 위주였다. 업계는 부를 축적하거나 투자를 유치한 약사들이 창고형 약국을 주도하고 있다고 본다.
실제 메가팩토리약국은 서울 종로구 약국 거리에서 탈모약 성지로 입소문 난 온유약국이 모태다. 메가팩토리약국을 설립한 대표는 앞서 온유약국 대표를 맡았던 약사다. 메가팩토리약국은 지난 2월 현재 영업 약국 중 최대인 2,210㎡ 규모의 서울점을 열면서 점포를 넓혀가고 있다.
창고형약국이 소비자에게 통하는 이유는 무엇보다 가격이다. 약을 제약사로부터 한꺼번에 많이 사는 방식으로 원가를 낮춰 소비자 가격도 일반 약국보다 많게는 30% 내렸다. 자본을 바탕으로 한 가격 협상력이 커 가능한 일이다. 한 창고형 약국 대표는 "인공지능(AI) 도움을 받아 소비자가 약 정보를 스스로 찾고 구매하는 시대인 만큼 약국도 변해야 한다"며 "시장 논리에 따라 대량 구매로 가격이 저렴한 대신 재고 부담도 진다"고 말했다.
창고형·팩토리, 약국 이름에 못 쓴다

하지만 자본의 논리를 최우선 가치로 둔 약국 운영은 부작용이 크다는 지적도 만만치 않다. 일선 약사들은 창고형 약국이 수익 극대화에 집중할수록 본연의 역할인 복약 지도에 소홀해질 수 있다고 우려한다. 당장 창고형 약국은 환각을 경험하기 위해 약물 과다 복용에 빠진 일부 청소년 사이에서 구매 통로로 퍼지고 있다.
또 소형 약국이 대형 약국에 밀려 문 닫을 경우 동네 주민들의 의약품 접근권이 떨어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 대한약사회는 창고형 약국 인근 535개 약국 중 65.6%가 고객 감소를 겪고 있다는 설문 조사 결과를 지난 13일 내놓기도 했다. 대한약사회 관계자는 "약은 필요한 만큼 복용해야 하는데 창고형 약국에선 불필요한 약 판매가 이뤄지고 있다"고 말했다.
창고형 약국을 향한 규제는 시작 단계다. 전날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법안심사제1소위원회는 창고형 약국 표시·광고 규제 방안을 담은 약사법 개정안(남인순 더불어민주당 의원안)을 의결했다. 창고형·마트형·팩토리 등 의약품 오남용을 일으킬 우려가 있는 표현을 약국 명칭에 쓸 수 없도록 한 게 골자다.
규제 수위를 더 높여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창고형 약국에 영업시간 제한, 의무휴업일 지정 등을 적용하려는 움직임이 대표적인 예다. 이는 전통시장 등 골목상권 보호를 위해 대형마트가 받고 있는 규제들이다. 다만 창고형 약국도 개인 사업자가 운영하는 형태라 이마트, 롯데마트 등 대기업이 운영하는 대형마트와 똑같이 규제하긴 쉽지 않은 면이 있다.
글·사진= 박경담 기자 wall@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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