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이 예술이 되는 곳, 파리가 장보는 일조차 아름다운 이유
장바구니가 만드는 미학
프랑스의 재래시장, 살아 있는 아름다움
주말 아침, 재래시장에서 돌아와 장바구니에서 꺼낸 제철 농산물을 테이블 위에 늘어놓으면 마치 한 폭의 그림 같다. 보기만 해도 건강해지는 기분이 든다. 프랑스의 재래시장은 단순히 물건을 사고파는 곳을 넘어, 프랑스인들의 삶과 문화를 생생하게 느낄 수 있는 공간이다.

파리의 재래시장 진열대는 계절에 따라 다채로운 색으로 변한다. 눈으로 즐겁고 입으로도 행복해지는 곳이다. 잘 익은 토마토와 싱싱한 녹색 채소들, 햇빛을 듬뿍 받고 자란 과일들은 마치 하나의 팔레트처럼 조화롭게 펼쳐진다. 재래시장은 과장되지 않고 자연스럽지만 모든 것이 아름답다. 재래시장의 미학은 기획된 결과가 아니라 반복된 일상에서 만들어진 결과이다.

일상과 문화가 흐르는 공간
프랑스의 재래시장은 현지인의 생활과 지역 문화, 그리고 다양한 먹거리를 즐길 수 있는 곳이다. 재래시장에는 각 지방의 기후와 문화, 그리고 그들의 삶의 방식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파리의 재래시장에서는 오랜 역사와 다채로운 문화가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파리 17구의 바티뇰(Batignolles) 시장과 6구의 라스파이(Raspail) 시장은 파리뿐만 아니라 프랑스에서도 손꼽히는 큰 유기농 전문 시장으로, 약 150개의 매대가 토요일에는 바티뇰에서, 일요일에는 라스파이로 이동하여 장이 열린다. 가족 단위의 파리지앵들과 세계 각지에서 온 관광객들이 함께 시장을 가득 메운다. 운이 좋으면 장을 보는 유명인과도 마주칠 수 있다.

가론강을 따라 길게 펼쳐지는 보르도 샤르트롱(Chartrons) 부두 야외 시장은 강변을 따라 걷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지는 곳이다. 잔잔히 흐르는 가론강과 그 뒤로 보이는 샤방 델마스 다리가 어우러져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은 장면을 만들어낸다. 이곳에서는 장바구니를 채우는 재미도 있지만, 아르카숑 분지에서 온 신선한 굴을 맛보며 가족, 친구들과 함께 여유로운 주말을 즐길 수 있다.
프랑스 남부로 내려갈수록 프로방스의 색채와 지중해의 공기가 더욱 선명하게 느껴진다. ‘마농의 샘’ 등 프로방스 지방을 배경으로 한 작품으로 유명한 작가이자 영화 제작자인 마르셀 파뇰(Marcel Pagnol)은 그의 작품 속에서 시장과 카페를 서로 교류하고 갈등을 해소하는 삶의 공간으로 잘 표현하고 있다.

시장에서 가장 중요한 건 결국 ‘사람’이다. 상인과 손님은 단순히 물건을 사고파는 관계를 넘어, 치즈가 숙성되기까지의 시간과 정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지난주에 사 갔던 지방 특산물에 대해 대화한다. 그리고 오랜만에 만난 지인들과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꽃을 피운다.
재래시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말 많은 프랑스인들 간의 대화는 결코 단순한 거래와 흥정을 위한 것이 아니다. 그들의 말투와 손짓, 그리고 눈빛 속에는 서로의 취향을 이해하고 신뢰를 쌓아가는 과정이 담겨 있다. 재래시장은 사람과 사람이 이어지는 하나의 ‘만남의 장소’이다.
서두르지 않고 잠시 멈추고는, 매대 앞에서 차례를 기다리는 사람은 신경도 쓰지 않고 상인과 고객은 장보기와는 아무 상관 없는 대화를 계속 이어간다. 시장 옆 카페에서 한 잔의 에스프레소나 와인을 마시고, 향기로운 꽃다발로 장바구니를 채우며 장보기를 마무리한다. 이러한 슬로우 라이프는 프랑스인들만의 시간을 소비하는 특별한 방식이기도 하다.
파리에서 가장 오래된 시장, 앙팡 루즈
파리 마레 지구를 걷다 보면, 유독 사람들이 붐비는 곳이 있다. 바로 앙팡 루즈 시장(Marché des Enfants Rouges)이다. 패션 매장, 박물관, 갤러리가 모여 있는 트렌디한 마레에 자리한 이 시장은 날씨 좋은 점심시간이 되면 완전히 다른 분위기로 변한다. 근처 직장인들부터 세련된 옷차림의 패션 피플, 그리고 호기심 가득 찬 눈으로 둘러보는 관광객들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이곳으로 모여든다.

앙팡 루즈 시장에는 유기농 야채, 생선, 치즈, 꽃 등 농수산품 매대뿐만 아니라 여러 나라 음식을 맛볼 수 있는 간이식당들이 즐비하다. 모로코 식당에서는 쿠스쿠스를, 이탈리아 식당에서는 파스타와 피자를 즐길 수 있다. 그러나 가장 인기 있는 메뉴는 일본 식당 ‘타에코의 집(Chez Taeko)’의 도시락이다. 앙팡 루즈 시장에서는 장을 보기도 좋지만 무엇보다도 식사나 차를 즐기며 여유롭게 앉아 현지 분위기를 만끽할 수 있다.

1615년에 설립된 앙팡 루즈 시장은 파리에서 가장 오래된 실내 재래시장일 뿐만 아니라 역사적 의미도 크다. ‘앙팡 루즈’는 빨간 옷을 입은 아이들이라는 뜻이다. 이곳은 1536년에 지어진 병원으로 불쌍한 고아 아이들을 거두었고, 그곳의 아이들이 빨간색 옷을 입었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파리 시장 풍경의 대표 화가 빅토르 질베르(Victor Gibert, 1847~1933)는 1870년대 후반 자연 주의적인 시선으로 파리의 거리, 카페, 시장의 풍경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가 그린 앙팡 루즈 시장에서는 그 당시의 시장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 낡은 시장은 한때 주차장으로 바뀔 위기에 놓이기도 했다. 그러나 상인들과 인근 주민들이 힘을 모아 밤새 시장을 지키며 적극적으로 반대한 덕분에 시장은 사라지지 않았다. 이후 약 6년에 걸친 보수 공사가 진행되고, 전통 재래시장의 형태를 유지하려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2000년대에 들어 빈 점포가 점점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 자리를 반찬 가게와 다양한 식당들이 채우게 되었고, 국제 패션 쇼룸들이 마레 지역에 자리하면서 시장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다. 결국 재래시장과 세계 각국의 음식, 그리고 패셔니스타들이 어우러진 독특한 공간으로 자리 잡으며, 2024년에는 ‘Food & Wine Awards’에서 세계 12대 시장 중 8위에 선정되었다.
파리 재래시장을 그린 화가, 빅토르 질베르
질베르의 대표적인 소재는 파리 중심에 위치했던 ‘레알 시장(Les Halles)’ 풍경이다. 분주하게 움직이는 상인들, 생선과 고기가 오가는 생생한 장면들, 그리고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표정까지 그는 도시의 일상을 사실적으로 담아냈다.

질베르의 그림은 단순한 풍경 묘사를 넘어선다. 수레에 쌓여 있는 야채 더미, 정육점에 매달려 있는 고기, 분주한 노동자들의 모습 속에는 당시 사람들의 삶의 무게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오늘날 질베르는 벨 에포크 시대 파리의 삶을 가장 생생하게 기록한 화가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그의 그림 속에는 화려함보다는 현실을, 이상보다는 삶의 온기를 느낄 수 있다. 질베르의 시장 풍경이 담긴 작품을 보면 우리에게 그 시대의 공기와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대로 전해주는 것 같다.

파리=정연아 패션&라이프스타일 컨설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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