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원리의 숨은 기원, 광해군의 기착지 '어등포'
제주의 진가는 멋진 관광지에만 있지 않다. 중산간부터 바닷가까지 긴 세월에 걸쳐 주민들이 뿌리 내리며 살고 있는 곳, 바로 마을에서 더욱 멋진 제주를 만날 수 있다. 심규호 중국학회회장이 신발 끈을 질끈 묶고 제주 마을로 향한다. 심규호 회장이 들려주는 흥미로운 마을 이야기를 [제주의소리]를 통해 만나보자. [편집자 주]
연대봉에서 바라본 행원리

어등포
행원리의 원래 이름은 어등개, 즉 어등포이다. 어등은 한자로 於等, 또는 魚登으로 쓴다. 문헌에 처음으로 등장한 것은 1530년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인데, 여기에는 어등포於等浦로 나온다. 1637년 광해군이 유배되어 제주에 도착했을 때도 於等浦였다. 그러던 것이 1653년 탐라지에는 물고기가 올라온다는 뜻의 魚登浦로 처음 쓰였다. 이후 1702년 『한라장촉』에 於等浦로 쓴 것 외에 대부분의 문헌에서 魚登浦로 적기 시작했다. 현재의 이름인 행원리는 1899년에 출간된 『제주군읍지』에 처음 나온다.
행원杏源의 한자는 살구나무 행杏과 물이 샘솟는 근원이란 뜻의 원源인데, 행원리에는 살구나무가 거의 없다. 살구나무는 토질이 화강암이나 현무암계의 비옥한 토질에서 주로 자라는 온대 식물이기 때문에 제주도에 없는 것은 아니나 북서계절풍이 거센 행원리에는 그리 잘 자라지 않는다. 행원리에는 사방조림砂防造林을 위해 해송을 많이 심었다. 그렇다면 왜 행원이라고 했을까? 필자의 가설을 이야기하자면 이러하다.
보명학사普明學舍
보명학사는 1909년 행원리 마을 향사에 세워진 개량서당이다. 하늘천 따지를 배우는 전통 서당이 아니라 현대 학문을 배우는 서당이란 뜻이다. 물론 이전 행원리에도 한문서당이 자리하고 있었다. 일설에는 1890년대에 김녕에서 행원으로 이주한 강인권이란 훈장이 가르치던 서당이 있었고, 알동네에는 홍종필 훈장이 가르치던 아진서당이 있었다. 1908년 행원리 출신 이원화 훈장이 2년제 학교를 운영하다 이듬해인 1909년 보명학사를 세웠다. 그리고 이웃 월정리에는 1921년 영신永信학사가 세워졌다. 이처럼 여러 학사들을 모아 마을주민들이 1924년에 세운 학교가 바로 사립중앙보통학교이다. 학교는 월정리에 위치하고 있지만 월정리와 행원리 여러 학사가 합쳐진 것이기 때문에 중앙이란 말을 쓰지 않았나싶다. 행원이란 마을 이름 이야기를 하다 갑자기 보명학사를 끄집어낸 것은 이것이 행원리라는 마을이름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론 가설이지만.
행원과 행단杏壇
어등포라는 마을이름을 개칭하자는 이야기가 나왔다면, 아마도 당시 한문에 조예가 있던 훈장들의 입김이 세지 않았을까싶다. 행원의 행은 살구나무 또는 은행나무 행이다. 예컨대, 행화촌杏花村은 살구꽃이 많이 피는 마을 또는 술파는 곳을 이르는 말이다. 남송시대 사람 소동파의 7언 고시 「달밤에 손님과 살구꽃 아래에서 술을 마시며(月夜與客飮杏花下)」는 시가 유명하다. 그런데 살구나무가 아니라 은행나무 행으로 쓰면 행단杏壇이란 말이 생각난다. 학문을 배우고 익히는 곳이란 뜻인데, 공자가 은행나무 단 위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는 『장자』의 우언에서 유래한다. 공자가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때로 거문고를 탔다고 해서 '행단고슬杏壇鼓瑟'이라는 성어도 생겼으며, 지금도 공자를 모시는 산둥성 곡부 대성전大成殿 앞에 행단이라 쓴 편액이 붙은 건물을 세워놓기도 했다.

연대와 봉수가 없는 군사 요충지
김상헌은 『남사록』에서 제주 동쪽으로 병선을 정박할 수 있는 곳은 별도포, 소홀포(삼양1동), 조천포, 함덕포, 북포, 김녕포, 무주포, 어등포, 좌가마포(한동), 감동포(하도) 등이라고 적었다. 이렇듯 어등포는 제주의 대표적인 8곳 水戰所 가운데 하나였다. 천혜의 포구로 전선을 정박할 수 있는 군사요충지였던 것이다. 그런데 어등포에는 높은 곳이 없어서 우도까지 관찰할 수 없다. 왜구는 주로 동쪽에서 들어오니 동쪽 바다를 볼 수 없다면 낭패 아닌가? 그런 까닭에 왼쪽 월정리에는 무주연대, 오른쪽 한동리에는 좌가연대佐哥煙臺와 왕가봉수往可烽燧가 있으나 유독 어등포에는 없다. 대신 포구만은 유명했다. 그 까닭 가운데 하나는 그곳이 광해군이 들어온 포구였기 때문이다.
어등포와 광해군
육지에서 들어올 때 조천으로 들어오는 것이 일반적인데, 광해군은 어쩌다 어등포로 들어왔는가? 북서풍이 유달리 센 날인지라 어쩔 수 없이 동쪽 포구에 닻을 내렸을 수도 있고, 조선조 최초의 군주 유배인지라 아무도 모르게 들어오려고 그리했을 수도 있다. 여하간 광해군은 인조반정으로 왕위에서 물러난 후 강화도로 유배되었다가 1637년 제주도로 이배되었다. 광해군은 제주에 오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고 한다. 어등포에 내렸을 때 그의 절망감이 어떠했을지 알 수 없다. 그는 현재 제주시 중앙로의 예전 제민신협 본점 자리에 적소가 정해졌다. 지금 그 자리에 「광해군 적소 터」라는 비석이 세워졌으며, 행원리에는 기착지를 알리는 표지석이 자리하고 있다. 그는 유배된 지 4년4개월 만에 향년 66세로 삶을 마감했다.
혹자는 임금(광해)이 상륙한 곳이 어등포이기 때문에 어등御登이라고 쓰기도 한다. 하지만 이미 이전에 어등포란 이름이 있었으니 합당치 않다. 다만 어등御登이란 지명은 다른 지역에서도 발견된다. 예를 들어 경기도 양주시 칠봉산은 가을단풍이 비단처럼 아름답다고 하여 금병산錦屛山이라고 부르는데, 세조가 왕위를 찬탈하고 많은 신하들을 참살한 것을 후회하면서 여러 사찰을 돌아다니다가(또는 수렵을 위해) 칠봉산에 올랐기 때문에 어등산御登山(또는 於登山)으로 불렀다고 한다.
광해군과 제주
조선의 제15대 왕인 광해는 제주로 유배되기 전에도 제주와 특별한 인연을 가진 임금이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했을 때 아버지인 선조가 한양을 버리고 도망칠 당시 그는 분조分朝의 수장으로 전장을 누볐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보다 전쟁에 사용되는 말, 즉 전마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다. 정유재란이 끝나고 황폐해진 1600년 제주 사람 김만일金萬鎰(1550∼1632년)이 자신이 기른 말 500필을 조정에 헌납하고, 이후에도 계속해서 수천 필의 말을 조정에 보냈다. 이에 당시 임금 광해는 김만일을 오위도총부의 정2품 벼슬인 도총관에 임명했다. 도총관은 조선의 중앙군사조직인 오위五衛의 군사업무를 총괄하는 군령기관인 오위도총부의 최고 책임자이다. 병조판서와 같은 품계로 일반적으로 종친이나 부마, 삼공에게 내리는 직책이다. 당시 제주목사가 정3품이니 제주에서 가장 높은 품계를 지닌 사람이 된 셈이다. 사헌부에서 그냥 말 값으로 금백이나 미포를 주면 되었지, 왜 벼슬을 내리냐고 반발할 만도 했다. 하지만 광해는 무시했다. 그리고 김만일을 '헌마공신'이라고 칭했다.
광해와 정온
광해군이 제주로 유배되기 전 광해에 의해 제주로 유배된 이가 있었다. 간옹艮翁 이익李瀷(1618년 유배), 성구聖求 송상인宋象仁(1612년 유배), 동계桐溪 정온鄭蘊이다. 성구와 동계는 1569년 같은 해에 태어났고, 간옹 이익은 그들보다 열 살이 어렸다. 그들은 모두 광해 시절에 제주로 유배되어 서로 시문으로 화답하고 교유하면서 힘든 시절을 견뎌냈다.
동계 정온(1569~1641년)은 광해, 인조 시절의 문신이다. 조식의 수제자로 경상남도 남명학파를 대표하는 유학자이자 의병장이었던 내암來庵 정인홍鄭仁弘(1535~1623년)에게 배웠다. 남명학파의 전통을 '의義'를 중시하고 기절氣節을 강조하여 실천적 선비정신을 지닌 인물이다. 광해군이 영창대군을 강화도로 유배시켰는데, 강화부사인 정항에 의해 피살되자 정온이 정항을 처벌하고 대군의 위호를 복위할 것을 주장하는 「갑인봉사」를 올리고, 선조의 왕후였던 인목대비를 폐하려고 하자 폐모의 부당성을 강력히 주장했다. 결국 46세 되던 해에 제주에 폄적되어 위리안치로 10년간 유배생활을 했다. 1614년 해남에서 배를 타고 같은 해 8월 별도포에 도착한 후 대정의 유배지에 도착했는데 대정 객사의 동문 안에 있는 민가였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유배에서 풀려나 상경했다. 사람이 어찌나 강직했는지, 1627년(인조 5)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조선과 명나라의 의리를 앞할 수 없다고 하여 자결을 기도했으나 미수에 그치고 임금에게 결별의 소를 올린 다음 덕유산에 들어가 은거했다. 1641년 6월 정온이 삶을 마감했다. 그리고 7월에 광해가 제주에서 유명을 달리했다. 제주에서 광해는 자신이 유배 보낸 세 명을 기억했을까?

심규호
한국외국어대학교 중국어과 졸업, 동대학원 중문학 박사. 제주국제대 교수, 중국학연구회, 중국문학이론학회 회장 역임. 현 제주중국학회 회장, 별꼴학교 이사장.
저서로 '육조삼가 창작론 연구', '도표와 사진으로 보는 중국사', '한자로 세상읽기', '부운재'(수필집) 등이 있으며, 역서로 '중국사상사', '중국문학비평소사', '마오쩌둥 평전', '덩샤오핑과 그의 시대', '개구리', '중국사강요', '완적집', '낙타샹즈' 등 70여 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