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 빼고 다 통해” 美 의회 사로잡은 찰스 3세 ‘영국식 유머’

워싱턴/박국희 특파원 2026. 4. 29. 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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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일(현지 시각) 미국 워싱턴 D.C. 연방의회 의사당에서 찰스 3세 국왕이 상하원 합동 연설을 하고 있다./AFP 연합뉴스

찰스 3세 영국 국왕이 28일 워싱턴DC 연방의회 의사당에서 열린 상·하원 합동 연설에서 고도의 외교적 수사가 곁들여진 특유의 ‘영국식 유머’를 선보이며 미 의원들의 초당적인 환대와 큰 웃음을 끌어냈다. 현지 언론들은 “미 대통령의 국정 연설 때 당파적 기립 박수와 다른 근래 보기 드문 초당적 분위기였다”고 평가하며 국왕의 연설이 성공적이었다고 보도했다.

이날 찰스 3세는 영국의 극작가 오스카 와일드의 유명한 경구를 인용해 “우리는 요즘 미국과 정말 모든 것을 공유하고 있다. 물론 언어만 빼고 말이다”라는 농담을 던지며 다소 경직될 수 있는 의회 연설의 포문을 부드럽게 열었다. 두 나라가 똑같이 영어를 쓰는데도 언어를 공유하지 않는다고 한 것은, 양국 영어가 발음이나 억양은 물론 일상 어휘와 철자법까지 확연히 달라 종종 의사소통에 오해가 생기는 현실을 꼬집은 대목이다. 이른바 ‘공통의 언어로 나뉜 두 나라’라는 영미권 특유의 자조 섞인 언어 유희를 재치 있게 활용한 농담에 의원들은 웃음으로 화답했다.

이어 가장 큰 호응을 얻어낸 대목은 양국 의회의 문화적 차이를 유쾌하게 짚어낸 ‘인질’ 농담이었다. 영국은 매년 의회 개회식 때 국왕이 의사당을 방문하는 동안 하원의원 1명을 버킹엄 궁전에 억류해 두는 수백 년 된 독특한 전통이 있다. 이는 17세기 찰스 1세가 의회와의 권력 투쟁 끝에 참수당했던 역사적 배경에서 비롯된 것으로, 영국 군주들이 적대적일 수 있는 의회에 방문했다가 무사히 귀환하는 것을 보장받기 위한 일종의 안전 담보다. 현대에 들어서는 순전히 상징적이고 의전적인 행사로 남아, 인질로 지정된 의원은 궁전 안에서 융숭한 대접을 받으며 대기한다. 찰스 3세는 이를 언급하며 “요즘 우리는 우리의 ‘손님’을 꽤 잘 돌본다. 그들이 종종 떠나고 싶어 하지 않을 정도로 말이다. 의장님, 오늘 이곳에 그 역할을 자원할 분들이 있었는지는 모르겠다”고 말해 좌중을 폭소케 했다.

찰스 3세 영국 국왕이 28일 미 의회 합동 연설을 마친 뒤 손을 흔들고 있다. /AFP 연합뉴스

영국과 미국의 독립 전쟁에 관한 능청스러운 농담도 이어졌다. 그는 자신의 이번 국빈 방문이 미국의 독립을 좌절시키기 위한 “교활한 후위 작전의 일부가 아니니 안심하라”고 말해 의원들을 즐겁게 했다. 이어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이 1776년 독립을 선언한 지 “불과 250년 됐다”는 점을 강조하며 “영국에서 우리가 말하듯이, 바로 엊그제다”라고 덧붙여 연설 중 가장 큰 웃음을 유발했다.

유머로 좌중을 무장해제 시킨 찰스 3세의 연설에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정책 기조를 향한 우회적인 견제구도 담겨 있었다. 트럼프가 연일 ‘안보 무임승차’를 이유로 탈퇴 주장을 반복하고 있는 나토(NATO·북대서양조약기구)를 중심으로 한 서방 동맹의 가치를 역설하며 “우리의 관계는 필수 불가결한 파트너십”이라고 강조했다. 특히 “9·11 테러 직후 나토가 미국에 대해 처음으로 집단 방위 조항을 발동했다”고 상기하며, 그와 같은 굳은 결의가 지금 우크라이나를 방어하는 데도 필요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찰스 3세는 미 연방대법원이 역대 판례에서 영국의 마그나 카르타(대헌장)를 160차례 이상 인용한 점을 짚으며 “무엇보다 행정권이 견제와 균형의 대상이라는 원칙의 기초”라고 설명했다. 이때 민주당 의원들은 찰스 3세의 발언이 끝나기도 전에 기립 박수를 이어나갔다. 또한 “점점 더 내향적으로 되자는 촉구를 우리가 외면하기를 진실한 마음으로 기도한다”며 신고립주의 외교 노선을 지적했고, “우리 세대는 중대한 자연 시스템 붕괴에 어떻게 대응할지 결정해야 한다”며 화석 연료를 장려하는 트럼프의 에너지 정책에 대해서도 소신 발언을 이어갔다.

반면, 이번 방미 기간 중 면담 요청이 있었던 미성년자 성 착취범 제프리 엡스타인 스캔들 생존자 문제에 대해서는 직접적인 언급을 회피했다. 동생 앤드루 왕자가 직접 연루된 사안인 만큼, 국왕이 영국 법률 체계의 상징적 수장으로서 수사에 편견을 줄 수 있는 발언을 삼가야 하는 헌법적 제약 때문으로 분석된다. 다만 왕실 측은 “오늘날 우리 두 사회에 너무도 비극적으로 존재하는 일부 병폐의 피해자들을 지원해야 한다”는 표현을 통해 학대 생존자들을 우회적으로 위로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28일(현지시각) 미국 국빈 방문 중인 찰스 3세 영국 국왕이 미국 워싱턴 DC 연방 의회 의사당에서 상·하원 합동 회의 연설 전 미 의원들과 악수를 나눴다. 이후 찰스 국왕과 카밀라 왕비는 백악관 사우스 포티코의 발코니에서 열린 환영 열병식을 관람했다. /X, 백악관

이번 찰스 3세의 미국 국빈 방문은 찰스 3세가 2022년 즉위한 이후 부부가 함께한 첫 방문이다. 고(故)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제럴드 포드 대통령 때인 1976년 미국 독립 200주년을 축하하기 위해 방문한 것에 이어, 이번에는 아들이 미국 독립 250주년을 축하하기 위해 국빈 방문을 한 셈이다. 영국 군주의 미 상·하원 합동 연설 역시 1991년 걸프전 승리와 냉전 종식을 기념해 단상에 올랐던 엘리자베스 2세 여왕 이후 역사상 두 번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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