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녀 누구의 것도 아닌 코에드 패션 트렌드
옷은 그저 옷일 뿐, 남녀 구분이 꼭 필요할까. 이번 시즌 패션
하우스들은 이 질문에 저마다의 방식으로 흥미로운 답을 내놓으며 코에드(coed·남녀공학) 패션을 선보이고 있다.

넉넉한 스트라이프 셔츠에 드로스트링 팬츠, 푹신한 슬리퍼….
갓 잠에서 깨어난 듯한 침실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잠옷 차림 그대로 런웨이에 올라온 듯한 이번 시즌 돌체앤가바나의 남성 컬렉션은 '노 패션(no fashion)’을 선언하고 나섰다. 런웨이를 가득 메운 파자마 행렬은 시대의 불확실성과 끊임없이 변화하는 트렌드, 그리고 쉴 새 없는 잡음으로 가득한 패션계에서 한 걸음 비켜나 과거로 회귀하고자 하는 의지를 담고 있다. 꽃을 수놓고 파이핑으로 마감한 여성스러운 파스텔 컬러 파자마는 할머니 옷장에서 막 꺼낸 듯한 익숙한 정서를 불러낸다. 남성복 쇼가 끝난 뒤 여성 고객들이 파자마를 주문하기 위해 몰려들었다는 뒷이야기도 이 흐름을 방증한다. 여성 컬렉션에서도 같은 기조가 이어졌다. 다른 점이 있다면, 더블브레스트 슈트나 핀 스트라이프 재킷 같은 남성적인 테일러링과 조합해 마치 파자마가 슈트 위에 불시착한 듯한 깊은 인상을 남겼다는 것. 성별은 물론이거니와 실내복과 외출복, 정돈됨과 흐트러짐의 경계를 흐리며 남녀 모두의 환호를 이끌어낸 돌체앤가바나의 쇼는 잠에서 덜 깬 듯한 파자마 차림이었다. 하지만 오히려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듯한 아이러니를 남겼다.

프라다의 컬렉션은 전혀 어수선하지 않다. 쓸모없는 것을 만들기 위해 쓸모없는 일을 하는 데에 반기를 든, 아주 단순한 방식으로 전개됐다. 런웨이에는 단조로운 콘크리트 기둥과 바닥 외에 아무런 장식도 두지 않았다. 모두의 예상을 깨고 여성복 컬렉션의 오프닝을 장식한 건 다름 아닌 실용적인 점프슈트였다. 군복으로 오해할 법한 딱딱한 분위기는 드롭 이어링, 팔꿈치까지 오는 오페라 장갑, 하이힐 같은 액세서리로 가볍게 깨졌다. 러프한 실루엣의 브라와 스커트 셋업에 단정한 테일러드 재킷을 입는 식의 살짝 어긋난 조합마저 재치 있게 느껴진다. 그런가 하면 남성복에서는 고무줄 밑단의 블루머 쇼츠가 처음 등장해 놀라움을 안겼다. 이제는 완전히 자리를 잡은 미우미우의 비즈 장식 브리프처럼 또 하나의 상징적인 아이템이 탄생한 순간이다. 이 외에도 타이트한 니트 스웨터에 쇼츠를 매치하는 등 남성의 보디라인을 보다 관능적으로 드러내며 실루엣을 재정의했다. 이런 과감한 움직임은 결국 코에드라는 한 단어로 귀결된다. 남성과 여성을 자유로이 오가는 프라다의 행보가 지금 패션계의 새로운 기준이 되고 있다.

어디에도 속하지 않고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사람들이 있다. JW앤더슨을 이끄는 조나단 앤더슨이 그렇다. 그는 초창기부터 하우스 유산에 위트와 실험을 더하며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이를 의도적으로 뒤섞어왔다. 디올의 오트쿠튀르와 여성·남성 컬렉션을 모두 총괄하는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임명된 뒤 처음 선보인 2026년 컬렉션 역시 같은 흐름에서 출발한다. 그는 쇼 노트에서 "하우스의 역사를 이해하면서도 앞으로 나아갈 길을 만들어야 한다"고 밝히며 디올의 유산을 새로운 감각으로 재배열했다. 흥미로운 사실은 여성복과 남성복이 서로 영감을 주고받으며 연결된다는 점이다. 디올의 유산인 트위드재킷은 스커트처럼 보이는 거대한 볼륨의 카고 쇼츠와 짝을 이뤄 남성복에 등장했고, 맥시 길이의 판초 역시 컬러만 달리해 남녀 컬렉션에 올랐다. 더없이 여성스러운 프린지 장식 베스트도 성별을 가르지 않았다. 또한 여성 모델에게는 클래식한 남성 셔츠와 루스한 팬츠가 주어졌고, 넥타이의 시초라 불리는 크라바트 장식이 더해지기도 했다. 이제 와서 누가 누구의 옷을 빌려 입었는지를 따지는 건 옳지 않다. 성별의 간극을 메우며 어느 누구도 아닌 제3의 성정체성을 따르는 앤더슨이야말로 코에드 정신을 잇는 선구자일 테니까.

마틴로즈가 쇼를 선보이기도 전부터 화두에 오르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그가 매번 컬렉션 무대로 택한 베뉴(venue)는 마치 영화의 예고편처럼 분명한 메시지를 품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영국 런던의 한 고용센터로 관객들을 불러들였다. 숨 막힐 듯 하얀 커튼으로 둘러싸인 이번 시즌 런웨이 무대는 서브컬처의 근간을 이루던 거리의 노동자들과 노점상들에게 바치는 헌사다. 틀에 박힌 권위에 도전하고 비주류의 언어를 끌어올리는 마틴로즈 특유의 미학은 여전히 유효했다.
옷이 서로 뒤바뀐 듯한 여성과 남성 모델들의 대비는 쇼를 지켜보는 또 하나의 하이라이트다. 여성들은 몸을 조이던 타이트한 실루엣에서 벗어나 트레킹 조끼나 윈드브레이커 같은 남성복의 익숙한 코드를 새롭게 변주했고, 남성들은 이와는 반대로 레이스가 더해진 러플 스커트와 무릎까지 올라오는 니 삭스에 클래식 슈즈를 더하는 등 도발적인 장난을 걸어왔다. 젠더리스가 자연스러운 흐름이 된 지금, 현대적인 섹시함에 새로운 해석을 제시한 마틴로즈. 어떤 고정관념에도 얽매이지 않던 젊은이들의 만남 장소를 복기한 이 공간 안에서 그 시절의 열광적이고 강렬한 에너지가 되살아났다.

마이클 라이더가 진두지휘한 셀린의 2026 S/S 컬렉션을 두고 평론가들은 하우스의 과거와 현재를 가장 자연스럽게 이어낸 쇼라 호평했다. 대부분의 디자이너가 수장 자리에 오르면 이전의 흔적을 지우는 데 집중하는 반면, 라이더는 피비파일로와 에디슬리먼 시절의 풍부한 유산을 계승하는 영민한 태도를 취했다. 런웨이는 베이식 셔츠와 테일러드 재킷, 가죽점퍼처럼 셀린을 대표하는 클래식 아이템으로 채워졌다. 모델들은 성별이나 연령, 체형에 구애받지 않고 자신에게 어울리는 옷을 자유롭게 골라 입은 듯한 인상을 남겼다. 셔츠 칼라나 소매 한쪽을 삐죽 튀어나오게 한 고의적인 연출은 완벽한 룩에 미세한 균열을 일으키며 긴장감을 더한다. 초창기 셀린을 상징하던 기마풍 패턴의 실크 스카프까지 등장했다. 한쪽 어깨를 감아 늘어뜨리고 셔츠 대용으로 입거나 스커트 위에 두르는 등의 자유로운 연출로 스카프의 역할을 옷의 영역으로까지 확장했다. 자신만의 속도로 하우스의 지난 궤적을 따라 걸으며 새 흐름을 만들어가는 마이클 라이더. 남녀 모두가 오래도록 입을 수 있는 옷을 만들고 싶다는 그의 순수한 열정은 경쟁이 난무하는 패션계에 잔잔한 울림을 남긴다.

베르사체가 처음으로 가문 밖 디자이너에게 키를 맡겼다. 다리오 비탈레는 그 변화의 출발점에 선 인물이다. 이번 시즌 그는 남성복과 여성복을 나누기보다 하나의 흐름 안에서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무대를 택했다. 젊은 디자이너들이 그러하듯 성별 코드를 지우고 보다 자유로운 표현 방식으로 나아간 그의 시도는 큰 호평을 받았다. 특히 1980년대 후반 지아니 베르사체 특유의 미학을 동시대적 감각으로 재해석하며 뚜렷한 개성을 드러냈다. 여성복은 넉넉한 핏의 슈트와 팬츠, 블루종을 중심으로 보다 남성적인 방향으로 나아갔고, 남성복은 오히려 기존의 틀을 벗어나며 신선한 인상을 남겼다. 옆면이 깊게 파인 민소매 톱에 하이웨이스트 진 팬츠를 매치하거나, 화려한 프린트 셔츠에 쇼츠를 착용해 노출을 강조하는 방식이다. 성별을 넘어 런웨이에 다양한 세대의 모델을 올린 점 역시 인상적이다. 베르사체를 품고 날아오를 준비를 마친 비탈레는 프라다가 베르사체를 인수하면서 한 시즌 만에 수장 자리에서 물러나게 됐다. 이 쇼가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줄 누가 알았을까. 다음 행선지가 어디가 될지 모르겠으나, 베르사체와의 짧고 강렬한 만남은 패션계와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또 하나의 전환점으로 남을 것이다.
#코에드패션 #디올 #여성동아
기획 강현숙 기자 사진 게티이미지 사진제공 마틴로즈 베르사체
안미은 프리랜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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