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셀 항소심] “중대재해처벌법 적개심 드러낸 판결”

이재 기자 2026. 4. 29. 0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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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상구 각층 설치 의무” 부순 ‘명확성의 원칙’? … 스토킹 수준 ‘합의’를 양형 반영한 재판부
▲ 아리셀 유족과 법률 대리인 그리고 시민단체 활동가 등이 28일 오후 민주노총에서 아리셀 항소심 판결문을 찢고 있다.

'위험물질을 취급해도 각 층에 비상구를 설치하고 비상통로를 유지할 의무는 없다.'

상식적으로 쉬이 납득하기 어려운, 형용모순에 가까운 이 명제는 적어도 노동자 23명이 사망하고 9명이 다친 아리셀 참사 항소심 재판부(수원고법 형사1부 부장판사 신현일)에게는 참이다. 그렇게 판결했다. 아리셀 참사로 딸, 아들, 남편, 동생을 잃은 유족은 차마 이해하기를 포기하고 2심 판결문을 찢었다.

아리셀 중대재해참사 대책위원회와 아리셀 산재피해가족협의회는 28일 오후 민주노총 교육장에서 기자간담회를 열고 2심 재판부의 판결을 조목조목 비판했다. 피해자 법률대리인인 신하나 변호사(법무법인 덕수)는 "중대재해 처벌 등에 관한 법률(중대재해처벌법)에 대한 적개심을 드러낸 판결"이라고 지적했다.

'각 층'이라 표현하지 않았으니 설치 의무 없다?

이날 기자간담회에서 변호사들은 상식을 법리로 해석해야 하는 상황에 곤란을 겪었다고 했다. 손익찬 변호사(공동법률사무소 법과사람)는 "비상구를 층마다 설치하는 것은 상식인 것 같은데 1층에는 설치해야 하지만 2층 설치가 의무인지 여부가 쟁점이 됐다"며 "산업안전보건기준에 관한 규칙(안전보건규칙)은 위험물질 취급 작업장과 작업장이 있는 건축물에 비상구를 1개 이상 설치하도록 하는데, 2심은 명문의 형벌법규를 피고인에게 불리하게 확장해석, 유추해석하면 안 된다고 판시했다"고 설명했다.

안전보건규칙 17조는 사업주에게 리튬 같은 위험물질을 제조·취급하는 작업장과 그 작업장이 있는 건축물에 출입구 외 비상구를 1개 이상 설치하도록 한다. 2024년 6월24일 아리셀에서 리튬전지 발열로 인한 화재·폭발이 발생한 곳은 공장 3동 건물 2층이다. 1심은 해당 조항을 해석하면서 각층에 비상구를 설치할 의무가 있는 것으로 봤다. 그러나 2심은 리튬전지를 적재한 공간으로, 위험물질 취급 작업장이 아니라 작업장이 있는 건축물의 한 층으로 해석했다. 작업장이 아니니 별도 비상구를 마련할 의무가 없고, 작업장이 있는 건축물로 보면 1층에 비상구가 있으므로 각층에 비상구 설치 의무를 '명확히' 하지 않은 이상 비상구 설치 의무를 지웠다고 볼 수 없다고 했다. 이른바 명확성의 원칙이다. 손 변호사는 "헌법재판소는 형벌법규라고 해도 모든 구속 요건을 서술적으로 구성할 게 아니라 통상해석으로 금지를 알 수 있으면 명확성의 원칙 위반이 아니라고 봤다"며 "비상구 의미를 해석할 수 있다면 각 층이라 규정하지 않아도 그렇게 해석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게 상식이지 않느냐"고 덧붙였다.

리튬전지, 법률상 위험물질 아니라는 법원

이런 어처구니없는 해석은 리튬과 리튬전지의 차이에서 발생했다. 시민에게는 리튬이나 리튬전지나 똑같이 위험하지만, 재판부는 공소과정에서 검찰이 "위험물질인 리튬이 포함된 리튬 1차전지"라고 표현한 데 주목했다. 안전보건규칙상 리튬은 위험물질이지만 리튬 1차전지는 위험물질에 해당하지는 않는다고 봤다. 1심과 2심 모두 그랬다. 피해자 변호인들은 위험물질임을 명확히 반영해 달라고 검찰에 요구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피해자 변호인들은 또 2심 재판부가 산업안전보건법과 관련한 리딩케이스인 삼성중공업 거제조선소 판결을 간과했거나 무시했다고 지적했다. 해당 판결은 2개의 크레인이 충돌해 6명이 사망한 사고에 관한 것이다. 당시 2심은 일정한 신호방법을 정하기만 하면 될 뿐 다수 크레인의 중첩작업시 신호방법을 정해야 한다고 한 것은 아니라고 판결했다. 하지만 대법원은 "해당 산업현장의 구체적 실태에 비춰 예상 가능한 산재를 예방할 정도의 실질적 안전조치에 이르지 못한 경우"를 위반으로 봤다. 이미 2024년 6월22일 화재가 발생했음에도 아무런 조치 없이 생산을 강행한 아리셀은 피해나가기 어려운 법리지만, 피했다. 손 변호사는 "이런 대법원 판결과 중대재해처벌법의 판결 법리를 의도적으로 무시했다"며 "모르고 판결했다면 자격이 없는 것이고 공포에 질린 희생자 23명이 사망한 것을 무시하고 비상통로 유지의무가 없다고 한 것은 피고인을 봐줄 마음으로 판결문을 쓴 것"이라고 비판했다.

"합의 왜 했냐고? 살기 위해서 했다" 유가족 절규

감형 사유로 유족과의 합의를 강조한 대목도 분노를 샀다. 참사로 사망한 고 김병철씨 유족 최아무개씨는 이날 간담회에서 "2심 판결에서 양형에 결정적 역할을 한 게 합의라고 하는데 용서를 한 게 아니라 살기 위해서 했다"며 "딸 둘은 대학생이고 막내아들은 자퇴했다가 대입을 위해 재입학했지만 다시 자퇴를 고민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합의를 안 하냐"고 울먹였다. 이어 "합의가 2심 판결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고 하니 자책할 수밖에 없고, 유족 모두 그렇겠지만 좀더 잘해줄 걸 하는 죄책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며 "사법부가 아리셀 유족을 버렸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피해자 변호인은 재판부가 항소심 시작부터 유족에 적대적이었다고 강조했다. 신하나 변호사는 "신 부장판사는 항소심 기일부터 울고 있는 유족에게 감치를 언급했고 피해자 대리인 의견진술을 막았다"며 "양형 과정의 문제에 대해 진술기회를 요구했지만 불허했고 울고 있는 유족에게는 합의를 했는데 왜 우냐고 다그치는 등 판결의 비대칭성이 크다"고 설명했다.

합의과정은 2차 가해에 가까웠다고 설명했다. 참사 이후 처벌불원서와 합의를 요구하며 집요하게 유족에게 연락했고 이 과정에서 피해자를 대리하는 신 변호사 같은 법조인에게는 연락하지 않고, 손해배상을 받지 않으면 공탁하겠다는 등 갖가지 방식으로 합의를 강행했다는 것이다. 신 변호사는 "고 엄정정씨 어머니 이순희씨가 법원 양형조사관과 통화한 내용에 따르면 이씨는 '처벌을 원한다'며 '그런데 합의를 했고 처벌불원서도 썼으니 그렇게 말해도 되는지 모른다'라고 했는데 처벌을 원한다는 대목은 자르고 처벌불원서 내용만 양형조사에 담았다"고 설명했다. 그는 "스토킹 수준이었다"고 지적했다.

한편 항소심 재판부는 아리셀 참사 책임자인 박순관 대표에게 15년형을 선고한 원심을 깨고 4년형으로 대폭 감형했다. 아들인 박중언 아리셀 총괄본부장에 대해서도 8년을 감형한 징역 7년을 선고했다. 검찰은 상고를 검토하고 있다. 10년 미만 양형을 이유로는 상고할 수 없지만 항소심 재판부가 중대재해처벌법상 산업재해치사혐의를 무죄로 바꾼 탓에 법리 오인을 이유로 상고가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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