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한수의 오마이갓] “논문은 많은데 쉽게 읽을 책은 부족”...‘오대산의 고승’ 총서 펴내는 월정사
1차분 ‘자장 율사’ ‘범일 국사’ ‘나옹 선사’ 출간

오대산 월정사가 1400년 역사에서 큰 발자취를 남긴 고승(高僧)들의 삶과 사상을 중고생 눈높이로 정리한 ‘오대산의 고승’(전 10권·민족사) 시리즈를 선보였습니다. 고승들의 삶과 사상을 정리한 책은 더러 있습니다. 그런데 교구 본사(本寺) 사찰 한 곳이 자신들이 배출한 스승들을 총서 형식으로 펴내는 것은 드문 일입니다. 월정사는 “오대산의 사상과 문화 DNA를 찾는 작업”이라고 의미를 설명했습니다.
“기록되지 않은 역사는 오래 못 간다”
월정사는 최근 기자간담회를 열고 총서 1차분 3권을 공개했습니다. ‘자장 율사-신라 불교의 설계자’ ‘범일 국사-대관령의 신(神)이 되다’ ‘나옹 선사-시대를 깨우고 백성을 품다’ 등입니다. 앞으로 ‘신미 대사’ ‘사명 대사’ ‘한암 선사’ ‘탄허 선사’ ‘만화 선사’에 이어 ‘오대산, 천년의 시간과 정신’ ‘오대산의 역사와 기록’ 등 10권으로 완간될 예정입니다.
여기서 눈에 띄는 점은 고승 명단입니다. 한암·탄허·만화 선사는 누가 봐도 ‘오대산 스님들’입니다. 월정사·상원사에서 거의 평생을 보내며 뚜렷한 족적을 남겼지요.

그렇지만 자장 율사나 범일 국사, 나옹 선사, 신미 대사, 사명 대사는 오대산과 인연은 분명하지만 평생을 이곳에서 보낸 분들은 아닙니다. 요즘 표현으로 한다면 ‘전국구’ 스님들입니다. 신라 때 스님인 자장 율사는 당나라 유학 후 부처님 진신사리(眞身舍利)를 옮겨와 전국 사찰에 모신 분입니다. 월정사를 창건한 분이지요. 그렇지만 통도사, 영월 법흥사, 설악산 봉정암 등이 자장 율사가 진신사리를 모셔 창건한 절입니다. 고려 말의 나옹 선사도 영덕 출신으로 오대산과 많은 인연을 맺었지만 원나라 유학 후 황해도 신광사 주지를 거쳐 양주 회암사를 중창하고 마지막엔 여주 신륵사에서 입적했습니다. 임진왜란 때 승병장으로 이름을 날린 사명 대사 역시 전국적으로 유적이 산재해 있지요.
신미·사명 대사, 한암·탄허·만화 선사도 출간 예정
그래서 저는 이 명단을 보면서 ‘선점’(?)이란 단어를 떠올렸습니다. 이번 총서를 발간하면서 월정사는 “기록되지 않은 역사는 오래가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역사는 기억하고 기록하는 자의 것입니다. 반면 아무리 소중한 역사를 가지고 있더라도 기록하지 않으면 언젠가는 잊히고 사라지게 됩니다. 그런 점에서 월정사의 ‘선점’은 의미 있는 작업입니다.
총서 발간 프로젝트는 월정사 주지 정념 스님의 제안으로 시작됐다고 합니다. 2024년 연말 정념 스님은 도서출판 민족사 윤창화 대표에게 10권짜리 총서를 제안했습니다. 윤 대표는 월정사와 각별한 인연이 있는 분이죠. 강원 평창 출신인 윤 대표는 월정사로 출가해 수행자로 살다가 환속해 출판사인 민족사를 설립한 분입니다. 출판사 설립 후에도 한암·탄허·만화 선사를 중심으로 사진 자료를 정리한 ‘오대산의 3화상(和尙)’을 펴내는 등 월정사와 꾸준히 인연을 이어왔습니다. 그런 인연이 있었음에도 스님의 제안을 들은 윤 대표는 걱정이 앞섰답니다. 총서 10권을 내려면 최소한 3억원 정도의 예산이 든다는 것이죠. 월정사는 조계종 제4교구 본사로 많은 말사(末寺)를 두고 있지만 한 번에 이런 거액을 마련하는 것은 부담되는 일이죠. 그렇지만 정념 스님은 “걱정 말라”며 추진을 부탁했다고 합니다. 정념 스님은 “오대산은 과거에 머문 산이 아니라, 지금도 4개의 선원에서 100여 명의 선승들이 치열하게 화두를 들고 수행하는 살아 있는 공간”이라며 “역사 속 고승들의 생애와 가르침을 오늘의 언어로 다시 정리하고, 그 정신을 기록으로 남기는 일이야말로 지금 반드시 필요한 일”이라고 했습니다.

고승의 선정 기준은 오대산에서 수행하고 구체적 일화가 있는 분들로 정했습니다. 각계 전문가들로 집필진을 구성했고, 오대산을 찾아 답사도 하고 워크숍도 열었습니다. 회의도 여러 번 했고요. 월정사와 출판사가 집필진에게 특별히 부탁한 것은 “중고생 정도면 이해할 수 있는 수준으로 재미있게, 소설 형식으로 써 달라”는 것이었답니다. 정념 스님은 “고승들에 관한 전문가들의 논문은 많다. 그런데 일반인이 읽을 만한 쉬운 책은 드물다”고 했습니다.
‘쉬운 책’ 기준 맞추려 원고 다시 쓰기도
이후 집필이 시작됐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쉽게 쓴다’는 것은 정말 쉽지 않은 일입니다. 정말 많이 알아야 쓰는 것도 쉬워질 수 있습니다. 이 기준 때문에 ‘자장 율사’ 집필자 김형중씨는 원고를 두 번 고쳐 썼다고 합니다. 김씨는 동국대 불교학과를 졸업하고 여러 불교계 신문의 논설위원을 지내고 불교 관련 저서도 다수 펴낸 전문가입니다. 그런 전문성이 오히려 쉽게 쓰는 데에는 방해가 됐던 셈이겠죠. 이런 노력의 결과, 총서는 소설 형식으로 쉽게 읽히는 책이 됐습니다.
신라 불교의 설계자 자장 율사
자장 율사(590~658)는 오대산의 개산조(開山祖)입니다. 책은 신라의 모든 승려를 통솔하는 대국통(大國統)이라는 지위의 자장 율사가 선덕여왕의 만류를 뿌리치고 서라벌을 떠나 당시로서는 고구려와 접경 지역인 강원도 오대산으로 들어가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그의 바랑에는 당나라 오대산에서 문수보살을 친견하고 받아온 진신사리가 들어 있었지요. 책은 오대산 장면에서 시간을 거슬러 자장의 탄생과 성장 과정, 출가, 그리고 당나라 유학의 시간 순으로 흘러갑니다. 삼국유사 등 문헌에 적힌 기록 사이사이의 빈틈은 상상력으로 채웁니다. 문수보살, 용왕, 용도 등장해 전래 설화를 읽는 느낌이 듭니다. 그 사이사이 고구려, 백제, 신라 그리고 왜의 관계가 서술돼 삼국 통일 전야의 역사적 풍경도 읽을 수 있습니다.
대관령의 신이 된 범일 국사
범일 국사(810~889)는 오대산과 깊은 인연이 있는 스님입니다. 통일신라 시대 오대산의 정기를 받아 강릉의 명문가에서 태어난 아이의 ‘출생의 비밀’로 시작합니다. 그 아이가 자라 고향을 떠나 금성(서라벌)을 거쳐 당나라에 유학해 당시로서는 새로운 불교 흐름인 선종(禪宗)을 계승해 귀국하지요. 그는 고향 강릉에 굴산사를 중심으로 ‘사굴산문’을 개창했는데 당시 구산선문(九山禪門) 가운데 가장 세가 컸고 훗날 보조국사 지눌, 나옹 선사 등이 사굴산문에서 배출됐다고 하지요. 그런데 범일 국사는 특이한 점이 있습니다. 언젠가부터 대관령의 산신으로 모셔진 것이지요. 강릉단오제에서도 ‘주신(主神)’으로 모셔지고 있다고 하고요. 그만큼 범일 국사의 위상은 사찰 담장을 넘어 주민들에게 신적인 존재였던 것이겠지요. 그런 전설 같은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시대를 깨우고 백성을 품은 나옹 선사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 하고/창공은 나를 보고 티 없이 살라 하네’로 시작하는 ‘청산가’로 유명한 나옹 선사(1320~1376)는 고려말의 선승입니다. 이 책에서는 경북 영덕에서 태어난 나옹 선사가 원나라로 유학을 떠나 인도 출신의 지공 선사를 비롯해 당대의 고승들과 선문답을 나누는 내용이 소개됩니다. 또 원나라 수도의 대찰인 광제선사의 주지까지 맡게 되지요. 불과 10년 사이에 제국의 정신적 스승 반열에 오른 것이지요. 유학 후 귀국한 그가 찾은 곳이 오대산이었습니다. 오대산 여러 암자에서 서너 달 혹은 한두 달씩 머물며 혼수 스님에게 법을 전하지요. 이후 왕사로 임명돼 송광사 주지를 역임하고 공민왕의 지원으로 양주 회암사를 대가람으로 중창하지요. 이 과정에 태고 보우 국사와 무학 대사와의 인연도 소개됩니다.
자장 율사, 범일 국사, 나옹 선사는 모두 난세의 인물들입니다. 자장 율사는 삼국통일 직전 국력이 약했던 신라 수도에 황룡사 9층 목탑을 세우면서 민심을 하나로 모으는 역할을 했지요. 범일 국사는 유학하던 당시 당나라 무종(武宗)의 불교 탄압(회창폐불)을 겪고 귀국하지요. 나옹 선사는 고려 말의 혼란 가운데 불법(佛法)을 올바로 펴기 위해 애썼고요. 책에는 당대의 역사와 시대상이 적절히 녹아 있어서 글을 읽다가 관련 내용을 찾아보게 만듭니다. 재미있게 읽으면서 공부가 되는 총서가 ‘오대산의 고승’입니다.
앞서 역사는 기억하고 기록하는 자의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정념 스님은 간담회장에서 ‘AI(인공지능) 시대’를 이야기했습니다. “기계가 인간화되고, 인간이 기계화되는 대전환의 시대”라는 것이죠. 또한 인공지능 시대에는 얼마나 많은 데이터를 인공지능이 학습하느냐에 따라 올바른 정보가 전달될 수 있는 길도 열리지요. 이번 총서는 그런 데이터 제공의 의미도 있다고 합니다. 오대산의 선조 현양 작업이 기대됩니다. 또한 다른 사찰이나 기관에서도 스승을 현양하는 다양한 시도가 이뤄지길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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