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드라마 PD로 20년, 쉰에 초보 변호사 됐어요

이소연 KBS PD(드라마센터) 2026. 4. 29.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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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격의 기쁨이 사라지니 두려움이 밀려드네요. 좋은 변호사가 되고 싶어요." 여의도공원에서 만난 이소연 PD. 백성현 기자

화면이 열렸다. 다섯 자리 숫자. 내 이름. 합격. 심장이 터질 것 같다. 뭔가 비현실적이어서 법무부 홈페이지를 나갔다 다시 들어왔다. 똑같은 화면이 열린다. 내 수험번호. 내 이름. 합격. 이번에는 화면을 캡처한다. 캡처한 화면을 확대해서 자세히 들여다본다. 합격. 그제서야 환희가, 거대한 환희가 나를 덮친다.

작년 생일을 기점으로 만 50세가 되었다. 언젠가부터 기쁨, 슬픔, 노여움… 그 어떤 감정도 이전만큼 선명하게 다가오지 않았다. 그래서 생각하곤 했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모든 일에 대해 시큰둥해지는 과정이구나. 그런데 캡처한 화면을 앞에 두고서, 나는 내가 단단히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50대에 접어든 나에게도 이토록 격렬한 기쁨이 찾아올 수 있다. 살면서 내가 느낀 모든 기쁨의 크기를 압도하고도 남을 거대한 환희가.

나는 오랫동안 드라마PD로 살아왔다. 로스쿨 다닌다고 휴직한 기간을 제외하고도 20년이 훌쩍 넘는다. 올해 초 변호사시험을 치르고 복직해서 현재에도 KBS 드라마센터에서 근무 중이다.

'왜' 로스쿨이냐고, 드라마PD가 '왜' 변호사가 되고 싶으냐고 많은 사람들이 물었다. 때로는 호기심, 때로는 감탄, 때로는 '굳이'라는 말을 더해서 우려와 함께. 사실 그것은 누구보다도 나 자신이 가장 알고 싶은 질문이었다. 나는 그에 대한 정답을 찾기 위해 긴 시간을 헤맸다.

변호사라는 직업이 매력적이었다, 이제 드라마 속 인물이 아니라 '진짜' 사람들을 위해 일하고 싶다, 드라마를 연출하면서 법을 알아야 할 필요성을 절감한 경험이 있다,… 내가 했던 답변들은 모두 일말의 진실이었지만 동시에 그 어떤 것도 완벽한 진실은 아니었다.

로스쿨에 합격한 다음 날, 아는 제작사 대표로부터 문자가 왔다. 어떻게 지내시냐고, 갑자기 생각나서 문자 보낸다고. 마지막으로 본 게 5년 전이었다. 우리는 그 즈음 불의의 사고로 갑자기 세상을 떠난 어느 배우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다 불쑥 내가 말했다.

"더 나이가 들면 로스쿨에 가야 할 것 같아요. 제 인생의 두 번째 시즌은 변호사로 살려고요."

그 말이 내 안 어디에서 튀어나왔는지 나는 모른다. 다만 맥락 없이 튀어나온 그 문장의 끝이 '살고 싶어요'가 아니라 '살려고요'였다는 것은 분명하다. '소망'이 아니라, 이미 정해진 목표를 향한 '의지'의 표현.

그녀의 대답은 마치 당연히 들을 말을 들었다는 듯 담담했다.

"다음에 만날 때 로스쿨에 가셨다는 소식을 들을 수도 있겠네요."

그 날 이후 그 대화를 잊고 지냈다. 그리고 5년이 지나 갑작스러운 문자를 받은 것이다. 마치 예언의 실현처럼, '다음에 만날 때' '로스쿨에 갔어요'라는 소식을 전하기 위해.

그러므로, 내게 변호사가 되는 일은 '그냥 그렇게 하기로 정해져 있었던' 느낌에 가깝다. 민망함을 무릅쓴다면 '운명'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운명, 어쩌면 나에게는 가장 완벽한 진실, 내 집 우편함에서 내 이름이 적힌 우편물을 가져오듯이 당연하게 진행되는 어떤 것.

창밖이 환해지고 있다. 하루가 지난 것이다. 합격 발표 다음날 아침이었다. 그리고 나는 어젯밤 그토록 강렬했던 가슴 벅참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음을 깨닫는다. 기쁨이 사라진 자리에는 두려움이 도사리고 있었다. 이제 나는 나이만 먹은 채로 '초보'로 다시 시작해야 한다. 쉰 살의 초보 변호사라니. 노안이 찾아왔고, 어깨도 예전 같지 않고, 소화력도 많이 떨어졌는데. 한창때보다 기량이 떨어진 몸뚱아리로 새로 시작해야 한다니. 공포감이 밀려든다. 암전.

잠깐, 어둠 속에서 반짝, 전구가 켜지는 것 같다. 나는 지금을 '다시 시작'이라고 불렀지만, 나는 이미 오랜 시간 걸어온 사람. 그러니 내가 다시 시작하는 지금은 길의 맨 처음 시작이 아니라, 내 과거와 미래가 연결되는 어느 모퉁이쯤.

인생의 모든 길은 '이어진' 길이다. 시인 이성복은 이렇게 썼다. "언제나 끝났다고 생각한 곳에서 길은 다시 시작되었지요."('산길 2') 삶에서 끊어진 길은 없다. 그러니까 지금 내 안에는, 수많은 이야기의 기억이, 드라마 촬영 현장의 새벽이, 배우들의 눈빛이, 콘텐츠를 만들며 몸에 밴 어떤 감각이, 원룸 벽에 빼곡히 붙였던 판례 포스트잇들이, 통째로 외우고 싶은 문장들을 덮었던 수백 자루의 노란색 형광펜들이,… 그대로 있다. 나는 그 모든 것들을 고스란히 안은 채 모퉁이를 도는 것이다.

복직한 이후 드라마센터에서 '인공지능 시대, KBS드라마의 미래전략'에 대한 보고서를 쓰고 있다. 3년 만에 돌아온 현장은 놀라울 만큼 달라졌다. 인공지능이 드라마 제작의 구조를 빠르게 바꾸고 있고, 기존 저작권법의 체계로는 담아내기 어려운 균열과 공백이 곳곳에서 생겨나고 있었다. 카메라 앞에서 벌어지는 일과 법전 사이에는 아직 아무도 놓지 못한 다리가 있다. 두 세계를 모두 걸어본 사람만이 놓을 수 있는 다리. 요즘 나는 일하는 사이, 그 '사이'를 자주 바라본다.

사람들은 이제 더 이상 내가 '왜' 변호사가 되고 싶었는지 궁금해하지 않는다. 요즘 그들은 이렇게 묻는다. 그래서 이제 뭐할 건데? 어떻게 할 건데? '왜'에서 '무엇을' '어떻게'로. 사실 이것 역시 누구보다도 내가 나 자신에게 가장 묻고 싶은 질문이고, 앞으로의 시간 동안 내가 만들어가야 할 이야기다.

당연하게도 '좋은' 변호사가 되고 싶다. 내게 있어 좋은 변호사란 '실력 있는' 변호사다. 잘 하는, 잘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변호사. 인공지능, 미디어·엔터테인먼트 산업, 콘텐츠, 저작권, 그리고 법. 이 모든 것들이 섞이고 나아가는 곳에서, 의미 있는 것들을 연결하고, 빈틈을 채우고, 불필요한 요소를 해체하면서 - 나답게, 변호사로서, 잘 살아가고 싶다.

창밖은 봄, '초보'로 시작하기 딱 좋은 계절, 봄이다.

이소연 KBS PD(드라마센터)

이소연 PD는 …
서울대학교 언론정보학과 학사·석사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영화과 전문사
성균관대학교 MBA
경북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졸업
제15회 변호사시험 합격
에세이집 5권 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