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같은 삶 살게 된 건 사소한 용기 부족 때문’… 선택 못한 삶의 아쉬움
‘빈티지 엽서’ 비롯 단편 7편 엮어
몇 해 전 찾은 오스트리아서 영감
헬스장 명함 이벤트 맞물려 써내
“꿈이라고 해서 거창한 무엇 아닌
살아보지 못한 삶 상상하는 거죠”
저건, 뭐지. 골목길 가게에서 오래된 엽서를 팔고 있었다. 최소 수십 년에서 많게는 몇백 년 전의 엽서들. 영어는 물론 독일어나 러시아어 등 다양한 언어로 쓰인 데다가 필기체로 쓰여 있어 내용 해석도 거의 불가능해 보였다. 하지만 가게 안에는 많은 사람이 마치 골동품처럼 엽서를 이리저리 살펴보고 있었고, 일부는 돈을 주고 사기도 했다. 아니, 왜 저런 것을 사는 것일까.

어느 순간, 자주 다니던 집 근처 헬스장의 경험과 사람들의 모습이 겹쳐지기 시작했다. 어느 날 다니던 헬스장에서 회원들이 상자 속에 명함을 넣어놓으면 나중에 추첨을 통해 단백질 셰이크 등을 주는 이벤트가 열렸다. 투명 상자 속의 명함을 보니 사람들의 직업은 다양했다. 대기업에 다니는 사람, 경찰 간부, IT 회사에 다니는 직원…. 유니폼 너머 사람들의 훨씬 많은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빈티지 잔상과 헬스장의 경험이 겹쳐지면서 마침내 단편소설 ‘빈티지 엽서’가 나왔다.

개인과 사회의 경계에서 관계의 균열을 담담하게 응시해 온 작가 김혜진이 김승옥문학상과 이효석문학상 우수상 수상작인 ‘빈티지 엽서’를 비롯해 최근 발표한 단편 7편을 엮은 소설집 ‘달걀의 온기’(창비)를 들고 돌아왔다.
김 작가는 이번 소설집에서 “관심은 병으로 취급받고 손해는 죄가 되는 세상에서”도 “결국 손 내미는 사람들”의 “과묵한 선의”를 집요하게 추적한다. 단절된 개인들이 예상치 못한 순간에 서로의 삶에 개입하며 만들어내는 미세한 파동을 통해 닫혀 있던 내면이 조금씩 열리고 그 틈으로 온기가 스며드는 순간을 절묘하게 포착한다.

“사람들에겐 이루지 못한 꿈이 있잖아요. 꿈이라고 해서 거창한 무엇이라기보다는 ‘그때 그랬으면 어땠을까’ ‘다른 선택을 하면 어땠을까’, 하고 살아보지 못한 삶을 상상하는 거죠. 파란 반바지 남자는 여자에게 그런 살아보지 못한 삶을 경험하게 해주는 존재가 아닐까 생각해요. 그녀는 남편과 자전거 대리점을 운영하며 살고 있지만 번역가나 통역가를 꿈꾸었던 사람이거든요. 남자와 외국의 빈티지 엽서를 읽는 시간이 현재와는 다른 삶을 그녀에게 잠깐씩 선사한다고 생각했어요. ‘우리가 지금 같은 삶을 살게 된 건 사소한 용기가 부족했기 때문’이라는 말에는 자신이 선택하지 못했던 삶에 대한 아쉬움이 담겨 있는 거죠.”
김유정문학상 수상작 ‘푸른색 루비콘’은 자식의 죽음을 함께 슬퍼할 데를 찾지 못해 말에게 겨우 하소연하는 한 마부의 고독을 그린 안톤 체호프의 단편 ‘마부’가 연상되는 작품. 화자 경수는 퇴직하고 아내와 사별한 뒤 다니기 시작한 교회에서 추레한 행색의 한 남자를 만나고, 그의 부탁으로 허름한 양봉장에 차를 몰고 가게 된다. 경수는 새로운 관계에 대한 회의가 적지 않지만, 그가 내어준 꿀물 한잔에 뜻 모를 평화를 느끼게 된다.
―‘푸른색 루비콘’은 퇴직하고 상처한 경수의 스산한 삶과, 그 스산함에서 조금씩 빠져나오는 장면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아내가 세상을 떠나고 경수는 홀로 남겨집니다. 그는 평생 사회생활을 했지만 관계를 맺는 데는 서툴러요. 유일하게 가까워진 사람이 박훈식이라는 사람인데, 그는 경수가 친해지리라고 상상하지 않았던 부류의 사람이죠. 하지만 혼자 힘으로 처음 관계를 맺은 사람임은 분명해요. 마지막 장면에서 경수가 그의 이름을 말하는 건, 그가 박훈식이라는 사람과 가까워졌음을 보여주는 동시에, 그가 그 관계를 의미 있게 여기고 있음을 드러낸다고 생각했어요.”

“외국 여행을 가면 예상치 못한 사람들의 친절과 선의에 기대야 할 때가 많잖아요. 사는 일도 그렇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요즘은 자주 해요. 알든 모르든 모두가 다른 누군가의 도움과 보살핌 안에서 하루하루를 무사히 지나는 게 아닐까 하고요.”
1983년 대구에서 나고 자란 김혜진은 2012년 단편소설 ‘치킨 런’이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장편소설 ‘중앙역’, ‘딸에 대하여’, ‘9번의 일’, ‘경청’, ‘오직 그녀의 것’ 등을, 중편소설 ‘불편과 나의 자서전’과 소설집 ‘어비’, ‘너라는 생활’, ‘축복을 비는 마음’ 등을 발표했다. 중앙장편문학상과 신동엽문학상, 대산문학상, 젊은작가상, 김유정문학상, 이효석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남편은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가볍게 흔들고 나갈 채비를 했다. 그 순간, 그녀는 이런 생각을 했다. 이렇게 사는 건 용기가 없어서가 아니라 늘 더 용기를 냈기 때문이라고. 익숙한 일상을 지키는 건 그것을 포기하는 것보다 언제나 더 어려운 일이었다고. 그녀는 그것이 자기변명과 자기합리화에 불과하다는 사실 또한 모르지 않았다. 그러니까 후회와 원망, 안도와 고마움의 감정을 동시에 느꼈던 것이 이번이 처음이 아닌 것처럼.”
김용출 선임기자 kimgija@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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