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완벽한 하루

박윤미 수필가 2026. 4. 28.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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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즈포럼
박윤미 수필가

봄비가 부슬거리는 토요일 이른 아침, 딸과 함께 청주로 향했다. 딸이 시험을 마칠 때까지 세 시간 정도의 여유가 있었다. 가까운 곳에 있는 '열린 도서관'이란 곳이 있어, 그곳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처음 방문한 문화제조창 건물은 주차장부터 공간이 상당히 넓어서 입구부터 내 마음의 빗장이 열리는 듯했다. 건물 안으로 들어서니 빵 굽는 냄새가 구수하다. 건물의 중앙에 천장까지 이어진 엘리베이터가 줄에 매달린 상자처럼 오르락내리락하는 모습이 투명하게 다 보인다. 그러나 나는 계단을 따라 올라간다. 층마다 어떤 곳인지 표지판을 보며 어슬렁어슬렁 느리게 걷고 싶은 날이었다.

3월 내내 숨차게 달렸다. 경험이 쌓이면 수완도 생겨서 일을 더 수월하게 할 텐데, 매년 처음 가는 길처럼 서툴다. 올해는 능숙하게 이 시기를 지내리라 각오했건만 실제는 생각보다도 훨씬 더 우왕좌왕했다. 오늘만은 내게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을 선물하고 싶다. 지친 몸과 마음을 차분히 식히고 싶다. 유리 천창 위로 먹구름도 천천히 흐른다.

계단과 엘리베이터 둘레에는 책꽂이가 있어 누구라도 맘에 드는 책을 하나 빼서 읽을 수 있는, 말 그대로 열린 독서 공간이다. 맨 위층에 도착하자 유리 천창 아래 진짜 열린 도서관이 나를 반겼다. 이름대로 문도 없다. 도서관 입구에는 10시 개점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았다. 나도 한옆에 앉았다. 녹색 소파와 낯선 사람들, 유리 천창으로 보이는 하늘과 창밖 풍경, 그리고 작은 화분들···. '토요일 오전 풍경'이라는 평화로운 정물화 속에 나도 잠시 하나의 정물이 되어본다.

드디어 도서관 안쪽으로 들어섰다. 무언가로 꽉 찬 곳은 보통 답답해 보이는데, 책으로 꽉 찬 공간은 왜 편안하게 느껴지는지 모르겠다. 한가로이 책등을 눈으로만 훑어보며 지나는데, 그중 나를 잡는 제목 하나가 있다. '나는 다정한 관찰자가 되기로 했다.'. 책을 꺼내어 보니 '불안에 휘둘리지 않는 단단한 태도에 관하여'라는 부제가 있었다. 책의 제목이 무심하게 나를 툭 건드린다. 타로카드를 한 장 뽑은 것처럼 오늘 내 상태에 대한 진단서 같다. 요즘 그저 바빴던 것만이 아닌가 보다.

우리 집 고양이 중에 애기(이름이다.)는 예민하고 잔병치레도 많다. 거실 한쪽에 작은 골판지 박스를 두었는데, 이 허름한 공간이 애기에게 아주 소중한 곳이다. 놀다가도 그 속으로 쏙 들어가버리곤 한다. 그만하자는 뜻이다. 매일 저녁 9시에 약을 먹이는데 그 무렵이 되면 애기는 어느새 상자에 들어가 있다. 우리는 애기가 안정을 찾고 스스로 나올 때까지 기다려 준다. 잠시 후 느긋한 고양이다운 걸음으로 나와 다가오면, 그제야 약을 먹인다. 상자가 애기의 절대 안전구역이듯이 도서관이나 서점은 오래전부터 내 절대 안전구역이었다.

오늘 내가 빼든 책의 내용은 좋은 엄마가 되려는 압박 때문에 불안한 이들을 위한 것이었다. 사람들은 다양한 문제로 불안하다. 모두 주어진 일을 잘 해내려는 마음 때문일 테다. 나는 나의 안전구역 안에서 잠시 숨을 고른다. 조용히, 그림을 그리듯 글을 썼다. 애기의 상자에 대해, 그리고 '나의 상자'에 관해 썼다.

금세 시간이 지나 시험을 끝내고 온 딸을 다시 만났다. 함께 빵도 사고 점심도 아주 느긋하게 먹었다. 돌아오는 길, 어느새 맑게 갠 하늘 아래 봄빛이 따사로웠다. 차창 밖으로 봄비 그친 무심천에 벚꽃들이 하얗게 봉오리를 터트리고 꽃구경 오는 사람들로 거리가 채워지고 있었다. 딸과의 데이트에 날씨까지, 오늘 반나절이 지났을 뿐인데 벌써 이렇게 완벽한 하루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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