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상환칼럼] 데칼코마니의 나라 베트남 : 800원의 반성

"원 아워, 투 달러!" "노, 원 달라!" 1996년 가을, 베트남 하노이. 1992년 수교 후 우리나라 대통령의 첫 국빈방문 준비차 갔을 때다. 씨클로(자전거 택시)를 타려 했는데 기사는 바가지를 씌우려 했다. 통상 1시간 1달러인데 무려 두 배를 더 받으려 한 거다. 결국 나는 실랑이 끝에 1달러로 합의를 봤다.
자전거 앞에 앉아 고, 스톱을 반복하며 호얀끼엠 호수를 돌았다. 그 씨클로 기사는 찡그리지 않고 친절하게 웃으며 페달을 밟았다.
지금 생각하면 참 쪼잔했다. 당시 고정환율로 1달러 800원이었는 데 그걸 깎자고 했으니, 그 옹졸함이 부끄럽다.
1995년 당시 베트남의 1인당 국민소득은 약 277달러, 그해 한국은 1만1천432달러 수준으로 격차는 매우 컸다. 하지만 30년이 지난 지금 2024년 기준 베트남은 4천700달러에 이르렀다. 우리나라는 3만6천624달러로 3.2배 성장한 반면 베트남은 약 17배나 성장했다. 그간의 소득격차도 약 41배에서 약 7.7배로 대폭 감소했다.
결국 알게 되는 것은 우월의식이란 상대적인 허약한 감정 구조일 뿐이라는 거다. 베트남에서 가졌던 나의 그 시선처럼, 8만 달러가 훌쩍 넘는 미국이나 10만 달러 이상의 싱가포르, 스의스, 룩셈부르크 등의 사람들이 나를 대할 때 그리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나?
성장의 속도나 소득의 높낮이가 아니라, 다른 문화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어떻게 바라보고, 어떻게 연결되는가가 세계 시민의 품격을 결정한다. 우월함이 아니라 이해, 비교가 아니라 존중. 그 마음으로 바라볼 때 비로소 한 나라의 현재와 미래가 또렷하게 보인다.
한국과 베트남은 '먼 이웃'이 아니다. 두 나라는 유교 문화권이라는 공통분모 아래 독자적 문화를 발전시켰다. 또한 외세 침략과 식민 지배를 견디며 민족 정체성을 지켜낸 강인한 DNA를 공유한다. 20세기 중반, 냉전의 소용돌이 속에서 전쟁의 폐허를 겪었다는 비극적 유사성 또한 두 나라를 심리적으로 연결하는 끈이다.
우리와 베트남은 시간만 다를 뿐, 같은 길을 걸어 왔다. 현재 베트남은 '차이나 플러스 원(China Plus One)' 전략의 최대 수혜국을 넘어, 동남아시아의 경제적 허브이자 국제정치적 요충지로 부상했다. 미국, 중국, 러시아, 일본에 이어 한국과도 '포괄적 전략 동반자 관계'를 맺으며 실리 중심의 '대나무 외교(Bamboo Diplomacy, 부드럽지만 꺾이지 않는 강인함)'를 선보이고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재명 대통령의 이번 방문을 통해 한 층 진일보한 관계증진이 이루어졌으면 한다.
한국은 베트남의 최대 투자국(누적 기준)이며, 삼성전자 수출액의 약 30%가 베트남에서 생산될 정도로 두 나라의 경제는 이미 '한 몸'과 같다. 이제 협력의 분야는 단순 제조를 넘어 반도체, AI, 핵심 광물(희토류 등) 공급망 등 첨단 기술과 인재 육성으로 고도화되고 있다.
국가 간 외교는 가장 고도화된 '국가 브랜딩' 과정이다. 과거의 국가 마케팅이 단순히 자국의 상품을 파는 '세일즈'에 집중했다면, 선진국 반열에 오른 지금의 한국은 '가치(Value)와 품격'을 제안해야 한다.
베트남 시장에서 한국의 소프트 파워는 이미 정점에 와 있다. 하지만 K-POP과 드라마가 만든 환상 뒤에, 우리가 그들을 대하는 태도가 여전히 '800원을 깎으려는 우월감'에 머물러 있다면 브랜드의 생명력은 오래 버티지 못한다. 진정한 국가 마케팅은 상대국 국민의 자존심을 존중하고, 그들이 흘리는 땀의 가치를 상품의 가격보다 높게 평가할 때 완성된다.
베트남에게 한국은 더 이상 '미래 모델'이 아니다. 한-베관계는 이제 함께 새로운 시장을 창출해 나가는 '공동 창업자'로 재정의돼야 한다.
특히 경기도는 이러한 대(對) 베트남 교류의 실질적인 심장부다. 현재 경기도에는 전국에서 가장 많은 약 6만 명 이상의 베트남인이 거주하며 단순한 인력 지원을 넘어 지역 경제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다.
경기도는 베트남의 경제 수도 호찌민시와 1995년 자매결연을 맺은 이후, 하노이, 응에안성 등과도 긴밀한 협력 관계를 유지해 왔다. 경기도 내 중소기업들의 베트남 진출 비중은 전국 지자체 중 압도적 1위이며, 도내 대학들에 재학 중인 베트남 유학생들은 양국을 잇는 미래 가교로 성장하고 있다. 경기도가 추진하는 첨단 산업 단지와 베트남의 젊은 인재들이 결합할 때, 이는 경기도의 새로운 성장 동력이 될 것이다.
이제 국가 차원의 진정성 있는 협력과 상호 존중으로 갚아야 할 때다. 세계 시민의 품격은 소득의 높낮이가 아니라, 상대의 가치와 문화를 존중하는 태도에 달려있다. 대한민국, 그리고 그 중심인 경기도가 진정한 글로벌 중추로서 '동반자의 예의'를 보여주는 전환점이 되길 바란다.
이제 한국과 베트남은 이제 함께, 같은 방향으로 페달을 밟아야 한다.
정상환 한경국립대 객원교수, The Brain & Action Communic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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