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은의 시선] 봄의 2막 2장

김은숙 시인·수필가 2026. 4. 28. 1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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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은숙 시인·수필가

퇴근길, 나무가 즐비한 길을 걷는데 뭔가 파드득거리며 앞으로 날아왔다. 나뭇가지 위에서 날개를 펼쳐 땅으로 내려앉는 까치였다. 녀석은 먹이를 찾는 모양인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때 내 주머니 안 핸드폰에서 이어폰 선이 풀려 땅으로 떨어졌다. 그러자 새는 놀란 듯 날아올랐다. 이어폰을 주우려고 몸을 숙였다. 순간, 바닥에 또렷하게 드리워진 내 그림자와 마주했다.

잠시 그 자리에 멈춰 그림자를 바라보았다. 실체로서의 내가 객관적인 시선으로 파악하는 그림자는 낯설면서도 친숙했다. '나는 지금 어디쯤 와 있을까? 이대로 정말 괜찮은 걸까?' 그런 물음이 불쑥 떠올랐다. 길지도 짧지도 않은 그림자는 안정적이었고 이상하게 편안했다. 내가 이제껏 걸어온 길을 확인해주는 지표처럼 느껴졌다. 흔들리지 않은 그림자에서 그나마 잘 견뎌왔구나 하는 안도감을 느꼈다.

인생을 한 권의 책에 비유한다면, 2막 2장은 방향전환 시기, 이를테면 하나의 장이 끝나고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되는 시점이라고 할 수 있겠다. 서툴고 설레던 마음이 차분해지고 익숙해져 인생을 전반적으로 돌아볼 수 있기에 중요하다. 조금은 단단해진 마음의 근육으로 삶의 궁극적인 지향점을 찾는 시기이기도 하다.

'새로운 시작' 혹은 '변화의 계절'이라 부르지만 달라지는 건 겉모습 만이 아니다. 깨달음과 성찰이 일어나기에 특별할 수밖에 없다. 삶이 내게 던지는 여러 질문과 마주하다 보면, 어느새 자신에게 더 솔직해진다. 삶의 방식을 바꾸거나 깊어지는 단계이므로 풍성한 이야기를 써나갈 수도 있다. 다른 한편으로 2막 2장은 잊었던 오래된 꿈을 다시 펼쳐보는 기회일 수도 있다.

나 또한, 일기장에 감춰둔 지난날들을 향긋한 봄날 오후에 다시 꺼내 읽어보았다. 칸 칸마다 숨 가쁜 시간이 서려 있었다. 때로는 힘겨워 손에 쥔 모든 걸 놓아버리고 싶던 날도 있었다. 희망이란 단어가 나와 상관없게 느껴지던 밤도 있었다. 하지만 지나고 나서 생각하니 그 모든 순간이 나를 단단하게 했던 것 같다. 거기에 무슨 거창한 위로가 있었을까. 단지 소소한 일상이 주는 소중함을 잊지 않았기에 견딜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길을 걷다가 무심히 바라본 노란 개나리가 유독 더 환하던 날, 이유 없이 미소가 번진 것도 그래서였던 것 같다.

인생의 절정을 지났다고 해서 모든 게 끝나거나 의욕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삶의 무게는 슬며시 들이닥치고 버거운 시기는 예고 없이 찾아온다. 하지만 그 무게가 나를 조금씩 단단하게 빚어준다는 걸,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예전엔 앞만 보고 달렸는데, 요즘은 내 안의 작은 목소리에도 귀를 기울인다.

느긋하게 걷는 날엔 그 속도에서 더 큰 용기가 피어나는 걸 경험한다. 골목길에서 마주친 이름 모를 새의 울음소리, 우연히 지나친 누군가의 짧은 인사 한마디가 오래 마음에 남는 날이 있다.

인생 2막 2장은 전환을 뜻하지만 살아온 날들을 배제할 수 없다. 지나온 날들이 걸어갈 날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내일은 여전히 불투명해도 경험이라는 게 있기에 과감히 발걸음을 딛는다. 그렇게 우리는 각자 자기만의 속도로, 앞으로 나아간다. 흔들리지 않는 마음 한 조각 꼭 붙들고, 나만의 보폭으로 한 걸음씩 내디뎌 보자. 누구와 비교할 필요도, 늦었다고 불안해할 이유도 없다.

어느 시인의 말처럼 내 마음의 결을 따뜻하게 어루만지며, 봄이 온전히 당신 곁을 지나가길 바란다. 돌아오는 골목에서 바람을 맞으며 고개를 들면, 저마다의 색으로 이야기를 이어가는 우리의 모습이 비친다. 그런 작은 순간이 모여 다시 이어질 새로운 막을 펼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