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타적유전자·손필영>전쟁과 이름 사이에서, 우리는 누구로 살고 있는가?

지구 곳곳에서 전쟁과 분쟁이 이어지고 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여전히 끝을 예측하기 어렵고, 가자 지구를 비롯한 중동 여러 지역에서는 민간인의 고통이 지속되고 있다. 특히 그 속에서 보호받아야 할 아이들까지 희생되고 있다는 사실은 이 시대의 비극을 더욱 선명하게 드러낸다. 총성과 붕괴된 건물의 이미지가 일상이 되어버린 세계에서 인간의 삶은 점점 더 불안정한 지면 위에 놓여 있는 듯하다. 경제적 불안 역시 이러한 현실을 비켜가지 못한 채 개인의 일상 깊숙이 스며들고 있다.
그럼에도 꽃은 피고 지고, 계절은 정확하게 움직여 아무 일도 없었던 듯 4월도 흘러가고 있다. 그 반복이 오히려 현실을 낯설게 만든다. 5월이 되면 사회는 더욱 분주해질 것이다. 어린이날, 어버이날, 스승의 날, 그리고 수많은 기념과 행사와 모임. 사람들은 서로를 챙기고 인사를 나누며 관계를 확인한다. 그 속에서 개인은 자신이 누구인지 끊임없이 의식하고 직업과 소속, 위치를 먼저 생각할 것이다. 사람은 사람으로 만나기보다 역할로 먼저 바라보기 때문에 끊임없이 자신을 설명해야 한다. 우리는 '누구인가'라는 질문보다 '무엇을 하는가'라는 질문에 더 익숙하다. 우리는 순수한 관계 속에서 존재를 확인하는 것일까? 아니면 사회가 부여한 역할 속에서 자신을 증명하는 것일까? 이러한 질문은 레프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떠오르게 한다. 이반 일리치는 사회적으로 문제없는 삶을 살아왔다. 안정된 직업, 인정받는 위치, 여유 있는 생활. 그는 자신이 잘 살았다고 생각해 왔지만 병이 시작되고 시간이 흐르면서 자신의 삶을 다른 모습으로 보기 시작한다. 가족과 동료들은 그가 느끼는 고통을 진심으로 나누지 않고 각자의 일상을 유지한다. 고통이 깊어질수록 주변 사람들과는 점점 멀어져 가고 미워하기까지 한다. 그 거리감 속에서 그는 처음으로 자신의 삶을 다시 보게 된다. 나는 행복했었나? 내가 살아온 삶은 무엇이었나? 그리고 그것은 누구의 기준에서 만들어진 삶이었는가? 이반 일리치는 병을 통해 죽음을 마주하면서 살아온 삶에 대해 질문했다. 그가 느끼는 고통은 단순히 육체적 고통에서만 연유된 것이 아니라, 삶 전체에 대한 뒤늦은 자각에서 온 것이다. 그는 자신이 타인의 기준과 사회적 인정 속에서만 살아왔으므로 지나온 여정에는 '자기 자신'이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된다. 그가 진실이라고 믿어왔던 것들 '성공, 안정감, 타인의 인정'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통감한다. 죽음이 가까워질수록 진짜 삶을 찾게 된다. 그리고 임종 3시간 전, 아들의 눈물과 입맞춤을 느끼는 순간, 그는 비로소 가족을 향한 연민을 회복하며 죽음에 대한 인식을 바꾼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삶의 끝에서야 삶을 새롭게 보았다.
전쟁은 우리에게서 멀리 있지만 계속해서 우리의 시야를 스치면서 고통을 둔감하게 한다. 사회 안에서 우리는 사람을 이해하기보다 분류하는 데 더 익숙하다.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어디에 속해 있는지를 먼저 따져본다. 사람을 존재로 만나기보다 설명으로 먼저 정리한다. 전 세계의 전쟁과 불황, 혼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불확실한 미래로 인해 주어진 삶을, 유한한 삶을 생생하게 보내고 있는지 묻고 싶다. 정치도 경제도 선거도 우리 각 사람을 대신할 수 없다. 정치가 어떻든 경제가 어떻든 사람은 살아야 하며 생명력을 지녀야 한다. 타인의 기준과 사회의 편견에 사로잡혀, 마치 물건에 상표를 붙이듯 자신을 거래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사물에 이름을 붙이고 즐거워하는 사람들
이름을 붙여야 마음이 놓이는 사람들
이름으로 말하고 이름으로 듣는 사람들
이름을 두세 개씩 갖고 이름에 매여 사는 사람들
깊은 산(山)에 가고 싶다.
사람들은 산(山)을 다 어디에 두고 다닐까?
혹은 산(山)을 깎아 대체 무엇을 메웠을까?
신대철 < 추운산> 부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