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봉준의 서훈 [유레카]

길윤형 기자 2026. 4. 28. 1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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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교과서에 등장하는 가마 위에 처연히 앉은 전봉준(1855~1895)의 사진을 찍은 이는 메이지 시대 일본의 유명 사진기자인 무라카미 덴신이다.

이 광경을 묘사하는 '오사카마이니치신문'의 1895년 3월12일 3면 기사를 보면, 전봉준이 "총검 때문에 붕대를 감았고 안색과 손발이 창백해 병든 듯했지만 (중략) 눈빛은 예리하게 빛났다"는 구절을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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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교과서에 등장하는 가마 위에 처연히 앉은 전봉준(1855~1895)의 사진을 찍은 이는 메이지 시대 일본의 유명 사진기자인 무라카미 덴신이다. 이 광경을 묘사하는 ‘오사카마이니치신문’의 1895년 3월12일 3면 기사를 보면, 전봉준이 “총검 때문에 붕대를 감았고 안색과 손발이 창백해 병든 듯했지만 (중략) 눈빛은 예리하게 빛났다”는 구절을 찾을 수 있다. 전봉준은 4월23일 사형 판결을 받고 이튿날 새벽 2시께 교수됐다. 그러고 나서 벌써 131년이 흘렀다.

대한민국은 이 죽음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2004년 제정된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등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에 따르면, 전봉준의 법적 지위는 그저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일 뿐이다. 이 법은 1조에서 동학을 “봉건제도를 개혁하고 일제 침략으로부터 국권을 수호”하려는 것이라고 했지만, 더 나아간 평가를 삼가고 있다. 이런 어정쩡한 사정을 가장 명확히 보여주는 것이 전봉준 등을 ‘독립유공자’로 인정해달라는 요청에 대해 국가보훈처가 보여온 냉담한 태도다. 보훈처는 2006년부터 무려 다섯번이나 이 요청을 거부하고 있다.

물론, 조선이 아직 독립국일 때 발생한 동학을 ‘독립운동’으로 인정하는 것은 다소 어색한 게 사실이다. 이후 있었던 독립협회의 활동, 고종의 여러 개혁과 중립화 외교 등을 설명하기 힘들어지기 때문이다. 또 국권 침탈 시기를 10년이나 앞당긴다는 오해를 살 수도 있다.

하지만 놀랍게도 불과 1년 뒤인 1895년 발생한 을미의병 참여자 145명은 이미 독립운동자로 인정됐다. 결국 130여년의 시간이 흐르며 천지가 여러번 개벽했지만, 양반 유생이 벌인 을미의병과 평민 ‘무지랭이’들이 주도한 동학에 대한 ‘국가적 차별’이 어떤 이유에선지 이어지고 있다는 불편한 결론에 이르게 된다.

전봉준은 체포된 뒤 첫 심문(1895년 3월5일)에서 ‘왜 다시 기포(起包·동학의 봉기)했느냐’고 묻는 우치다 사다쓰치(1865~1942) 서울 영사에게 “귀국이 군사를 거느리고 우리 도성에 들어와 야반에 왕궁을 격파하여 주상을 놀라서 움직이게 하였기로 충군애국의 마음으로 의려(義旅·의병)를 규합”했다고 말했다. 우치다는 1895년 9월2일 동학에 대한 최종 보고서에서 “봉준은 일본 군대가 대궐을 침입하였다는 것을 듣고 일본군을 격퇴할 (중략) 목적으로 재차 거병을 도모하였다”고 적었다. 다음달 11일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동학혁명의 국가기념일 기념식이 열린다. 전봉준을 이대로 방치해도 되는 걸까.

길윤형 논설위원 charism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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