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 안의 우주를 믿으세요”…‘행복을 그리는 화가’의 다정한 슈퍼 파워 [인터뷰]
5월 1일 체험형 전시·7월 공연 개막
“뮤지컬은 내게도 새 언어로의 모험”
![스페인의 ‘행복을 그리는 화가’ 에바 알머슨 장장 1년 6개월 이상 작업한 첫 뮤지컬이 한국에서 최초로 막을 올린다. [두비컴 제공]](https://img2.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604/29/ned/20260429001939524hmxj.png)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경쾌하게 솟은 양 갈래머리, 발그레한 볼. 동그란 눈으로 동글동글한 미소를 짓는 소녀가 있다. 11살 리나. 자유분방함과 용기를 지닌 ‘삐삐 롱스타킹’을 빼닮은 리나는 조금 특별한 슈퍼 히어로다. 칼도, 방패도 들지 않고, 세상을 바꾼다. 머리 위로 살포시 얹은 화관처럼, 소녀의 무기는 ‘꽃’이다. 리나가 세상을 바꾸는 방식은 ‘공감’이다.
혐오와 분노가 일상이 된 시대. 이 작고 단단한 슈퍼 히어로는 무척이나 낯선 방식으로 괴물과 맞선다.
“괴물은 사실 괴물이 아니에요. 우리가 만들어낸 결과일 뿐이에요.”
스페인의 ‘행복을 그리는 화가’ 에바 알머슨은 최근 서울의 한 아틀리에에서 헤럴드경제와 만나 이렇게 말했다. 동그란 얼굴과 수줍은 미소를 띤 사람들의 얼굴을 그리며 전 세계에서 사랑받은 그가 한국에서 아주 특별한 실험을 진행한다. 장장 1년 9개월 이상 몰두해 한국에서 최초로 막을 올리는 뮤지컬 ‘리나, 슈퍼 히어로’(7월 개막)와 뮤지컬의 ‘체험형 전시’(5월 1일 개막, 한전아트센터)다.
네모난 캔버스 앞에 앉아 수많은 사람을 그려온 에바 알머슨에게 이번 프로젝트는 아주 특별한 도전이다. 캔버스 위에서만 살던 인물들에게 생명력을 불어넣는 것은 그에게 새로운 언어로의 ‘모험’이었기 때문이다.
에바 알머슨은 “제가 그린 캐릭터들이 실제로 살아 움직이며 춤추고 노래한다는 것이 꿈만 같은 일이었다”고 말했다.
이 호기로운 제안은 한국의 기획사에서 먼저 했다. 다른 나라에서도 소규모 프로젝트 제안은 더러 있었지만, 새로운 원고로 새로운 캐릭터를 창조해 뮤지컬과 전시를 병행한 대형 프로젝트를 진행한 것은 처음이었다. 알머슨은 “주저 없이 이 모험에 뛰어든 이유는 그들에 대한 깊은 신뢰 때문”이라며 “한국 제작진은 완벽한 전문가”라고 강조했다.
알머슨과 한국 관객의 만남은 특별하다. 2018년 예술의전당 전시에만 무려 40만 명이 넘게 찾았고, 전국 순회전은 누적 120만 명이 걸음했다. 그는 “한국에 올수록 마음이 커진다”며 “한국에선 상상도 못 했던 일들을 해낼 수 있다”고 말했다.
![스페인의 ‘행복을 그리는 화가’ 에바 알머슨 장장 1년 6개월 이상 작업한 첫 뮤지컬이 한국에서 세계 최초로 막을 올린다. [두비컴 제공]](https://img4.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604/29/ned/20260429001939956zfgw.jpg)
1년 6개월에 달하는 작업은 원고를 확정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했다. 알머슨은 주인공 리나를 먼저 그린 뒤, 다른 캐릭터의 디테일을 잡아갔다. 사실 리나는 작가 자신의 분신 같은 존재다. 어릴 적 동경한 ‘삐삐 롱스타킹’의 정신을 고스란히 투영했다.
뮤지컬의 중심에는 남매가 있다. 상상력 풍부한 소녀 리나와 쓰고 버리는 것에 익숙한 남동생 민호. 가족이 버린 장난감과 쓰레기가 어느 날 ‘괴물’이 되어 돌아오는 소년·소녀 명랑 히어로물이다. 핵심은 ‘리나의 대응 방식’이다. 리나는 싸우지 않는다. 칼을 휘두르거나 폭력을 쓰는 대신 ‘꽃’을 손에 든다.
“아이들 앞에 나타난 괴물은 우리의 행동이 만들어낸 결과물이에요. 이들을 물리치는 방법은 공격이 아니라 공감과 이해예요. 분노와 배제가 가득한 세상에서 다정함과 사랑으로도 충분히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할머니의 정원에서 배운 꽃을 대하는 방식, 즉 꽃의 ‘슈퍼파워’가 세상을 구하는 열쇠가 된 것이다. 알머슨은 “할머니라는 인물을 통해 어른이 아이들에게 가르칠 수 있는 지혜를 말하고 싶었다”며 “한국에선 어른들의 지혜가 중요시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어른의 지혜’가 작품의 중요한 포인트”라고 했다. 리나의 ‘정신적 지주’인 할머니 캐릭터는 90세까지 산 알머슨의 할머니를 모델로 했다.
“어릴 때 삐삐 롱스타킹 같은 캐릭터도 좋아했지만, 제게 가장 큰 히어로는 할머니셨어요.” 오래전 돌아가셨지만 그는 할머니를 또렷이 기억한다. “전쟁도 겪으셨고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이 어려운 상황에 부닥치기도 했지만, 한 번도 불평하시는 걸 들은 적이 없어요. 무엇이든 도전해 보라고 항상 말씀하셨죠.”
할머니에 대한 선명한 기억 중 하나는 쓰레기와 관련된 것이다. “할머니가 계셨던 자리에는 쓰레기가 하나도 없었어요. 플라스틱 봉지가 있으면 바로 재활용해서 쓰셨죠. 90세까지 그렇게 사셨어요.” 에바는 잠시 말을 멈췄다. “세대는 다르지만, 할머니는 제게 진짜 히어로셨어요.”
![스페인의 ‘행복을 그리는 화가’ 에바 알머슨 장장 1년 6개월 이상 작업한 첫 뮤지컬이 한국에서 세계 최초로 막을 올린다. [두비컴 제공]](https://img3.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604/29/ned/20260429001940338dhns.jpg)
뮤지컬을 관통하는 또 다른 핵심 메시지는 환경이다. 평소 기후위기와 환경에 관심이 많았던 알머슨은 리나와 민호의 여정을 통해 ‘지금 우리’의 이야기를 꺼낸다. 바다에서 플라스틱을 삼켜 괴물이 된 동물들을 만나고, 작은 쓰레기들이 강을 따라 흘러 정글에 쌓여 망가진 자연을 마주한다. 알머슨은 “우리가 한 작은 행동들이 어떤 결과를 낳는지를 희망의 관점에서 보여주고 싶었다”고 했다. 이야기는 교훈적 ‘환경 서사’를 넘어 세상을 바꾸는 변화의 시작이라는 점을 이야기한다.
이는 작가가 지난 2016년 제주 우도에서 만난 해녀들에게 배운 메시지다. 자연을 파괴하지 않고 필요한 만큼만 채취하며 공동체를 지켜나가는 해녀들의 삶은, 리나가 바다와 정글을 누비며 환경의 소중함을 깨닫는 여정과 결이 같다. 고희영 감독과 함께 펴낸 동화 ‘엄마는 해녀입니다’가 어쩌면 뮤지컬이 만들어간 서사의 첫 조각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문제의 일부이면서 동시에 해결의 일부예요. 미래는 지금 자라나는 아이들의 손에 달려 있고, 그들이 우리보다 훨씬 더 잘 이해할 수 있다고 믿어요.”
에바가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건 소심한 성격 때문이었다. 그는 “어릴 적 매우 소극적이었고, 감정을 잘 표현하지 못했다”고 했다. 소녀 알머슨의 인생을 바꾼 건 미술 선생님이었다. 선생님은 “네가 빈 종이에 그림을 그리겠다고 마음먹는 순간, 너만의 새로운 우주를 창조할 수 있다”고 알머슨에게 얘기하곤 했단다.
“그때부터 말이 아닌 그림으로 제 감정을 표현하는 방법을 알게 됐어요. 평생 그림을 그리고 싶다고 생각했죠.”
알머슨은 지금도 매일 10시간씩 작업실에서 고독과 싸우며 그림을 그린다. “그림은 현실을 멈추고 새로운 세상을 창조할 수 있는 슈퍼 파워”라고 믿기 때문이다.
![스페인의 ‘행복을 그리는 화가’ 에바 알머슨 장장 1년 6개월 이상 작업한 첫 뮤지컬이 한국에서 세계 최초로 막을 올린다. [두비컴 제공]](https://img4.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604/29/ned/20260429001940725hkqa.jpg)
캔버스 앞에 앉으면 알머슨은 몇 개의 단어를 먼저 적는다. ‘같이’, ‘신뢰’, ‘꿈’, ‘사랑’과 같은 단어들. 그런 다음 천진한 아이의 얼굴을 그린다. 사실 알머슨의 그림은 굳이 강조하려 하지 않아도 그의 인장과 같다. 인물마다 눈을 뜨거나 감았을 뿐, 비슷한 얼굴을 하고 있다. 복잡한 기교를 더하기보다 본질적 감정을 전달하기 위해 그림에서 덜어내는 작업에 집중했다.
그는 “단순하고 직접적으로 전달하는 것이 가장 어렵지만 선을 단순화할수록 상황과 감정에 더 풍부하게 몰입하게 됐다”며 “인물의 표정보다는 주변을 더 잘 살펴보게 하려는 의도도 있다. 자신의 주변을 조금 더 관심 있게 들여다보라는 것”이라고 귀띔했다. 알머슨이 그리는 사람들은 특정한 누군가가 아니라, 감정을 전달하는 통로인 것이다.
그는 “내 그림이 사랑받는 이유는 모른다”면서도 “보편적으로 사람들이 갖고 있는 감정들을 연결해 주는 게 아닐까 싶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어린 시절이 생각났다는 사람도, 빨리 지나가는 순간들 속에서 함께했던 중요한 순간들을 다시 추억한다는 사람도 있다”며 웃었다.
‘행복을 그리는 작가’로 불리지만, 정작 창작의 과정은 가볍지 않다. 그는 “항상 잘 되는 건 아니다”며 “수없이 실패하고 다시 찾는 과정의 연속”이라고 했다. 그럼에도 계속 그리는 이유는 분명하다. 알머슨은 “삶이 나를 계속 그리게 만든다”며 “그림을 그릴 때 가장 자유롭다. 어쩌면 그림이 내겐 슈퍼 파워였던 것 같다”고 했다.
알머슨의 프로젝트는 한국을 시작으로 세계 곳곳으로 확장한다. 아이들이 주인공인 뮤지컬이지만, 리나의 이야기는 어른들에게도 향한다.
“우린 모두 자기 안에 ‘작은 우주’를 가지고 있어요. 그건 나이가 들어도 사라지지 않죠. 세상을 바꿀 수 있는 힘은 누구에게나 있다고 믿어요. 어느 자리에 있든 모두가 슈퍼 히어로가 될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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