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호처분 시설 떠돌며 절규 “사랑받고 싶습니다! 사랑받고 싶어요!”

이문영 기자 2026. 4. 28. 0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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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은 자라서 우리가 된다 ③ 소년심판
‘수사 부담을 주지 않고 소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통고제도가 ‘다루기 힘든 아이들’을 시설 밖으로 내보내는 수단으로 활용되기도 한다. 게티이미지뱅크

1심 판결까지만 5년 걸린 아동학대 사건이 있다. 재판 내내 주목받지 못했고 선고 결과는 기사 한줄 나지 않았다. 아동학대는 드물지 않지만 ‘소년’이 자라 ‘우리’가 되기까지 한국 사회 난제들이 이토록 집약된 사건도 드물다. 아동의 몸을 노린 ‘불의한 정치’와 양육에 이식된 ‘수용’의 유전자, 학교와 낙인, 소년재판 시스템과 자립 지원의 사각, 가해와 피해를 보는 시선 등이 ‘판결문 밖’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해당 사건과 현재 시설 거주 아동들은 무관함을 밝힙니다.)

2017년 10월18일 ‘서울특별시 꿈나무마을’이 서울시에 공문을 보내 ‘아동 전원’을 요청했다. 의뢰 사유는 “서울가정법원 처분 결정”이었다.

그날 오전 법원은 친구에게 상해를 입힌 일로 소년재판을 받은 꿈나무마을 아동 백진형(가명·24)에게 1호(보호자나 보호자를 대신할 사람에게 위탁)와 5호(장기 보호관찰) 보호처분을 내렸다. 1호 처분에 따라 진형은 보호자인 ‘원시설’로 돌아가야 했으나 판사는 재단법인 ㄷ센터로 그를 보냈다. 진형을 받지 않겠다는 꿈나무마을의 입장 때문이었다. ‘불편한 아이’가 돌아오는 것을 원치 않는 시설에 재입소를 강제할 권한이 법원엔 없었다. 처분을 결정(법원)하고, 직접 양육(시설)하고, 아동을 배치(자치단체)하는 주체가 모두 달라 시설에서 거부된 소년이 지낼 곳을 잃고 ‘허공에 뜨는 일’이 자주 발생했다. 마리아수녀회에 꿈나무마을 운영을 위탁(☞1회 ‘양육에 이식된 수용’)한 서울시는 이틀 뒤 진형의 전원을 승인했다.

“나한텐 집인데.”

그날 이후 진형(당시 15)은 ‘귀가’하지 못했다. 종사자들에게 시설은 직장이지만 아이들에겐 “가정이자 고향”이었다. “가족인 친구들”도 모두 그곳에 있었다. 아이들이 “다른 시설로 보내지는 걸 가장 무서워하는” 까닭이었다. 꿈나무마을의 “전원 미희망 아동 강제 전원”은 서울시 감사에서도 지적(2017년 4월 ‘꿈나무마을 운영 개선 마스터플랜’)된 내용이었다. ㄷ센터에서 1호 처분 기간(6개월)을 채운 뒤에도 진형은 되돌아가지 못했다. “생활 아동들 간에 피해자가 있”(시설 쪽 재판 진술)고 그가 진형의 복귀를 원치 않는다는 이유였다. “(상해를 입은) 친구와 소년재판 전에 이미 화해했고 지금도 친하게 만나는” 진형은 “어떻게든 나를 받지 않으려는 핑계”라고 이해했다.

부모에게 버려진 아이는 “두번 버려지는 기분”이었다.

“두번 버려진” 아이

국내 소년재판 시스템의 ‘사각’은 진형의 시간에서도 고스란히 확인됐다. 통고 제도는 보호자·학교·사회복리시설·보호관찰소의 장이 경찰, 검찰 등 수사기관을 거치지 않고 직접 사건을 법원에 접수시키는 절차였다. “수사를 받게 하는 부담을 주지 않고 소년 문제를 해결”(대한민국 법원)한다는 취지였으나 당시 꿈나무마을에선 “지도하기 어려운 아이들에 대해 시설 차원에서 통고 신청을 많이”(상담사 김화진(가명) 재판 진술) 했다. “통고 처분이 아이들을 시설에서 내보내는 수단으로 활용”(공공기관 소년보호 정책 연구자)됐다. ‘우범소년’(형벌 법령에 저촉되는 행위를 할 우려가 있는 10살 이상 소년)으로 규정되면 “정당한 이유 없이 가출”(법원)만 해도 통고 대상이 될 수 있었다.

“지낼 곳이 없어 내가 가지고 있는 돈으로 주말엔 모텔과 사우나에서 지내야만 했다. (…) 밤마다 배가 고팠다. 나에겐 간식 먹을 돈조차 없었다.”(진형 일기)

‘집’을 잃은 아이는 ‘떠돌이’가 됐다.

1호 처분 종료(2018년 4월) 후 꿈나무마을로 돌아가지 못한 진형은 1년 뒤 ㄷ센터에서도 나와야 했다. ㄷ센터가 법원과 6호 처분(6개월 ‘수용’) 시설 업무협약을 맺으면서였다. 진형은 2019년 3월 보호종료 나이도 되지 않은 만 17살에 사회로 던져졌다. 보호종료 청년에게 주어지는 자립정착금(당시 500만원, 현재 지방자치단체별로 1000만~2000만원)과 자립수당(당시 월 30만원, 현재 50만원)도 받지 못했다. 낮엔 교육원에서 헤어 기술을 배우고 밤엔 모텔, 사우나, 꿈나무마을 선배들의 집을 옮겨 다니며 잤다. “너무 힘들었”다.

“위 아동과 관련 물품을 정히 인수합니다.”

손영조(가명·25)는 2016년 6월 말 6호 시설 ㅅ센터에 ‘인수’됐다. 아동카드와 주민등록등본, 전입신고서 등 “물품”이 영조와 함께 “인수증”에 기록됐다.

마리요셉반 보육사의 학대에 반발하며 가출 혹은 탈출(☞2회 ‘밖이 알려준 것’)을 반복하던 영조도 15살 이후 ‘집’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그해 4월 소년분류심사원(판사가 필요하다고 판단해 소년을 보내면 성장환경·성격·자질 등을 평가해 재판 참고 자료로 송부)을 거쳐 보호관찰 처분을 받고 돌아온 꿈나무마을에서 영조는 별도의 반에 혼자 격리됐다. 심사원에 갇혀 있던 영조는 ‘집’에서까지 격리되자 “내보내주지 않으면 뛰어내리겠다”며 몸부림(당시 담당 보육사 “심사원에 갔다 온 아이들은 피부질환이 걸려 오는 경우가 많아 치료 위해 격리”)쳤다. 그 반에서 나와 다시 가출했다.

도움 청할 어른 한명 없이 거리로 뛰쳐나간 영조의 삶은 ‘악화 일로’였다. 배고픔을 못 견뎌 음식 등을 훔치다 경찰 조사와 소년재판을 받았다. 거듭될수록 보호처분 수위도 높아졌다.

ㅅ센터(서울 영등포)에 ‘인수’됐을 때 영조는 중학교 3학년이었다. 그곳에서도 ‘처분 명령’(다른 시설로 전원 조처)을 받고 대전의 6호 시설 ㅎ사회복지법인으로 보내졌다. “고아란 사실을 안 형들한테 놀림을 많이 받았”다. 어리고 몸집도 작았던 그는 “고아가 내 잘못도 아닌데 놀림까지 받자 억울해서 울었”다.

ㅎ시설에 있을 때 마리요셉반 보육사 정규성(가명·30)이 영조를 찾아왔다. 영조와 생활반 아이들을 폭행한 일로 형사처벌을 앞둔 그가 처벌불원서를 써달라고 했다. “다시 만나면 복수하겠다”며 운동으로 몸을 단련했던 영조는 정작 그와 “마주치자 몸이 굳어버렸”다. “자동 반사로 위축돼 별다른 대꾸도 못 하고 써달라는 대로 써줬”다.

6호 처분 종료 뒤 영조도 꿈나무마을로 돌아가지 못했다. 갈 곳 없던 그는 전북 전주의 ㅊ시설(소년원에서 퇴소했거나 보호관찰 중인 무의탁 청소년들 보호시설)로 보내졌다. “ㅎ에 같이 있던 애들은 부모님과 집에 가는데 나만 다른 시설로 가야 했던” 영조는 “너무 서러웠”다. 그는 ㅊ에서도 가출했다. 잠잘 곳이 없어 가출팸 등을 떠돌며 ‘또래들은 겪을 일 없는 험한 일들’을 통과했다.

재위탁된 소년분류심사원에선 화장실 청소를 하지 않는 아이를 때려 독방에 갇혔다. “잘못하면 맞는 게 당연했던 꿈나무마을에서처럼” 영조도 때렸다. “나도 내가 이상하게 느낄 만큼” 그때의 영조는 “아무것도 아닌 일에 분노가 치밀었”다. “약해 보일수록 괴롭힘을 당했던 경험” 탓에 “살아남으려면 세져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렸다. 독방엔 “텔레비전도 없고 책도 없었”다. 반성문 공책을 찢어 뭉친 종이를 물컵을 향해 던졌다. 하루 종일 ‘골인’에 몰두하며 “정신병 걸릴 것 같은 시간”을 견뎠다.

영조는 두번째 소년재판에서 10호 처분(장기 소년원 송치)을 받았다. 서울과 광주의 소년원에서 16개월을 살았다. 그새 덩치가 커진 그를 “아무도 건드리지 않았”다. 소년원에서 나왔을 때도 지낼 곳은 없었다. 전주의 ㅊ으로 또다시 보내졌고 또다시 “너무 서러웠”다. 19살에 ㅊ을 퇴소했을 때 영조도 자립정착금을 받지 못했다. ‘아동양육시설·공동생활가정·위탁가정에서 보호 종료된 경우’로 지급 대상이 제한(2024년 요건 완화)된 탓이었고 ㅊ은 그 어디에도 해당하지 않았다. 학력도 중학교에서 멈췄다. ‘능력’이란 이름의 ‘공정’이 지배 이념인 사회에서 영조는 처음부터 알몸이었다.

“배고프고 외로운 일.”

당시 영조에게 산다는 것의 의미는 그랬다. 21살에 모텔 방을 잡고 번개탄을 피웠다. 수면제를 먹기 전 마지막으로 통화한 꿈나무마을 출신 형이 눈치채고 경찰에 신고했다. 경찰이 휴대전화 위치추적으로 모텔 문을 따고 들어와 그를 살렸다.

영조의 시간은 함께 소송을 진행한 진형과 안종표(가명·24)에게조차 “하드코어”였다. 이제 25살이 된 그는 지난 삶을 이렇게 정리했다.

“내 인생은 늘 똑같았다. 시설을 나가면 춥고 배고팠고 시설에 들어가면 맞았다. 해결 방법이 없어 더 절망했다. 내가 원한 것은 폭력이 아니라 내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었다. 나는 맞을수록 엇나갔다. 감정 조절이 힘들었다. 갑자기 화가 나거나 갑자기 슬픔으로 곤두박질쳤다. 결핍이 컸다. 중학생 땐 특히 심했다. 학교 친구 집에 놀러 가면 엄마가 밥 차려 주는 모습이 너무 부러웠다. 중학교 상담실에서 상담을 많이 했다. 상담 선생님이 ‘뭐가 힘드냐’고 물었다. 시설에서 해주길 바랐던 그 질문을 학교에서 받을 때마다 나는 대답했다. 사랑받고 싶습니다! 사랑받고 싶어요! 사랑이 필요해요!”

마지막 피해자들의 첫 피해 선언

박인숙 변호사(청년법률사무소)는 놀랐다.

“왜 태어났는지 모르겠어요. 태어나지 않았다면 좋았을 텐데. 태어난 것 자체가 너무 고통이에요.”

진형이 그 말을 했을 때 박인숙은 17살의 입에서 들을 말이라곤 예상하지 못했다. 그는 소년 사건에 관심을 갖고 활동해온 법률가였다. 사법연수원 1년차 때부터 서울소년원에서 자원봉사를 하며 원생들의 검정고시 준비를 도왔다. 2015학년도 수능에 응시한 그들은 소년원 안에서 시험을 본 첫 사례가 됐다. 국선보조인 역할도 맡았다. 그 과정에서 사건 소년들이 처한 환경을 알 수 있었다. “아무리 힘들어도 마음만 단단히 먹으면 이겨낼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현실의 아이들을 만나고부턴 ‘저 환경에서 저 정도 살아낸 것도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2019년 박인숙은 한 보호처분 시설에서 곤혹스러운 처지에 놓인 청소년을 돕고 있었다. 그 청소년이 자신의 증인으로 데려온 친구가 진형이었다. 문제를 해결한 박인숙은 진형의 떼인 알바비도 받아 줬다. 거처 없이 친구 집에 얹혀살며 새벽부터 밤늦도록 미용실에서 일하던 진형이 어느 날 말했다.

“변호사님, 제 소송도 해주세요.”

“소송이 말처럼 쉬운 게 아니”라고 말렸지만, 진형은 “내 삶이 너무 억울하다”고 했다. 그가 “학대”라는 단어로 자신의 지난 시간을 들려줬다. 박인숙이 이번엔 진형에게 “네 상황을 입증해줄 증인을 찾아오라”고 했다. 진형이 데려온 증인이 종표였다. 꿈나무마을 ‘요한반’에서 함께 폭행과 학대를 당한 종표도 “소송에 참여하겠다”고 했다. 진형과 종표가 “우리보다 더 불쌍한 애가 있다”고 했다. 전주의 ㅊ시설에서 퇴소하지도 못하고 있던 영조(“내 수급비를 시설이 계속 받기 위해 보호종료 나이가 됐는데도 붙잡아뒀다”)였다. 박인숙이 지낼 곳을 물색한 뒤 영조를 데리고 나왔다. 영조도 소송 원고가 됐다.

청년이 된 세 친구가 아동·청소년 시기의 학대를 두고 뒤늦은 소송에 나선 데는 “이젠 극복하고 싶다”(종표)는 바람도 있었다.

“언제까지나 트라우마 속에 나를 방치할 순 없으니까. 이젠 한걸음이라도 내디뎌야 하니까.”

2021년 종표(7월)와 진형·영조(8월)는 박인숙을 소송대리인으로 손해배상을 청구했다. 상대는 꿈나무마을 보육사 6명과 시설 운영자 마리아수녀회(2019년 12월31일 서울시 위탁 종료)였다.

원고들은 ‘국가 부랑아 수용 정책’에서 출발한 아동양육시설의 마지막 피해자였다. “보호만 해줘도 고마워해야 했던 위치를 벗어나 피해자로 자기 선언한 첫번째 아이들”(이미경 은평구의원)이기도 했다.(4회 ‘피해와 가해 사이에서’ 계속)

이문영 기자 moon0@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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