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줄 알고 낸 유고 시집… 천상병 “88세까지 산다” 했지만
1993년 4월 28일 63세

시인 천상병(1930~1993)은 생전에 유고 시집을 냈다. 1971년 12월 동료 문인들이 그의 시를 모아 시집 ‘새’를 출간했다. 폭음과 지병으로 원체 건강이 좋지 않았던 그가 “지난 여름부터 소재를 알 수 없어” 죽었을 것이라고 여겼다.
“시집 ‘새’는 46배판 126페이지의 호화 장정으로 출간됐다. 송영택씨가 추진, 성춘복씨가 사재를 내놓고 이형기 박재삼 김구용 정인영씨 등이 힘을 합쳐 나오게 됐다. 의사로부터 한두 달밖에 더 살 수 없다는 선언을 받을 정도로 병과 가난에 짓눌렸던 때문에 ‘유고집’이 될지도 모르는 시집.”(1971년 12월 30일 자 조간 5면)

천상병은 5개월 만에 소재가 파악됐다. 서울 한 정신병원에 ‘행려병자’로 입원 중이었다.
“‘새’가 날아왔다. 어디로 날아갔는지 어느 하늘가에서 외롭게 숨졌는지 5개월 동안 잠적했던 ‘새’의 시인 천상병(41)씨가 병상 위에 나타났다. 서울 서대문구 응암동 시립 정신병원 1병동 2층에서 간호원이 꽂아준 링게르만으로 병든 몸을 달래며 외부인의 접근이 허용되지 않은 병실에 누워있는 천씨의 병명은 ‘알코홀에 의한 정신적 황폐증’-. (…) 지난해8월 성북동에서 기진맥진한 행려병자로 발견, 정신병원에 넘겨졌으나 모두들 그가 시인이며 평론가인 줄은 몰랐다. 담당 의사만이 그를 알고 있었다. “아무래도 듣던 이름”이라며 그의 신분을 캐기 시작했다.”(1972년 1월 13일 자 조간 7면)

천상병은 1949년 마산중학 재학 때 등단했다. 1951년 서울대 상대에 입학한 그는 1950년대 문학 평론가로도 이름을 알렸다. 조선일보에 쓴 문학 평론 ‘현대시에 있어서 지성의 한정성(限定性)’(1956년 8월 27~29일 3회), ‘현대시의 리리시즘 문제’(1957년 12월 17일)는 날카로운 분석과 유려한 문체가 돋보이는 글이다.
“김춘수 처녀시집 ‘구름과 장미’를 전후한 김춘수와 그의 제삼시집 ‘기(旗)’나 넷째 번인 ‘인인(隣人)’을 전후로 한 최근의 김춘수 사이에는 너무나 큰 차이가 있다. ‘구름과 장미’는 그 다음의 ‘늪’과 함께 김춘수의 재래 전통과의 연속성을 명시하였으나 ‘기(旗)’에 와서부터는 불연속성을 드러내었다. 그의 이 변모는 다른 어느 전후(戰後) 시인보다도 선명하게 나타나고 정확하게 그 다음에 필연적으로 연발(連發)하는 결과를 가르치고 있다.(…)”(1956년 8월 28일자 석간 4면)

천상병은 수필(1958년 7월 14일자 ‘성염(盛炎) 도래’)과 시(1958년 9월 23일자 ‘제야(除夜)’)도 조선일보에 기고하며 활발하게 활동했다.
1967년 동백림 사건은 인생 최대 전환점이었다. 한국 유학생이 동베를린 북한 대사관과 평양에 오가며 북의 지시를 받는 간첩 일을 했다는 사건이다. 천상병은 사실을 알고도 친구를 고발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6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행려병자가 될 정도로 피폐했던 시인은 유고 시집 ‘새’가 나온 직후 평생 반려자를 만났다. 아내 목순옥과 만나 “불우를 떨치고 자리잡힌 모습”을 보였다. 아내의 자수 작품과 함께 ‘시화 자수전’도 열었다. 부인 목순옥씨는 1985년 서울 인사동에 찻집 ‘귀천’을 차리고 생계를 책임졌다.

“‘실종’ 소문 등으로 불우했던 시인 천상병씨가 결혼으로 자리를 잡아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14~18일 국립중앙공보관(덕수궁 옆)에서 열리고 있는 천상병·목순옥 부부 시화 자수전에서 살이 찐 모습으로 단정하게 아내와 웃음을 지으면서 손님을 맞았다. (…) “요즘은 건강도 좋아졌고 시도 많이 쓰고 있다”고 다정스레 남편을 쳐다보며 아내가 웃자 ‘그 말이 맞는다’는 듯이 덩달아 웃음을 지어 보이며 고개를 끄덕이는 부부의 모습.”(1972년 12월 17일 자 조간 5면)

천상병은 1979년 시집 ‘주막에서’, 1984년 ‘천상병은 천상 시인이다’, 1991년 ‘요놈! 요놈! 요 이쁜 놈’, 1989년 산문집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등을 냈다. 출간 때마다 기사가 실렸다.
‘병든 몸으로 부른 영혼의 노래’(1979년 5월 15일 자 5면), ‘단칸방 지키며 소년 같은 시심’(1985년 4월 30일 자), ‘중병 이긴 기행(奇行) 시인’(1989년 1월 27일 자), ‘삶 달관한 때 묻지 않은 마음 담아’(1991년 7월 13일 자 13면)처럼 병을 이기고 소년 같은 순수한 마음을 노래한 시인으로 소개됐다.
1971년 ‘생전 유고 시집’은 21년 지난 1992년 다시 출간됐다.

“생존 시인의 유고 시집(?)이 출간된 지 20여 년 만에 원형 그대로 재출간됐다. 10일 오후 5시 인사동 누님손국수집에서는 한국 문단사에서 앞으로 두 번 다시 있을 법하지 않은 출판 기념회가 열렸다. 이날의 주인공은 ‘우리 시대의 마지막 순수 시인’으로 불리는 천상병(62)씨. 지난 70년 가을, 주민등록증도 없던 천씨가 실종된 지 1년이 넘도록 소식이 없자 객사했을 것으로 짐작하고 가까운 시인들이 주머니 돈을 털어 펴낸 유고 시집 ‘새’. 천씨는 이 시집의 새 판본을 손에 들고 “최소한 미수(米壽=88세)까지는 살 수 있다”고 의기양양하게 외치고 있었다. 시인 박재삼, 민영, 소설가 천승세, 이외수, 민속학자 심우성씨, 화가 중광 스님 등 50여 명의 문인·문화계 인사·독자들이 참석, 서울대 상대를 다니다 문단의 괴짜 시인이 된 천씨의 ‘환생’ 21주년을 축하했다.”(1992년 10월 11일 자 18면)

출판 기념회에서 “88세까지 살겠다”던 천상병은 6개월 후인 1993년 4월 28일 별세했다.
“천 시인은 이날 오전 11시쯤 집에서 아침 식사를 하던 중 갑자기 목이 막혀 물을 마시다가 방바닥에 쓰러져 의정부의료원으로 긴급 후송됐으나, 이미 숨을 거둔 상태였다. 천 시인은 87년부터 간경화 증세를 보여왔으며 88년 1월부터 같은 해 5월까지 강원도 춘천시 춘천의료원에서 입원 치료를 받아오다 최근 병이 악화돼 의정부 자택에서 칩거해왔다.”(1993년 4월 29일 자 30면)

화가 김병종 서울대 교수는 ‘화첩 기행’ 시리즈에서 천상병의 장례식 이후 벌어진 동화처럼 아름답고 슬픈 이야기를 소개했다.
“가난했던 한 시인이 천국으로 떠났다. 조의금이 몇백 걷혔다. 생전에 그렇게 ‘큰돈’을 만져본 적 없는 시인의 장모는 가슴이 뛰었다. 이 큰돈을 어디다 숨길까. 퍼뜩 떠오른 것이 아궁이였다. 거기라면 도둑이 든다 해도 찾아낼 수 없을 터였다. 노인은 돈을 신문지에 잘 싸서 아궁이 깊숙이 숨기고서야 편한 잠을 잘 수 있었다.

그러나 다음 날 아침, 시인의 아내는 하늘나라로 간 남편이 추울 거라는 생각에 그 아궁이에 불을 넣었다. 타오르는 불길 속에 푸르스름한 빛이 이상했다. 땔나무 불빛 사이로 배추 이파리 같은 것들이 팔랑거리고 있었다. 조의금은 그렇게 불타버렸다. 다행히 타다 남은 돈을 은행에서 새 돈으로 바꾸어주어, 그 돈을 먼저 떠난 시인이 ‘엄마야’라며 따르던 팔순의 장모님 장례비로 남겨둘 수 있게 되었다. 시인은 늘 ‘엄마’의 장례비를 걱정했기 때문이다.
이 슬픈 동화 같은 이야기는 시인 천상병가(家)의 이야기이다. 평생 돈의 셈법이 어둡고 돈으로부터 자유로왔던 시인이었다.”(1998년 12월 21일 자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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