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의 향기] 초록에 빨강

광주일보 2026. 4. 28. 0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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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향남 수필가
자연이라는 거대한 미술관에 들어설 때 우리의 시선이 맨 먼저 머무는 곳은 초록이라는 광활한 캔버스다. 초록은 원시의 생명력과 끊임없는 성장, 그리고 깊은 평온을 품고 있다. 잎사귀의 섬세한 엽맥에서 울창한 숲의 푸르름까지, 초록은 긴장을 풀어내고 마음을 낮추며 존재를 지탱하는 가장 근원적인 바탕이 된다.

이 고요한 무대 위에 자연은 계절마다 새로운 색을 입힌다. 그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색은 빨강이다. 초록이 시선을 붙들어 머물게 한다면 빨강은 그 적막을 깨우며 단숨에 감각의 중심으로 파고든다. 두 색은 서로를 밀어내지 않는다. 오히려 서로를 더 선명하게 받쳐준다. 그래서일까, 초록과 빨강의 만남은 언제나 하나의 사건처럼 기억된다.

그 시작은 봄날의 앵두에서 비롯된다. 연초록 잎사귀 사이로 맺힌 붉은 열매는 마치 빛이 응결된 보석들처럼 보였다. 싱그러운 초록의 품속에서 투명한 붉음이 폭발하듯 퍼질 때 그것은 마치 봄의 끝자락에 당도한 환희의 일성처럼 느껴졌다. 눈이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생명의 첫 결실을 목도한 듯 입안 가득 침이 고였다.

봄의 빨강이 가볍고 투명한 환희라면 여름으로 기울수록 빨강은 점점 더 밀도와 무게를 얻는다. 무르익은 초록 사이에서 장미는 타오르는 불꽃처럼 피어난다. 앵두가 생의 첫 웃음이라면 장미는 생의 한가운데서 터져 나오는 절정의 언어다. 주변의 초록은 그 격렬함을 억누르기보다 오히려 단단하게 떠받친다. 초록을 뒷배 삼아 장미는 가장 또렷한 색으로 제 존재를 알린다. 장미 한 송이는 단순한 꽃이 아니라 오래 축적된 인내가 마침내 형태를 얻은 가장 뜨거운 침묵의 결정체다.

앞날이 전혀 보이지 않던 계절이 있었다. 어디로도 나아가지 못한 채 이력서만 매만지던 밤들. 나는 초조와 우울과 번민을 뒤집어쓴 채 매일 같은 길을 걸었다. 그러던 어느 날, 담장 가득 피어난 장미를 보았다. 숨이 막힐 듯 붉디붉은 군락이었다. 집안 화단에도 같은 빛깔 불꽃이 피어 있었다. 나는 그 붉음 속으로 내 남루한 시간을 던져버리고 싶었다. 고여 있는 정적 대신 단 한 번의 강렬한 발화가 차라리 정직한 마침표처럼 다가왔던 터였다.

그러나 뒤늦게 알게 되는 순간이 있었다. 장미의 붉음은 자신을 태우는 소멸의 불꽃이 아니라 뿌리 깊은 곳에서 끌어올린 생명력의 응축이라는 것을. 그 뜨거움이 흩어지지 않도록 붙들어 준 것은 언제나 곁에 있던 초록의 시간이라는 것을…. 초록은 정지된 배경이 아니었다. 그것은 매일 빛을 받아들이고 수분을 끌어올리는 치열한 노동의 현장이었다. 내가 부정하고 싶었던 그 무채색의 날들 역시 내 안의 어떤 붉음을 준비하는 과정이었음을 이제야 조금 헤아리게 된 것인가.

계절이 더 깊어지면 붉음은 또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호랑가시나무는 잎도 열매도 겨울에 더 창창하다. 진초록 사이의 붉은 열매는 차가운 공기 속에서도 끝내 빛을 잃지 않고 쟁쟁한 활력을 뿜어낸다. 동백은 설한 속에서도 핀다. 짙은 녹음이 겨울의 고독을 견뎌내는 동안 그 끝단에서 솟아오른 붉은 송이는 생의 순환을 보여주는 또렷한 증거다. 초록이 견딤과 지속의 힘이라면 빨강은 그 위에 새겨진 존재의 표식이라고 할까.

초록에 빨강. 자연이 설계한 이 보색의 조화는 색채의 대비를 넘어 삶의 원리를 드러낸다. 초록의 평온이 없다면 빨강의 열정은 금세 타버리는 광기에 불과할 것이고 빨강의 발산이 없다면 초록의 평화는 정체된 권태에 머물고 말 것이다. 우리는 흔히 빨강(꽃)의 순간만을 생의 절정이라 여기지만 정작 그 붉음을 빛나게 하는 것은 이름 없는 수만 개의 초록 잎사귀들이 감내하는 일상적인 시간이다. 아름다움이란 어느 한 색의 승리가 아니라 서로 다른 에너지가 균형을 이루며 만들어내는 긴장된 조화다.

지금, 동백 한 송이가 툭, 제 몸을 떨군다. 맵찬 비바람 속에도 묵묵히 서 있는 녹색 울타리 위. 꽃송이는 아직 윤기를 잃지 않았고 노란 꽃술은 여전히 따뜻한 숨을 품은 듯 단정하고 해사하다. 사뭇 고아하고 기품 있는 품새다. 고요 속에도 식지 않는 열기, 침묵 속에도 자라나는 생의 맥박 같다. 어쩌면 우리의 삶 또한 그러하지 않을까? 초록이라는 일상의 바탕 위에 때때로 붉은 점을 찍으며 완성되어 가는 하나의 긴 이야기.

/김향남 hyang11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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