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의 향기] 초록에 빨강

이 고요한 무대 위에 자연은 계절마다 새로운 색을 입힌다. 그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색은 빨강이다. 초록이 시선을 붙들어 머물게 한다면 빨강은 그 적막을 깨우며 단숨에 감각의 중심으로 파고든다. 두 색은 서로를 밀어내지 않는다. 오히려 서로를 더 선명하게 받쳐준다. 그래서일까, 초록과 빨강의 만남은 언제나 하나의 사건처럼 기억된다.
그 시작은 봄날의 앵두에서 비롯된다. 연초록 잎사귀 사이로 맺힌 붉은 열매는 마치 빛이 응결된 보석들처럼 보였다. 싱그러운 초록의 품속에서 투명한 붉음이 폭발하듯 퍼질 때 그것은 마치 봄의 끝자락에 당도한 환희의 일성처럼 느껴졌다. 눈이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생명의 첫 결실을 목도한 듯 입안 가득 침이 고였다.
봄의 빨강이 가볍고 투명한 환희라면 여름으로 기울수록 빨강은 점점 더 밀도와 무게를 얻는다. 무르익은 초록 사이에서 장미는 타오르는 불꽃처럼 피어난다. 앵두가 생의 첫 웃음이라면 장미는 생의 한가운데서 터져 나오는 절정의 언어다. 주변의 초록은 그 격렬함을 억누르기보다 오히려 단단하게 떠받친다. 초록을 뒷배 삼아 장미는 가장 또렷한 색으로 제 존재를 알린다. 장미 한 송이는 단순한 꽃이 아니라 오래 축적된 인내가 마침내 형태를 얻은 가장 뜨거운 침묵의 결정체다.
앞날이 전혀 보이지 않던 계절이 있었다. 어디로도 나아가지 못한 채 이력서만 매만지던 밤들. 나는 초조와 우울과 번민을 뒤집어쓴 채 매일 같은 길을 걸었다. 그러던 어느 날, 담장 가득 피어난 장미를 보았다. 숨이 막힐 듯 붉디붉은 군락이었다. 집안 화단에도 같은 빛깔 불꽃이 피어 있었다. 나는 그 붉음 속으로 내 남루한 시간을 던져버리고 싶었다. 고여 있는 정적 대신 단 한 번의 강렬한 발화가 차라리 정직한 마침표처럼 다가왔던 터였다.
그러나 뒤늦게 알게 되는 순간이 있었다. 장미의 붉음은 자신을 태우는 소멸의 불꽃이 아니라 뿌리 깊은 곳에서 끌어올린 생명력의 응축이라는 것을. 그 뜨거움이 흩어지지 않도록 붙들어 준 것은 언제나 곁에 있던 초록의 시간이라는 것을…. 초록은 정지된 배경이 아니었다. 그것은 매일 빛을 받아들이고 수분을 끌어올리는 치열한 노동의 현장이었다. 내가 부정하고 싶었던 그 무채색의 날들 역시 내 안의 어떤 붉음을 준비하는 과정이었음을 이제야 조금 헤아리게 된 것인가.
계절이 더 깊어지면 붉음은 또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호랑가시나무는 잎도 열매도 겨울에 더 창창하다. 진초록 사이의 붉은 열매는 차가운 공기 속에서도 끝내 빛을 잃지 않고 쟁쟁한 활력을 뿜어낸다. 동백은 설한 속에서도 핀다. 짙은 녹음이 겨울의 고독을 견뎌내는 동안 그 끝단에서 솟아오른 붉은 송이는 생의 순환을 보여주는 또렷한 증거다. 초록이 견딤과 지속의 힘이라면 빨강은 그 위에 새겨진 존재의 표식이라고 할까.
초록에 빨강. 자연이 설계한 이 보색의 조화는 색채의 대비를 넘어 삶의 원리를 드러낸다. 초록의 평온이 없다면 빨강의 열정은 금세 타버리는 광기에 불과할 것이고 빨강의 발산이 없다면 초록의 평화는 정체된 권태에 머물고 말 것이다. 우리는 흔히 빨강(꽃)의 순간만을 생의 절정이라 여기지만 정작 그 붉음을 빛나게 하는 것은 이름 없는 수만 개의 초록 잎사귀들이 감내하는 일상적인 시간이다. 아름다움이란 어느 한 색의 승리가 아니라 서로 다른 에너지가 균형을 이루며 만들어내는 긴장된 조화다.
지금, 동백 한 송이가 툭, 제 몸을 떨군다. 맵찬 비바람 속에도 묵묵히 서 있는 녹색 울타리 위. 꽃송이는 아직 윤기를 잃지 않았고 노란 꽃술은 여전히 따뜻한 숨을 품은 듯 단정하고 해사하다. 사뭇 고아하고 기품 있는 품새다. 고요 속에도 식지 않는 열기, 침묵 속에도 자라나는 생의 맥박 같다. 어쩌면 우리의 삶 또한 그러하지 않을까? 초록이라는 일상의 바탕 위에 때때로 붉은 점을 찍으며 완성되어 가는 하나의 긴 이야기.
/김향남 hyang11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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