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사일언] 말하지 말고 함께 느껴 보세요

고선규 임상심리학 박사·'슬픔이 서툰 사람들' 저자 2026. 4. 28. 0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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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적당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아요”. 감당하기 힘든 고통을 겪은 이들에게 말은 언제나 부족하다. 애써 말을 입 밖으로 꺼내자마자 의도와 어긋나는 경험을 반복하다 보면, 어느 순간 말을 삼키고 경험의 문을 닫아버린다.

리움 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티노 세갈 전’은 작품이 남지 않는 전시다. 전시 해설도, 안내 책자도 없다. 작가가 ‘해석자’라 지칭하는 퍼포머들의 움직임과 소리를 마주하는 오직 순간적 경험만 존재한다. 해석자와 관람객 사이의 물리적 경계도 모호하다. 어떤 해석자는 관람객에게 불쑥 말을 걸기도 하고, 나지막이 노래를 들려주기도 한다. 짝을 지은 두세 명의 해석자들은 슬로우 모션으로 움직이는 섬세한 몸짓을 주고받기도 하고, 서로의 흥얼거림에 음의 높낮이와 속도를 맞춰 메아리처럼 응답하기도 한다. 모든 움직임과 소리가 즉흥적이면서도 자연스럽게 흘러간다.

흥미로운 광경을 기록하고 싶은 압박에 못 이긴 관람객들은 휴대 전화를 만지작거리지만, 해석자의 모든 움직임을 기록으로 남기는 것은 금지되어 있다. 나는 꽤 오랫동안 그 공간에 머물렀다. 끊임없이 작품의 의도와 의미를 분석하려 애썼지만, 해석자의 움직임에 몰입할수록 해석의 틀은 사라졌다. 대신 내 눈앞에서 끊임없이 생동하는 존재가 선명하게 들어왔다. 그가 빚어내는 감각의 파동에 내 몸과 마음이 반응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고통을 겪은 이들에게 적확한 위로의 말을 하고 싶어 한다. 그들의 상처를 건드리지 않는 최선의 아름다운 말. 하지만 우리가 겨우 할 수 있는 최선은, 그들이 온몸에 각인된 고통을 충분히 느끼고 표현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이러한 고민에 나는 5월 ‘듣는 애도, 살롱 음악회’를 기획했다.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이들에게 말 대신 피아노 선율을 건네려 한다. 바흐와 베토벤, 슈만과 브람스가 이미 만든 상실과 애도의 아름다운 선율을 따라 내면의 슬픔을 응시해보는 시간이 될 것이다. 감각은 언제나 말보다 먼저 도착한다. 기록되지 않아 감각에 집중할 수 있었던 티노 세갈 전의 경험처럼, 음악이 감각의 문을 열어 우리를 연결해 줄 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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