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직히 흐르는 강물을 닮은 사람, 묵묵히 지역을 지키는 사람 [김석환의 남강을 다시 읽다]

김석환 박사·지식 큐레이터 2026. 4. 27. 1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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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환의 남강을 다시 읽다
(48) 통도사와 문재인
영축산은 태백산맥의 남쪽 끝자락인 영남 알프스 고봉 군 가운데서도 가장 아래에 있다. 영축산은 남쪽으로 물길을 내어 양산천을 만든다.
양산 구름다리에서 바라보는 양산천. /김석환

양산천은 신라와 가야의 국경선이었던 황산 나루 아래쪽에서 낙동강으로 흘러든다. 양산천의 상류는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통도사의 계곡이다.

통도사로 가는 무풍한송로 숲길 주변 바위에는 1900개 이상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양반, 관료, 거부, 친일매국노, 일본인, 스님, 기생 등 영욕의 이름들이 새겨져 근현대사를 증언하고 있다. 고종의 압송 지시를 무시하고 동학군 지도자 김개남을 현장에서 처형한 이도재, 개화파였다가 친일파로 돌아선 박영효, 을사오적 이근택, 동래부사로 종두법을 보급한 지석영, 일제강점기 부산의 3대 부자로 불렸던 후쿠다 소베(福田增兵衛) 등의 이름이 보인다. 평양, 창원, 밀양, 김해, 김천, 경주 출신 기생도 권세가나 부자를 따라와 바위에 이름을 남겼다.
통도사 각자 바위 글씨. /김석환
이들이 통도사 계곡에서 연회를 벌이거나, 바위에 이름을 새기는 비용은 누가 댔을까? 기록에는 없지만, 통도사가 대부분 부담했을 것이다. 양반이나 관료들이 자신의 비용으로 회식을 하는 경우는 당시에도 없었고 지금도 드물다. 통도사는 부자 절이었고, 승려는 마구 부려도 되는 천한 계층이라는 것이 조선 사대부의 생각이었다. 이렇게 수탈 대상이 되어온 통도사가 구한말 개화의 산실이 된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통도사는 개화승 이동인이 출가한 곳이기도 하고, 만해 한용운도 통도사의 지원을 받아 <불교대전(佛敎大典)>을 썼다. 통도사는 임시정부와 안희제의 백산상회에도 경제적 지원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통도사 대웅전. /김석환

통도사 입구에서 옆길을 따라 올라가면 평산마을에 이른다. 문재인 전 대통령 사저가 있는 마을이다. 문재인은 이북 피난민의 아들이다. 1950년 12월 10만 명 이상의 민간인이 중공군의 포위망을 뚫고 함경남도 흥남항에서 배를 타고 철수를 했다. 피난민들의 도착지는 경남 거제였다. 1953년 거제 피난민촌에서 태어난 문재인은 그 뒤 부산 영도 대평동으로 이사와 고등학교까지 다녔다.

대평동에는 선박 수리 부두가 있었다. 가난한 부녀자들이 배에 매달려 달라붙은 조개류와 부식된 칠을 벗겨 내는 '깡깡이' 소리가 끊이질 않는 곳이었다. 연고조차 없는 대평동에서 피난민 가족의 삶은, 쉽지 않았다. 동네 성당에서 구호물자인 전지분유 가루를 나눠줄 때 이를 받아올 그릇조차 없었다. 2012년 방송 연설에서 문재인이 '나를 키운 것은 8할이 가난'이었다고 할 정도였다.
깡깡이길 그래피티 '우리 모두의 어머니'(바이키르히, 2017년 작). /김석환

노무현, 문재인과 함께 변호사 사무실을 운영했던 정재성은 "노무현이 불 같다면, 문재인은 물 같은 사람"이라고 말한다. 물은 앞을 다투지 않는다. 막히면 돌아가고 빈 곳이 있으면 반드시 채우고 앞으로 나아간다. 그러면서도 마침내는 바다에 이른다. 대통령으로서의 문재인은 그랬던 것 같다.

그는 "더디더라도 민주적 절차를 존중하고 끝까지 지킬 것(2019년 신년사)"이라고 다짐하고 실천했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의 삶은 결코 '물' 같지 않았다. 대학에서 민주화 운동을 하다가 구속이 되고, 유치장에서 사법시험 합격 소식을 듣는다. 이후 김앤장 등 거대 로펌의 제안도 있었지만, 부산에서 노무현과 함께 노동과 인권변호사의 길을 걸었다. 1987년 6월 민주 항쟁 때에는 부산의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상임집행위원장 노무현)'의 상임위원을 맡았다. 전두환이 계엄령을 준비하고 있던, 광주에서의 죽음들에 대한 기억이 생생하던 때였다. 시위는 새벽까지 이어졌지만, 신문에는 5~6줄, 방송에는 2~3줄 분량의 기사가 고작이었다. 1988년 한겨레신문이 창간될 때 그가 부산지사장을 맡았던 것도, 이때 언론자유의 소중함을 절감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와 관련해서는 몇 번의 인상적인 기억이 있다. 2003년 3월 말이었다. 평검사들이 대학을 나오지 않은 것을 알면서도 노무현 대통령에게 몇 학번이냐고 조롱했던 '검사와의 대화' 보름쯤 뒤였던 것 같다. 그날 민정수석실 한 비서관과 저녁을 같이했다. 그 자리에서 사기죄로 수배를 받던 부동산 개발사업자가 체포된 뒤 노무현 대통령 당선의 1등 공신인 정치인에게 거액의 돈을 주었다고 진술했다고 검찰의 연락이 왔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래서?"

"(정치적 고려 없이)법대로 하라고 했다"

이 판단의 파장은 컸다. 전통 야당의 중진 정치인 일부와 원수가 되어 나중에 노무현 대통령이 탄핵당하는 불쏘시개가 되었다. 2025년 11월 평산마을에서 이 사건을 이야기하면서 노무현 대통령에게 보고하고 결정한 내용인가, 그리고 후과를 알았다면 당시의 판단이 달랐을까를 물어보았다.

"글쎄요, 기억이 가물 가물한데 스스로 판단한 것 같다. 다시 그런 일이 있어도 같은 결론을 내릴 겁니다."

노무현과 문재인의 비극은 정치권력이 검찰을 장악하지 않으면 검찰도 공정하게 수사할 것으로, 믿은 데 있다. 그러나 실제는 달랐다. 윤석열 정부에서 검찰은 자신들이 얼마나 특권의식을 갖고 이익집단화되어 있는지 여실히 보여 주었다. 전직 검사 이연주가 <내가 검찰을 떠난 이유>에서 폭로한 것처럼, 그들은 잡아들이고 싶으면 잡아들이고 풀어주고 싶으면 풀어주었다. 우리 편에게는 한없이 관대했다.

두 번째 장면은 노무현의 사망 이후 한 달쯤 뒤였다. 장례를 주관했던 문재인의 요청으로 언론인 몇 명이 점심을 함께하는 자리였다. 서슬 퍼렇던 이명박 시절의 경찰이나 정보기관이 지켜보고 있을 것으로 생각해, 아예 전통시장 내 돼지국밥 집에서 모였다. 당시 문재인은 부산을 떠나 양산 덕계 매곡마을에 살고 있었다.

매곡마을 그의 집은 차량 2대도 지나기 어려운 좁은 길의 끝, 외딴집이었다. 우울한 자리였고, 술잔 대신 먹먹한 이야기만 오고 갔다. 지금 기억에 남은 것은 김정숙 여사의 팔이 부러진 이야기뿐이다. 혼자서 가지치기하다가 사다리에서 떨어져 팔을 부러뜨렸다는 것이었다. 한적한 시골 마을 외딴집이어서 지나가는 사람도 없고, 팔이 부러지는 바람에 뒷주머니의 휴대전화도 꺼내지 못해, 어렵게 방으로 기어가 응급차를 불렀다는 내용이었다. '불법 호화주택'이다, '집 앞마당에 200톤의 금괴가 숨겨져 있다던' 논란의 집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한국에서 가장 많은 금을 보유하고 있는 한국은행 금괴도 100톤 정도이다. 한국 음모론자들의 수준이 그 정도다. 여담이지만 양산 매곡동의 집은 한 사업가에게 2022년 26억 원에 팔렸다. 이 사업가는 2017년 박근혜의 서울 삼성동 사저는 67억 원에, 이명박의 서울 논현동 사저도 111억 원에 사들였다.

그때만 해도 그가 정치판에 뛰어들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는 민정수석과 비서실장으로 청와대에 있었지만, 스스로는 정치가 아닌 행정이라고 생각했다.

양산 국밥집 만남 3년쯤 뒤 문재인은 지금 읽어도 '울컥'하는 마음이 드는 글을 트위터에 올렸다.

"소주 한잔합니다. 탈상이어서 한잔. 벌써 3년이어서 한잔. 지금도 '친노'라는 말이 풍기는 적의 때문에 한잔. 노무현재단 이사장 관두고 낯선 세상 들어가는 두려움에 한잔. 저에게 거는 기대의 무거움에 한잔. 그런 일들을 먼저 겪으며 외로웠을 그를 생각하며 한잔."

그는 그렇게 애써 피하고자 했던 정치판으로 '운명'처럼 소환되었다.

그가 본격 정치판에 들어와 처음 올린 트위터 글에도 '운명'이 등장한다.

"운명, 대화, 공감, 동행"

나는 그가 임기 내내 이 초심을 유지했다고 생각한다. 평균적인 한국인은 그가 1945년 분단 이후 처음으로 2018년 평양시민들 앞에서 "공동 번영과 자주통일의 미래를 앞당기자"라고 연설할 때는 함께 희망을 느꼈다. 전 세계에서 700여 만 명이 코로나로 죽어갈 때 한국의 모범적인 코로나 방역에 자부심을 느꼈고, 미국과 북한 간의 하노이 협상 실패 때에는 안타까움을 함께했다. 문재인 정부 시절 한국은 개도국에서 선진국으로 올라섰음을 국제적으로 공인받았고, G7 정상회담에 연속 초청받으며 사실상의 G8 국가로 외교적 위상이 높아졌다.

미국의 대통령들은 퇴임 이후 거액의 강연료를 받으며 돌아다닌다. 2022년 통일교 초청으로 한국을 방문했던 트럼프 1기 부통령 펜스도 55만 달러, 우리 돈 8억 원 가량을 받았다. 펜스는 방한 중 통일교의 주선으로 당시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후보를 만나 미국 보수세력이 윤석열을 지지하는 것처럼 보이도록 했었다.

나라마다 퇴임한 정치지도자의 삶은 다르다. 한국도 마찬가지이다.

후임 정권을 만들지는 못했지만, 문재인은 당선될 때 득표율보다 퇴임 시 지지율이 더 높았다. 당선 시 득표율은 41.1%였지만, 퇴임 2주 전 전국지표조사(NBS)의 국정 수행 지지율은 46%였다.

이제 그는 통도사 북쪽 산자락 아래 작은 서점 '평산책방'의 주인이 되었다. 책방에서 찾아오는 이들을 만나고, 함께 읽었으면 좋겠다는 책은 SNS를 통해 소개한다. 이웃 주민으로서 통도사의 생일이라고 할 수 있는 개산대제에 참석하기도 하고, 마을에 있는 도자기 가마에 불이 들어갈 때면 사기장과 마주 앉아 막걸리를 나누기도 한다.
평산 책방에서의 문재인. /문재인 홈페이지

"기회는 평등할 것입니다. 과정은 공정할 것입니다. 결과는 정의로울 것입니다."

2012년 대선 후보 수락 연설에서 처음 등장했고, 2017년 대통령 취임사에도 나왔던 구절이다. 얼마나 실천되었는지는 평가하는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시간의 마디마다 또 달라질 것이다.

우리는 고향을 기억하는 마지막 세대이면서, 고향을 잃어버린 첫 번째 세대이다. 고향으로 가는 길목 어귀의 산을 예전에는 관산(關山)이라고 했다. 고향을 지키는 관산 같은 사람, 나를 비롯해 많은 동시대인에게는 문재인이 바로 그런 느낌이다.

/김석환 박사·지식 큐레이터

☞ 필자는 KNN 사장, 한국인터넷진흥원장, 4차산업혁명위원회 위원을 지냈으며 '고인돌과 인공지능' 등 여러 권의 책을 썼다. 언론학 박사학위를 갖고 있으며 콘텐츠와 한국 언론기업의 문제에서부터 산업혁명 이후 헤게모니를 둘러싼 세계와 한국의 근현대사, 생성형 인공지능, 플랫폼, 빅데이터 등 다양한 분야에 관심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