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석유공사, 정유사에 비축유 대여해 수급 안정…중동발 위기 속 '에너지 방어' 총력
스와프로 수급 공백에 신속 대응
거제 기지서 비상 방출 태세 점검

중동발(發) 지정학 리스크가 글로벌 공급망을 정조준하며 국가 에너지 안보에 비상등이 켜졌다. 국제 유가 변동성이 극심해지고 ‘에너지의 동맥’이라 불리는 호르무즈 해협의 물류 차질이 현실화된 가운데, 한국석유공사의 발걸음이 긴박해지고 있다. 단순한 저장 시설을 넘어 위기 시 시장에 즉각 개입해 경제 충격을 완화하는 ‘동적 방어’ 기지로서의 역할이 그 어느 때보다 막중해졌기 때문이다.
손주석 한국석유공사 사장은 지난 21일 국내 최대 규모의 석유 저장 시설인 거제 석유비축기지를 방문해 비축유 저장과 방출 상황을 점검했다. 중동 정세 악화로 원유 수급 불확실성이 극에 달한 상황에서, 국내 정유사들의 숨통을 틔워줄 ‘원유 스와프(Swap)’ 작업 현황을 직접 챙기고 국가 비축유 관리 실태를 확인하기 위해 마련됐다.
현재 한국은 국제에너지기구(IEA)의 역대 최대 규모 긴급 비축유 방출 합의에 따라, 오는 6월 8일까지 총 2246만 배럴의 비축유를 시장에 공급해야 한다. 이는 1990년 걸프전 당시 방출량을 상회하는 사상 최대 규모다.
석유공사는 현재 정부 비축유 약 9600만 배럴과 민간 의무 비축유 등을 포함해 총 1억 4600만 배럴의 저장 능력을 운용 중이며, 이를 바탕으로 한 치의 오차 없는 방출 스케줄을 소화하고 있다.
공사가 시행 중인 ‘원유 스와프’는 이러한 대외 방출 계획과 맞물려 국내 수급 안정의 핵심축 역할을 한다. 최근 SK에너지, GS칼텍스 등 국내 정유 4사가 신청한 스와프 물량은 약 수천만 배럴에 달한다. 중동 정세 불안으로 호르무즈 해협 통관이 지연되면서 정유사들이 원유를 제때 들여오지 못하자, ‘호르무즈 대체원유’ 확보에 사활을 걸고 있다. 미국과 아프리카 등에서 원유를 들여오려면 30일 이상이 필요한데, 이때 공사가 보유한 정부 비축분을 우선 대여해주고 나중에 돌려받는 방식이 스와프다.
이러한 스와프 제도는 단순한 물량 지원을 넘어선다. 석유공사 관계자는 “정유사들이 대체원유를 확보할 시간을 벌어주는 동시에, 비축유를 지하에 묵혀두는 것보다는 능동적으로 에너지 안보에 기여할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이날 손 사장이 직접 시찰한 거제 비축기지의 핵심은 거대한 지하 저장 동굴이다. 높이 30m, 폭 20m에 달하는 이 동굴은 암반 내 지하수압을 이용해 기름 유출을 원천 봉쇄하는 ‘수벽 시스템’ 등 첨단 공법이 적용돼 있다. 지진이나 외부 타격에도 안전한 구조로, 유사시에는 가압 펌프를 통해 즉각 정유 시설로 원유를 실어 보낼 수 있는 무결점 방출 시스템을 갖췄다.
공사 관계자는 “거제 기지는 지상 탱크 대비 화재 위험이 현저히 낮고 증발 손실이 거의 없는 지하 암반 저장 방식 덕분에 대량 비축유를 최상의 품질로 영구히 보존할 수 있는 기술을 갖추고 있다”고 설명했다.
손 사장은 원유 입출하 시설과 지상 탱크, 지하 동굴 내부의 계측 장비를 일일이 확인하며 “가연성 물질을 다루는 현장 특성상 안전은 안보와 직결된다”고 강조했다. 평시 비축유를 꺼낼 일이 없지만 최근 스와프가 시작되고, 조만간 국제 비축유 방출도 앞두면서 입출하 배관의 압력과 밸브 작동 상태 등 공정 전반에 대한 강도높은 점검을 벌였다.
현장 점검을 마친 손 사장은 임직원들에게 “현재 중동 상황은 언제든 예상치 못한 공급 중단이 발생할 수 있는 일촉즉발의 위기”라며 “어떤 극한 상황이 닥치더라도 단 1%의 수급 차질도 발생하지 않도록 무결점 공급 체계를 상시 유지해달라”고 강력히 주문했다.
에너지의 90% 이상을 수입에 의존하는 한국에서 석유 비축은 단순한 자산 관리가 아닌 국가 생존 전략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현재 석유공사는 거제를 비롯해 울산, 여수, 서산 등 전국 9개 비축기지를 통해 약 120일분 이상의 비상 석유를 확보하고 있다.
김대훈 기자 daepu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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