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차례 “그만해” 외쳐도 성폭력 무죄…‘피해자 저항’ 묻는 강간죄 재판소원 한다 [플랫]
2022년 A씨는 오래 알고 지낸 친구 B씨로부터 성폭행 피해를 입었다. 당시 녹음된 파일에는 A씨가 성관계를 거부하며 저항하는 음성이 또렷이 담겼다. 1시간 분량 파일에서 A씨는 75번 넘게 “그만해” “안돼” “아파”라고 외쳤다. 그러나 법원은 유사강간으로 기소된 B씨에게 1심과 2심 모두 무죄를 선고했다. A씨가 저항하기 어려울 정도의 폭행이나 협박은 없었다는 이유에서다. 검찰이 상고를 포기하면서 지난달 판결이 확정됐다.

피해자는 사건 이후 충격으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와 우울증 등으로 치료받고 있다. 그런데 정작 자신의 일상을 무너뜨린 가해자는 어떤 처벌도 받지 않는다는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A씨는 지난 24일 기자와 통화하며 “재판받는 과정에서 피해자의 권리는 하나도 존중받지 못한다고 느꼈다”며 헌법재판소에 법원 판결을 취소해달라는 재판소원을 제기했다고 밝혔다.
그는 “재판 절차 내내 피해자는 배제돼있고, 당사자인데도 어떤 것도 할 수 없어서 너무나 무력했다”며 “국가가 절대 내 편이 아니라는 절망감이 들었다”고 했다. 현행법과 실무상 법원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했을 땐 증인지원제도 적용을 받고 피고인 측과 마주치지 않았지만, 증인이 아닌 참고인 신분으로 방청을 위해 출석했을 땐 보호받을 수 없었다. 피고인 측 변호사는 법정 방청을 마치고 나온 피해자를 향해 ”니가 무슨 피해자냐“고 거친 언행을 보였고, 피고인 주장을 반박하고 법리 다툼을 벌여야 할 검사는 연락조차 잘 되지 않았다. 법원은 심리 과정에서 피해자를 보호하기는커녕 사건 당시 자세가 어땠는지를 물어보는 등 성인지 감수성이 떨어지는 질문을 이어갔다.
[플랫]‘강간 당하지 않기 위해’ 피해자가 얼마나 사력을 다했는지 묻는 현행 ‘강간죄’
[플랫]“부서 간 조율 다 거쳤는데… 대통령실 반대 분위기에 ‘비동의 강간죄 검토 철회’
A씨는 “술에 취해 기억이 안 나는 부분이 많지만, 어떤 장면들은 명확히 떠오른다”며 “상대방이 자꾸 내 의사를 무시해서, 억지로 집에 돌려보내려고 부드럽게 거부한 것도 법원에서는 ‘여지를 주는 행동’이라고 해석했다”고 말했다. 이어 “법원이 전체적인 맥락은 무시하고 쌍방 동의한 관계였다고 보는 근거가 도대체 무엇인가”라며 “누군가 동의 없이 나를 때리면 강제추행이나 폭행이 되지 않나. 성폭력도 마찬가지”라고 했다.
현재 한국에선 강간죄가 성립하기 위한 폭행과 협박 정도를 ‘피해자의 반항이 불가능하거나 현저히 곤란한 수준’으로 매우 엄격하게 보는 ‘최협의설’을 따르고 있다. 이 때문에 가해자를 신고해 사건이 법정으로 가더라도 피해자들은 “왜 더 적극적으로 저항하지 않았냐”와 같은 2차 가해적 상황에 수시로 놓이게 된다. 그러나 2022년 여성가족부의 성폭력 안전 실태조사에 따르면 가장 많은 강간 피해는 가해자의 폭행 또는 협박이 아니라 ‘강요’나 ‘속임’이 있는 상황에서 벌어진 것으로 나타났다.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여성인권위원회와 천주교성폭력상담소, 한국성폭력상담소 등은 ‘동의 없는 성폭력 재판소원 공동대책위원회’를 꾸리고, 지난 23일 A씨를 대리해 재판소원을 청구했다. 오지원 변호사는 “이번 사건은 특히나 거부 음성이 담긴 물적 증거가 있는데도, 재판부는 피해자의 입에서 나온 수십 번의 명확한 거절보다 가해자가 마음대로 추측한 내심의 의사에 더 힘을 실었다”고 지적했다.
이어 “피해자 저항이 부족했다는 낡은 잣대로 가해자에게 면죄부를 준 이번 판결은 범죄로부터 국민의 기본권을 보호할 국가의 헌법상 의무를 저버린 것”이라며 “이번 재판소원으로 형사 절차에서 소외된 범죄 피해자가 구제될 수 있기를 바란다”고 했다.
▼ 김정화 기자 clean@khan.kr
플랫팀 기자 flat@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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