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의 시각] 정독도서관에서 배우는 주택 정책

정해용 기자 2026. 4. 27. 1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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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종로구 북촌 한옥마을 인근 정독도서관은 봄이면 책보다 꽃을 보러 오는 사람이 많다. 도서관 내에는 작은 연못과 풍차가 있고 봄에는 벚꽃이 흐드러지게 핀다. 가을에는 붉고 노란 단풍이 방문객을 반겨준다. 장서 50만권을 보관한 도서관이지만 서울의 내·외국인 관광 명소다.

1977년 문을 연 정독도서관은 예전 경기고등학교가 있던 자리를 도서관으로 바꾼 곳이다. 박정희 정부가 1970년대 강남을 개발하면서 당시 문교부 장관이었던 민관식(1918~2006)은 경기고를 비롯한 강북 주요 명문고의 강남 이전을 강하게 밀어붙였다. 경기고의 전신인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33회) 출신인 그가 모교를 허허벌판인 강남으로 옮기려 하자 반대하는 동문이 많았고 그는 부지를 보존해 도서관으로 만드는 조건을 제시했다.

서울시도 강남으로 이전하는 학교에 건축비를 지원하고 도로 포장, 상하수도 시설 완비, 강남 지역 체비지(개발이 보류된 땅) 우선 매입권, 부지 매입에 따른 취득·등록세 감면 등의 혜택도 제공했다. 이런 노력으로 1976년 경기고가 강남구 삼성동으로 옮겼고, 1978년에는 종로구 원서동의 휘문고가 강남구 대치동으로, 정신여고는 종로구 연지동에서 강동구(현 송파구) 잠실동으로 각각 자리를 옮겼다. 1980년에도 숙명여고(강남구 도곡동), 서울고(서초구 서초동)가 강남으로 터전을 바꿨다. 강남 8학군의 형성이다.

강남 개발은 다양한 각도에서 이뤄졌다. 제3한강교(한남대교)와 경부고속도로 건설, 대규모 아파트 지구 지정, 바둑판식 도로망 기획 등 도시의 하드웨어를 정비했다. 반면 민관식 전 장관과 강북 주요 명문고 관계자들은 강남의 소프트웨어를 고민했다. 이들은 강남 개발을 성공시키려면 단순히 집이나 도로를 제공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국민의 교육열을 이용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예측대로 강북의 많은 중산층이 강남으로 삶의 터전을 옮겼다.

가장 최근 주요 고교의 이전 사례는 2017년이다. 종로구 안국동에 있던 풍문여고가 강남구 자곡동으로 이전하며 남녀공학인 풍문고로 전환했다. 풍문고는 강남으로 옮긴 지 얼마 되지 않아 내신에서 높은 등급을 받기 쉽다는 소문이 퍼졌고 최근에는 경기고, 중동고, 휘문고, 경기여고 등에서 전학을 오는 학생도 많아졌다.

서울 종로구 화동 정독도서관 전경. /나무위키 캡처

정부는 강남을 비롯한 서울 주요 지역의 집값이 과도하게 높다는 문제의식으로, 집값 안정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다주택자에 대한 세금 혜택 폐지, 보유세 강화 추진 등이 이런 노력의 일환이다. 또 부족한 서울 내 주택 공급을 늘리기 위해서 2030년까지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에 135만호를 신규 착공하겠다는 계획도 발표했다. 도심 내 유휴부지와 노후시설을 활용하고 정비사업 활성화도 약속했다. 신혼부부와 청년층을 위한 공공 임대주택 공급도 속도를 낼 계획이다.

그러나 아쉬운 점은 정부가 공급하겠다고 한 주택이 입주하는 사람에게, 그리고 그들의 아이들에게 어떤 환경을 제공해 줄 수 있는지를 제시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정부가 제시한 자료만 봐서는 주택이 지어질 대상지 인근이 어떤 곳인지 알기 어렵다. 제대로 된 정보를 제공하지 않아서다.

지난 1월 청년과 신혼부부를 대상으로 주택을 공급하겠다며 발표한 대상지 중 한 곳인 송파구 방이동 복합청사(방이동 52번지 일대)의 배후에는 먹자골목과 모텔촌이 있다. 또 다른 주택 조성지인 용산구 용산우체국(한강로2가 142)은 일명 ‘용리단길’로 불리는 지역으로 위스키 바, 이자카야 등 이색 식당과 술집이 즐비한 곳이다. 이달 초 국무조정실과 경찰은 용산구 일대 유흥가에 대한 마약류 합동 단속을 벌이기도 했다.

정부와 서울시가 앞으로 주택을 공급하려는 지역으로 지금 강북 지역에 남아 있는 역사가 오래된 학교들을 이전하려 노력해 보는 것은 어떨까. 이미 많은 고등학교가 학령인구 감소 등으로 이전이나 남녀공학으로의 전환을 고민하고 있다. 1907년 개교해 1929년부터 서울 종로구 혜화동에 자리 잡은 동성중·고교는 송파구 거여·마천 뉴타운 인근으로 이전하기로 했다. 학령인구 부족으로 경영난에 시달렸기 때문이다. 1921년 경성제2고등보통학교로 개교한 경복고도 남녀공학 전환을 고민하고 있다.

서울시 전체 지역을 대상으로 학생을 받는 자율형 사립고로 운영 중인 곳도 많다. 정동의 이화여고, 계동의 중앙고는 모두 자율형 사립고로 기숙사를 운영하고 있어 꼭 사대문 안의 위치를 고수해야 할 필요가 없다. 초등·중학교의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다. 반세기 전 강남의 미래를 고민했던 선배들처럼 정부도 많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주택정책을 펴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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