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비즈] 개정 노조법, 갈등 줄이는 법이어야 한다

2026. 4. 27. 11:21
음성재생 설정 이동 통신망에서 음성 재생 시 데이터 요금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글자 수 10,000자 초과 시 일부만 음성으로 제공합니다.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최근 물류 현장에서 화물연대 조합원이 사망하는 안타까운 사고가 발생했다. 무엇보다 고인에 대한 애도와 정확한 진상 규명이 우선이다. 그러나 이번 사고는 개별 현장의 충돌을 넘어, 제도가 현실을 따라가지 못할 때 사회가 얼마나 큰 비용을 치르는지 보여준다.

법은 갈등을 제도 안으로 흡수해 조정하는 장치여야 한다. 그런데 개정 노조법은 오히려 새로운 갈등의 통로를 넓히고 있다. 권리는 커졌으나 책임은 흐려졌고, 규정은 늘었지만 기준은 부족하다.

이번 개정의 취지는 이해할 만하다. 원·하청 구조 속에서 실질적 영향력을 가진 주체를 교섭의 장으로 끌어들여, 제도 밖 갈등을 공식 절차 안에서 풀어보자는 것이다.

문제는 방향이 아니라 설계다. 시행 이후 현장에서는 교섭보다 사용자성 판단과 교섭 범위를 둘러싼 다툼이 먼저 벌어지고 있다. 갈등을 줄이기 위해 만든 법이 오히려 갈등의 출발점이 되는 역설이다. 핵심 쟁점은 ‘누가 사용자이며, 어디까지 책임지는가’다.

현행 기준은 ‘실질적·구체적 지배력’이라는 추상적 개념에 머물러 있다. 원청이든 발주처든 일정한 영향력이 있다고 판단되면 직접 교섭 요구를 받게 되지만, 어디까지가 법적 책임인지 명확하지 않다.

결국 법원의 최종 판단 이전에 현장 대치가 먼저 벌어진다. 노사관계의 현실은 늘 긴급한데 제도의 판단은 느리다. 그 시간 차가 충돌을 키운다.

이번 사안에서도 화물연대는 BGF리테일의 실질적 결정권을 주장하며 원청 책임을 물었고, 사측은 법적 사용자성에 선을 그었다. 그 사이 현장에서는 집단 운송거부와 대체 차량 출차가 맞물리며 긴장이 고조됐고, 결국 비극적 사고로 이어졌다.

사고 이후에야 교섭이 본격화됐다는 점은 더욱 뼈아프다. 제도가 갈등을 예방하지 못하고 충돌 뒤에야 대화의 장을 연다면, 그것은 미완의 제도다. 사고 이후 정부가 먼저 해야 했을 일은 법과의 거리 두기가 아니었다.

개정 노조법과 무관하다는 선 긋기에 앞서, 왜 제도가 현장 충돌을 막지 못했는지 설명하고 보완책을 밝히는 일이 우선이었다. 법을 만들었다면, 그 법이 현장에서 낳은 혼란에도 책임 있게 답해야 한다.

교섭 절차 역시 미비하다. 교섭 요구 단계에서 의제가 명확히 제시되지 않으면 기업은 무엇을 기준으로 사용자성을 판단해야 하는지조차 알기 어렵다. 공고를 해도 부담이고, 하지 않아도 분쟁이 되는 구조라면 제도 설계에 결함이 있다는 뜻이다.

손해배상 책임 체계 역시 재정비할 필요가 있다. 노동3권은 헌법상 권리이며 정당한 쟁의행위는 보호받아야 한다. 그러나 폭력, 점거, 출입 봉쇄, 제3자 피해까지 수반하는 불법행위에는 분명한 책임 원칙이 따라야 한다. 권리 보장과 책임 원칙은 함께 갈 때 지속 가능하다. 쟁의행위에 따른 책임 부담이 낮아졌다는 인식이 확산된다면 현장의 긴장은 더 커질 수밖에 없다.

지금 필요한 것은 법의 취지를 부정하는 일이 아니다. 그 취지가 제대로 작동하도록 설계를 보완하는 일이다. 사용자성 판단 기준부터 구체화해야 한다. 임금·근로시간·산업안전·인사권 등 항목별로 누가 실질적 통제권을 갖는지 따져 책임을 분명히 해야 한다. 그래야 원청과 하청 모두 예측할 수 있는 기준 아래 교섭에 임할 수 있다.

교섭 절차도 현실에 맞게 손질돼야 한다. 교섭 요구 단계에서 의제를 명확히 제시하도록 해 불필요한 다툼을 줄여야 한다. 원·하청 책임 경계도 분명히 해 실제 통제하지 않는 영역까지 교섭 대상이 무한정 확대되는 일을 막아야 한다. 형식이 아니라 실질적 이해관계를 기준으로 교섭 구조를 재편하는 일도 필요하다. 파업 상황에서의 대응 기준과 손해 책임 원칙도 균형 있게 정비해야 한다.

권리 보장과 책임 원칙이 함께 작동할 때 제도는 안정성을 갖는다. 법은 선언이 아니라 작동하는 구조여야 한다. 좋은 의도만으로는 갈등을 해결할 수 없다. 기준이 모호한 권리는 충돌을 낳고, 책임 없는 권한은 분쟁을 키운다. 갈등을 줄이기 위해 만든 법이라면, 이제는 현장에서 실제로 갈등을 줄이는 법으로 다듬어야 한다. 정부와 국회는 더 늦기 전에 보완 입법에 나서야 한다.

김덕호 성균관대 교수(전 대통령 소속 경제사회노동위원회 상임위원)

Copyright © 헤럴드경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