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과학칼럼] 동위원소, 전략산업 초격차 숨은 열쇠

동위원소의 발견은 근대 과학의 패러다임을 바꾼 사건이었다. 같은 원소라도 질량이 다를 수 있다는 사실은 양자역학의 발전과도 맞닿아 있다. 20세기 초까지 동위원소는 과학자들에게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였다. 화학적으로는 분리할 수 없지만, 생성 과정과 물리적 성질은 달랐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염소다. 당시 과학자들은 염소의 원자량을 35.45로 측정했는데, 이는 모든 원소의 원자량이 수소의 정수배여야 한다는 프라우트의 가설을 무너뜨렸다. 1919년 에스턴이 질량분석기를 이용해 염소가 원자량 35와 37인 두 동위원소가 3:1 비율로 섞여 있다는 사실을 밝혀내면서 오해는 풀렸다.
오늘날 염소 동위원소는 무탄소 선박 엔진으로 주목받는 용융염원자로(MSR)의 핵심 소재로 다시 떠오르고 있다. MSR의 냉각재이자 연료 매질인 염화물 용융염에서는 염소-35를 반드시 제거해야 한다. 이유는 명확하다. 염소-35는 중성자를 흡수하는 능력이 염소-37보다 100배나 강하며, 흡수 후에는 수천 년 동안 환경에 해로운 방사성 물질로 변한다. 반면 염소-37은 중성자를 거의 흡수하지 않아 연료 효율을 유지하고 유해 부산물도 만들지 않는다. 따라서 장기간 안정적으로 작동하는 MSR에는 고농도의 염소-37이 필수다. 동위원소는 반도체 산업에서도 중요하다. 붕소-11은 반도체 오류를 줄이는 데 꼭 필요하다. 자연 상태의 붕소에는 붕소-10이 섞여 있는데, 이는 대기 방사선에 의해 반도체 오류를 일으키고 성능을 떨어뜨릴 수 있다. 반도체가 점점 더 미세해지고 집적도가 높아질수록 이러한 문제는 더욱 치명적이 된다. 결국 동위원소의 순도가 반도체의 신뢰성과 직결되는 것이다.
양자정보기술 분야에서는 더 다양한 동위원소가 요구된다. 같은 원소라도 중성자 수가 다른 동위원소는 양자 세계에서 전혀 다른 물질로 작용한다. 예를 들어, 양자컴퓨터의 핵심인 다이아몬드 NV 센터는 반드시 탄소-12로만 만들어야 한다. 탄소-13이 일정량 이상 섞이면 정상적인 양자 동작이 불가능하다. 큐빗 소재인 이터븀-171, 실리콘-28 역시 순수한 동위원소가 필수다. 의료 분야에서도 동위원소의 활용은 확대되고 있다. 암세포만 선택적으로 공격하는 방사성 의약품의 핵심 소재인 루테튬-177은 이터븀-176에서 만들어진다. 기존 치료법보다 부작용이 적고 환자의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다는 점에서 동위원소 기반 의약품은 의료 혁신의 중요한 축으로 자리 잡고 있다.
문제는 공급망이다. 동위원소 분리는 원자핵의 미세한 차이를 이용하는 고난도의 기술로, 막대한 투자와 규모가 필요하다. 특히 원심분리법이나 전자기법은 우라늄 농축에도 쓰이는 기술이라 국제사회가 엄격히 통제한다.
현재 안정 동위원소를 공급하는 국가는 러시아, 미국, 프랑스, 중국 등 핵보유국에 한정되어 있다. 이들 국가는 자국 산업을 우선시하며 공급을 제한하기 때문에, 동위원소는 언제든 전략적 무기가 될 수 있다. 다행히 한국원자력연구원은 레이저를 이용한 동위원소 분리 기술을 개발하고 있다. 레이저법은 다른 방식보다 시설 규모와 비용이 적게 들고, 다양한 동위원소에 적용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만약 이 기술이 상용화된다면, 우리나라는 안정 동위원소 확보에서 자립할 수 있는 길을 열게 된다.
전 세계적으로 전략기술 분야에서 동위원소 수요는 빠르게 늘고 있으며, 각국은 자국 이익을 위해 공급을 통제하고 있다. 우리나라가 전략산업을 육성하는 과정에서 동위원소는 작은 부분처럼 보이지만, 전체를 좌우하는 핵심 소재다. 초격차 경쟁에서 언젠가 결정적 역할을 할 동위원소의 국산화 기반을 마련하는 데 국가적 노력이 필요한 시점이다. 동위원소는 단순한 과학적 호기심의 산물이 아니라, 미래 산업과 국가 경쟁력을 좌우하는 숨은 열쇠다.
정영욱 한국원자력연구원 하나로양자과학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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