끊임없이 자신을 되묻는 시인의 자의식

수학과 논리학은 말한다. "전체는 부분보다 크다." 1 더하기 1은 2이다. 1은 2의 부분이며, 2는 1들의 합이다. 1과 1의 합인 2는 1보다 크다. 따라서 전체는 부분들의 합이다. 따라서 전체는 부분보다 클 수밖에 없다. 이 명제는 그 어떠한 수리법칙과 논리 전개로도 뒤집을 수없는 논리의 대전제다. 시인 임동확은 말한다. "부분은 전체보다 크다." 낱낱의 개별적 존재들은 거대한 총합에 비해 결코 하챦게 여김당할 수없다는 존재론적 선언이다. 전체는 부분보다 크다는 말이 인식론적 명제라면, 부분은 전체보다 크다는 시인의 말은 존재론적 선언이다. 이 생각에 이르기까지 시인은 끊임없이 묻고 또 묻는다.
임동확 시집 『부분은 전체보다 크다』는 제목부터 독자를 도발한다. 우리가 익숙하게 받아들여온 "전체가 부분을 포괄한다"는 상식을 정면으로 뒤집기 때문이다. 이 역설적인 선언은 단순한 언어적 장치가 아니라, 시집 전반을 관통하는 인식의 틀이자 세계를 바라보는 태도다. 이 시집에서 임동확은 거대 담론이나 총체적 의미를 구축하기보다, 오히려 잘게 쪼개진 삶의 장면들—거리의 사거리, 공사장, 바다, 작은 식물과 동물들—에 시선을 오래 머문다. 그런데 이 사소한 풍경들은 결코 배경으로 머물지 않는다. 각각의 장면은 스스로 하나의 세계처럼 자립하며, 그 내부에서 고유한 시간과 감각을 발생시킨다. 이를테면 참새의 움직임이나 바닷가의 흔들림 같은 미세한 사건들은 어떤 상징으로 환원되기보다, 그 자체로 충분한 의미를 갖는 '부분'으로 제시된다.
이러한 시선은 근대적 사고가 지닌 균질화의 폭력에 대한 비판과도 맞닿아 있다. 시집 곳곳에서 드러나는 공사장, 규격화된 도시 풍경, 제도와 규율의 언어들은 모두 개별적인 존재들을 평균화하려는 힘으로 작동한다. 그러나 시인은 그 틈새에서 벗어나는 사소한 생명과 감각을 포착함으로써, 어떤 공통분모로도 환원되지 않는 개체의 고유성을 드러낸다. 결국 "부분은 전체보다 크다"는 말은, 논리적 명제가 아니라 존재론적 선언에 가깝다. 각자의 삶은 그 자체로 이미 완결된 우주라는 것이다.
형식적으로도 이 시집은 단일한 목소리로 수렴되지 않는다. 서정과 서사가 뒤섞이고, 관찰과 사유가 교차한다. 때로는 일상의 언어로, 때로는 철학적 질문의 형식으로 시는 전개되며, 그 사이에서 독자는 하나의 의미로 고정되지 않는 다층적인 울림을 경험하게 된다. 특히 도시와 자연, 개인과 역사, 감각과 개념이 서로 스며드는 방식은 이 시집이 단순한 자연 서정이나 사회 비판을 넘어서는 지점을 보여준다.
결국 이 시집이 던지는 질문은 분명하다. 우리는 왜 전체라는 이름 아래 개별성을 희생해왔는가. 그리고 과연 '부분'으로 불리는 존재들은 정말로 미완의 상태에 머무는가. 임동확은 이에 대해 명확한 해답을 제시하기보다, 다양한 장면과 감각을 통해 독자가 스스로 사유하도록 유도한다. 그 과정에서 드러나는 것은, 각기 다른 존재들이 지닌 불가환성, 그리고 그 차이 자체가 만들어내는 세계의 풍요로움이다.
『부분은 전체보다 크다』는 결국 하나의 결론으로 수렴되기보다, 오히려 결론을 유예하는 시집이다. 시인이 보여주는 수많은 '부분들'은 서로를 설명하지 않으면서도 느슨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그 사이에서 독자는 기존의 인식 틀을 흔드는 새로운 감각을 경험하게 된다. 이 점에서 이 시집은 하나의 주장이라기보다, 독자에게 건네는 사유의 장에 가깝다.
'임동확은 무서운 '자기규율의 도덕률'을 지닌 시인'이라고 말한 안삼환 시인의 말처럼, 가까이에서 지켜본 임동확 시인은 철저한 자의식으로 스스로를 담금질하는 시인이다. 그이와 함께 담양 '글을 낳는 집'에 머물러 살며 듣고 본 그의 나날은 자의식에 충만한 소년의 모습이다. 일반적으로 자의식은 자기 자신에 대한 충만한 자존감을 바탕으로 명징한 정체성을 확립하려는 태도를 말한다.
그러나 내가 본 임 시인의 자의식은 명료한 의식이나 정체성 지향과는 다소간 거리가 있다. 그는 끊임없이 미끄러진다. 글의 말과 글은 딱 떨어지게 무언가를 규정하지 않고 계속 의미망을 교란하며 흘러내린다. 명확하게 의미를 규정하기보다는 중의적이고 포괄적으로 의미망을 넓히는 말과 글의 뜻이 보인다. 정말 무서운 말과 글은 이런 것이다. 흘러내리는 말과 글 속에 뜻을 담아 내는 것. 나는 최근 담양 산골에서 시인과 함께 한 소소한 자리 스쳐 지나가는 말 에서 깊은 뜻을 건져올려 '시인의 자의식'을 포착해냈다.
시인의 자의식
4월 어느날
글을 낳는 집 두릅나무 밭
봄나물 푸릇허니 잘 익었다
머윗대 자르던 우리를
카메라에 담던 소설가에게
임동확 시인
한 마디 중얼거린다
호미질하는 박경리 선생 사진이 떠오르네
머윗대 푸른 나물밭에서
서슬퍼렇게 돋아나는
시인의 자의식
일순간에 자신을 박경리 급으로 격상시키는
시인의 자의식
감옥에서 유묵을 남긴 열사들을 동경하며
나도 감옥에서 글을 쓰리라 다짐했던
문학 청년 그이
혁명을 꿈꾸며
밥벌이를 뒤로 미뤘던
80년대 운동권 청년 그이
김지하를 모욕하는 발언에
지금 뭐라 그랬어
일갈하던 열혈 청년 학도 그이
우주의 기운과 하나되는
지기금지원위대강至氣今至願爲大降 동학사상을
우주의 기운으로 나를 되묻는
지기금지위아독문至氣今至爲我獨問 동확사상으로
유쾌하게 전유하는
나이 지긋한 동학당 시인 그이
그리하여 끝끝내 나를 놓지 않고
지극히 혹독하게 나를 되묻는 저 푸릇한
시인의 자의식

홍익대학교 예술학 학사, 석사, 미술학 박사. 한국큐레이터협회 회장, 미술평론가.
부산비엔날레 전시기획팀장, 부산시립미술관 큐레이터, 대전시립미술관 학예연구실장, 제주도립미술관 관장,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실장, 광주시립미술관장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