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 기고] 박기순 성균관대 중국대학원 교수 | 제조 강국 한국의 혁신 강국 도약 조건들

지금 세계경제는 ‘구조적 전환’의 한가운데에 놓여 있다. 인공지능(AI), 양자 기술, 바이오 혁명이 산업 경계를 허물고 있고, 기존의 제조·서비스 구분조차 무의미하게 하고 있다. 이런 기술 융합은 새로운 산업 생태계를 창출하는 동시에, 기존 가치 사슬을 급속도로 재편한다. 글로벌 공급망은 과거의 ‘효율성’ 중심에서 ‘안보와 신뢰’ 중심으로 급격히 바뀌고 있다. 미·중 기술 패권 경쟁, 공급망 리쇼어링 그리고 ‘프렌드쇼어링’은 더 이상 선택이 아닌 생존 조건이다. 기업은 비용 절감을 넘어 공급망의 안정성과 기술 유출 방지를 최우선 과제로 삼고 있다.
대외적 격랑 속에서 한국은 인구 감소와 초고령사회 진입이라는 내부 충격에 직면해 있다. 2023년 합계 출산율 0.72명이라는 역대 최저치를 기록한 이후, 2년 연속 반등했으나 여전히 초저출산 수준이다. 생산 가능 인구 감소는 2020년대 초부터 가시화됐고, 2030년대에는 더 급격한 노동력 부족이 현실화할 전망이다. 이는 경제성장의 기반을 약화하고, 내수 시장 축소와 복지 비용 폭증이라는 이중고를 동시에 야기한다. 고령화로 인한 연금·의료 지출 증가와 노동인구 감소가 맞물리면 재정 건전성 악화와 성장 잠재력 저하가 불가피하다. 제조 강국으로 쌓아온 기반을 혁신 강국으로 승화시키지 못할 경우 한국은 장기 정체의 함정에 빠질 수밖에 없다. 구조적 전환 없이는 지속 가능한 성장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슘페터와 내생적 성장
해답은 조지프 슘페터의 ‘창조적 파괴’에서 찾을 수 있다. 슘페터는 자본주의의 본질은 기존 질서의 유지가 아닌, 그것을 끊임없이 뒤흔드는 혁신에서 나온다고 봤다. 신기술과 새 기업이 등장해 기존 산업을 대체하는 과정이 경제성장의 원천이라고 봤다. 산업구조를 근본적으로 바꾸는 ‘파괴’를 핵심으로 뒀다. 예컨대 디지털 기술이 전통 제조업을 재편하거나, AI가 기존 서비스 모델을 대체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가치가 창출된다.여기에 ‘내생적 성장 이론’이 힘을 더한다. 이 이론은 기술혁신을 경제 시스템 내부에서 만들어지는 결과물로 정의한다. 지식 축적과 인적 자본 투자 그리고 혁신에 대한 강력한 인센티브가 결합할 때 지속적인 성장이 가능하다. 또 혁신은 제도·문화·정책이 만들어내는 구조적 산물이라는 점을 명확히 보여준다. 한국이 선도형 성장으로 나가려면, 바로 이 내생적 메커니즘을 작동시켜야 한다. 대기업 중심의 연구개발(R&D)뿐 아니라, 스타트업과 중소기업의 창의성을 제도적으로 뒷받침하는 시스템이 필수다. 교육 개혁, 규제 완화, 실패를 용인하는 문화 조성이 이를 뒷받침해야 하며, 지식 축적이 경제 전체로 확산하는 순환 구조를 구축하는 것이 관건이다.
일본의 정체와 미국의 변신
일본은 제조 강국이 혁신 강국으로 전환하지 못할 때 어떤 결과가 나타나는지를 보여준다. 1980년대 세계 최고의 제조 경쟁력을 자랑했던 일본은 1990년대 거품 붕괴 이후 ‘잃어버린 30년’이라는 장기 침체에 빠졌다. ‘카이젠(kaizen·改善)’으로 불리는 점진적 개선에는 강했으나, 산업구조를 뒤흔드는 파괴적 혁신과 디지털 전환(DX·digital transfor-mation)의 흐름은 놓쳤다. 종신고용제와 경직된 노동시장은 젊은 인재의 창업과 이동을 억제했고, 대기업 중심의 안정 지향 문화는 위험 감수를 차단했다. 결과적으로 일본은 기술 선도국 지위를 상실하고, 저성장과 디플레이션(물가 하락)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반면 미국은 대학·벤처캐피털·자본시장으로 이어지는 혁신 생태계를 통해 끊임없이 새로운 기업을 탄생시켰다. 실리콘밸리 모델은 대학이 기초연구를 수행하고, 벤처캐피털이 초기 자금을 지원하며, 나스닥이 기업 회수 경로를 제공하는 구조로 작동한다. 핵심은 ‘실패를 용인하는 문화’와 강력한 인센티브다. 실리콘밸리의 스타트업 문화는 대기업조차 혁신을 강제하는 압력으로 작용했다. 다만 이런 구조는 생산의 해외 이전을 가속해 제조 공동화를 초래하는 부작용도 낳았다. ‘혁신은 미국, 생산은 해외’라는 분업 구조가 고착되면서 공급망 취약성이 드러났고, 이는 최근 들어 국가 안보와 산업 경쟁력의 핵심 리스크로 부상했다. 이에 따라 미국은 ‘반도체 칩과 과학법(칩스법)’과 ‘인플레이션 감축법(IRA)’ 등을 통해 혁신 역량과 제조 기반을 다시 결합하려는 전략적 전환을 시도하고 있다.
한국이 선도형 성장으로 나가려면, 내생적 메커니즘을 작동시켜야 한다. 대기업 중심의 R&D뿐 아니라, 스타트업과 중소기업의 창의성을 제도적으로 뒷받침하는 시스템이 필수다. 교육 개혁, 규제 완화, 실패를 용인하는 문화 조성과 지식 축적이 경제 전체로 확산하는 순환 구조를 구축하는 것이 관건이다.
중국식 성장의 두 얼굴
중국의 변화는 더 직접적인 시사점을 준다. 중국은 ‘연성 예산 제약(SBC·Soft Bud-get Constraint)’하에서 손실을 무시한 채 지방정부와 국유 기업의 부채를 동원해 국내총생산(GDP) 목표를 달성해 왔다. 그러나 지방정부 조달 기구(LGFV)와 부동산 개발사의 부채는 이미 임계점에 도달했다. LGFV를 포함한 지방정부의 숨겨진 부채 규모는 수십조위안으로 추정되며, 부동산 침체와 내수 소비 위축은 이를 더 악화시키고 있다. 중국 정부는 부채 구조조정을 추진하고 있지만, 지방정부 재정 의존도가 여전히 높아 시스템적 리스크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은 거국적 제조업 육성 정책에 따라 글로벌 제조 대국으로 성장했고, 그 가운데 과잉생산이 지구적 문제로 떠올랐다.
그러나 중국을 단순 과잉생산 국가로 봐선 안 된다. 그보다 제조 혁신으로 대변되는 중국의 혁신 능력을 주시할 필요가 있다. 중국은 2015년부터 ‘메이드 인 차이나 2025’를 중심으로 전기차·배터리·AI 등에서 빠르게 기술 경쟁력을 축적했고, 국가 주도의 대규모 투자와 내수 시장을 기반으로 독자적 혁신 생태계를 구축했다. 혁신 역량과 과잉생산 능력이 결합하면, 기술과 규모가 결합한 구조적 위협으로 작용한다. 경쟁자이자 기술 추격자로서 중국을 정확히 인식하고, 공급망 다변화와 기술 자립 전략을 강화해야 한다.
한국 경제의 구조적 제약과 당면 과제
한국은 대기업 중심 R&D 체계라는 한계에 봉착해 있다. 이는 새로운 시장과 기술을 창출하는 파괴적 혁신에 제약이 되고 있다. 대기업의 안정 지향적 투자 패턴은 창의적 파괴를 억누른다. 최근 ‘오픈 이노베이션’ 프로그램이 증가하지만, 질적 성과는 충분하지 않다. 대기업·스타트업 간 상호 보완 관계 발전이 필요하다.
또 다른 핵심 병목은 서비스 산업의 낮은 생산성이다. 한국 서비스업 노동생산성은 제조업 대비 2024년 기준 약 47.5% 수준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8개국 중 서비스업 노동생산성 순위가 26위에 불과하다. 서비스업은 지식과 기술이 경제 전반으로 확산되는 핵심 통로임에도 각종 규제와 아날로그식 법체계가 디지털 혁신을 가로막는다. 의료·교육·금융·물류 등에서 AI와 데이터의 활용이 제한적이며, 이는 전체 경제의 생산성 저하로 이어진다.
한국 경제가 재도약하려면 △첫째, 혁신 주체를 대기업 중심에서 스타트업으로 다변화하고, 창업-재도전의 선순환 생태계를 구축해야 한다. 대기업은 여전히 대규모 투자와 기술 고도화의 핵심 역할을 수행하고 있어, 스타트업의 창의적 실험과 결합하는 오픈 이노베이션을 제도적으로 뒷받침할 필요가 있다. △둘째, 서비스 산업 고도화와 스마트 규제 개혁이 시급하다. AI와 데이터를 의료·교육·금융 등에 적극 도입하고, 규제 샌드박스 확대와 데이터 공유 체계를 통해 생산성을 높여야 한다. △셋째, 세계 최고의 제조 기반에 AI를 접목한 지능형 제조로 전환해 기술 주권을 확보해야 한다. △넷째, 창의성과 문제 해결 역량을 중심으로 한 인재 양성 체계로 전환하고, 산업과 교육의 연계를 강화해 혁신 생태계에 필요한 인재를 지속적으로 공급해야 한다. 아울러 노동 이동성을 높이고 해외 인재 유입을 확대해 개방적이고 역동적인 혁신 기반을 구축해야 한다.
제조라는 강력한 심장에 혁신이라는 뇌를 이식해야 진정한 혁신 강국으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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