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혁신 강국 스위스 가보니 | 민간이 이끌고 인재가 뒷받침… 스위스 우주산업의 힘

로잔·루체른·베른·취리히(스위스)= 김송이 조선비즈 기자 2026. 4. 27. 0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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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스위스 우주 기업 ‘비욘드 그래비티’의 엠멘 공장에 세워진 로켓 페어링. 비욘드 그래비티 2 3월 23일 ARIS에서 우주탐사 로봇을 만드는 팀 ‘폴라리스’의 부매니저 리처드 루딘(22)이 자기들이 진행한 프로젝트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3 3월 26일 스위스 로잔연방공과대(EPFL)의 ‘MAKE 프로젝트’에 참여 중인 로켓 팀 학생들이 자기들이 만든 로켓 앞에 서 있다. 4 3월 25일 스위스 베른대 우주 연구 및 정밀 기계 실습실에서 근무 중인 2년 차 기계 기술자(Polymechanic) 견습생 루카 가우치가 설명하고 있다. /사진 김송이 기자

3월 27일(이하 현지시각), 스위스 루체른 엠멘 공군기지 인근에 있는 우주 기업 비욘드 그래비티 공장. 거대한 미닫이문을 열고 들어서자, 높이 약 20m에 달하는 반원뿔 형태 구조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발사체에 실려 우주로 향하는 인공위성 등 탑재체를 열과 공기저항으로부터 보호하는 페어링(덮개)이다.

페어링은 발사 후 일정 고도에서 두 개로 분리된다. 정해진 시점에 양쪽이 정확히 갈라지는 기술은 우주 발사체 분야 핵심 기술로 꼽힌다. 지난해 말 남미 프랑스령 기아나에서 발사된 유럽우주국(ESA)의 차세대 발사체 ‘아리안 6’에도 비욘드 그래비티의 페어링과 단열재가 적용됐다. 이 회사는 전 세계 로켓의 ‘지붕’이라 불리는 페어링 시장에서 최대 60%를 차지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비욘드 그래비티의 경쟁력은 스위스가 오랜 기간 축적해 온 정밀 기술에서 비롯된다. 스위스는 자국 영토 내에 로켓 발사대를 보유하고 있지 않지만, 정밀 제조 역량을 기반으로 ‘우주 강국’으로 자리 잡았다. 미국이나 중국처럼 대형 로켓 개발에 집중하기보다는 발사체와 위성을 작동시키는 초정밀 부품과 소재 기술에 주력해 온 결과다.

스위스 기술력은 인류의 우주탐사 역사 곳곳에서도 확인된다. 1969년 아폴로 11호를 통해 인류가 처음 달에 착륙했을 때 우주비행사들이 달 표면에 맨 먼저 설치한 장비는 미국 국기가 아니라 스위스 베른대 연구진이 만든 ‘태양풍 측정 장치’였다. 스위스의 우주 기술은 이처럼 대학 연구실에서 시작돼 산업계로 유입되며 독보적인 생태계를 구축했다. 이 같은 생태계는 실무형 인재와 민간 중심상향식 혁신 구조가 함께 만든 결과다.

실패의 경험을 자산으로… 실무형 인재 육성

3월 23일 스위스 취리히 뒤벤도르프에 있는 스위스 이노베이션 파크에서 만난 취리히연방공과대(ETH) 소속 우주공학 학생 단체 아리스(ARIS)의 리처드 루딘(22)은 “우리 모두 엔지니어를 목표로 하는 만큼 실무 경험이 필요하다. 이론만 배운 엔지니어를 현장에 바로 투입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2017년 ETH의 한 강의실에서 시작한 ARIS에는 현재 300여 명의 학생이 세 개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다.

ARIS는 ETH에서 시작됐지만 자금 모금 등 프로젝트 운용은 모두 학생 몫이다. 학교는 교수진이 필요할 때 자문을 제공하고, 학생의 실무 연구 시간을 학점으로 인정해 주는 역할 정도를 맡는다. ARIS의 로켓 연구팀 ‘아스테리아’는 유도 회수 시스템을 탑재한 재사용 로켓 ‘니콜리에(NICOLLIER)’를 개발·발사해 미국 CNN에 소개되기도 했다.

자체 프로젝트를 통한 실무 경험은 일부 학생만의 특권이 아니다. 다른 대학도 학생의 실무 경험을 위한 다양한 제도를 운용하고 있다. 로잔연방공과대(EPFL)의 ‘메이크(MAKE) 프로젝트’가 대표적이다. EPFL의 우주 연구·교육 총괄 조직인 ‘우주센터(Space Center)’가 공간과 일부 자금을 지원하고 지도 교수를 연결해 주면, 팀 구성과 운영은 학생이 맡는다.

자율성이 높은 만큼 실패 책임도 학생 몫이다. 그러나 3월 26일 EPFL에서 만난 학생들은 실패를 크게 두려워하지 않았다. 로켓 팀 소속 팔로마 가르시아(23)는 “재작년 유럽 대학생 로켓 대회에서 낙하산이 작동하지 않아 착륙에 실패했다. 지난해에도 기대한 만큼의 성과는 아니었지만, 낙하산이 정상 작동한 것만으로도 모두가 기뻐했다”며 “우리는 무언가 성취한다는 것 자체에 의미를 두고, 그 경험을 바탕으로 다음 단계에서 무엇을 개선해야 하는지를 배운다”고 말했다.

이런 경험은 자연스럽게 창업으로 이어진다. ETH는 1973년 이후 661개의 스타트업을 배출했고, EPFL에서도 500개 이상의 스타트업이 탄생했다. 우주 쓰레기 제거 기술로 유명한 ‘클리어 스페이스’가 EPFL에서 분사된 스타트업이다. 인구 1000만 명이 채 되지 않는 스위스가 혁신 강국으로 자리 잡은 배경에는 이론을 실무로 검증하고, 실패를 자산으로 축적하는 STEM(과학·기술·공학·수학) 인재 육성 시스템이 자리하고 있는 셈이다.

스위스의 혁신 인재 양성 시스템은 대학 이전 단계에서도 진행된다. 혁신 경쟁력의 핵심이 ‘사람’인 만큼, 인재 양성은 고등교육에만 머물지 않는다. 스위스에서는 의무교육이 끝나는 중학교 졸업 시점에 학생 약 3분의 1만이 대학 진학을 위한 일반 교육과정을 선택한다. 나머지는 실무와 이론을 병행하는 직업교육(VET) 과정을 택한다. VET 견습생은 일주일 중 1~2일은 학교에서 이론을 배우고, 3~4일은 기업에서 실무 교육을 받는다.

3월 25일 만난 2년 차 기계 기술자(Poly-mechanic) 견습생 루카 가우치(18)는 일주일에 3일 베른대 우주 연구 및 정밀 기계 실습실에서 근무하며 실무 경험을 쌓고 있다. 그는 “학교 공부가 어렵고 흥미도 많지 않았지만, 현장에서 일하며 우주공학에 관심을 두게 됐다”며 “VET 과정을 마친 뒤 대학 진학 자격을 얻게 되면 대학 공부를 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민간 주도에 정부는 돕기만 할 뿐… '상향식' 체제의 힘

스위스가 우주 강국으로 도약할 수 있던 또 다른 요인은 대학과 기업이 중심이 되는 ‘보텀업(bottom up·상향식)’ 체제다. 스위스 우주 정책을 총괄하는 스위스우주국(SSO) 인력은 단 15명에 불과하다. 정부가 산업 방향을 일방적으로 정하지 않고, 기업과 대학 등 민간 현장에서 탄생한 아이디어가 산업의 흐름을 이끈다. 스위스 정부는 그 흐름이 확인된 이후에야 지원에 나선다.

이러한 상향식 구조는 스위스 이노베이션센터에서 구체적으로 구현된다. 스위스 이노베이션센터는 산학연 혁신 생태계 구축과 연구 상용화를 위해 정부와 민간이 협력해 설립한 비영리 기구다. 현재 취리히, 로잔 등 전국 여섯 곳에 이노베이션파크를 운영 중이며, 약 700개 기업과 연구 기관이 입주했다.

스위스 이노베이션파크는 단순한 사무 공간을 넘어 기업, 연구자, 공공기관을 잇는 ‘플랫폼’ 역할을 한다. 국제우주정거장(ISS) 실험으로까지 확장된 ‘포물선(Parabolic) 비행 프로그램’도 2015년 연구자의 호기심에서 출발했다. 항공기를 포물선 궤적으로 비행시켜 무중력상태를 만든 뒤 물리·생명과학 실험을 수행하는 이 프로그램은 10년 넘게 운용됐다.

이 연구에 참여했던 코라 티엘 스위스·리히텐슈타인 우주항공센터(CSA) 국제협력디렉터는 “좋은 아이디어가 있으면 정부 지시를 기다리지 않고 스스로 시작한다”며 “이렇게 출발한 프로젝트가 유기적으로 성장해 성과를 입증하면 그때 정부가 지원에 나서는 구조”라고 설명했다.

정부 개입을 최소화한 구조는 역설적으로 높은 효율을 낳았다. 학계와 기업은 단기 성과에 매몰되지 않고 장기적인 ‘파괴적 혁신’ 에 집중할 수 있게 됐다. 이러한 환경 덕분에 스위스는 세계혁신지수(GII)에서 15년 연속 1위를 기록 중이다.

제도적 뒷받침도 강력하다. 규제는 완화하되 지식재산권(IP) 보호는 철저하다. 평균 법인세율은 약 12% 수준이며, IP 소득에 대해서는 최대 90%의 세제 혜택을 준다. 특히 ‘유럽 속의 미국’이란 말이 나올 정도로 스위스는 기업 친화적인 환경을 갖추고 있다. 이에 힘입어 구글은 미국 외 최대 규모의 연구개발(R&D)센터를 취리히에 세웠고, 마이크로소프트(MS), 애플, 메타, 엔비디아 등 글로벌 빅테크(대형 정보기술 기업)도 스위스를 유럽 거점으로 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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