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 너머] 반도체 ‘타이밍’⋯노인은 아는데, 정치인은 몰라

최근 바쁜 서울을 떠나 경기 용인시 처인구 이동읍을 찾았다. 차량 소음과 사람들로 가득한 도심과 달리, 밭과 산으로 둘러싸인 이곳은 시간의 속도가 한 박자 느린 듯했다.
밭을 돌보는 노인들, 함바집에 삼삼오오 모여 식사를 하는 인부들. 고요하고 한적한 풍경 속에서 이곳이 대규모 국가산단 반도체 클러스터 부지라는 사실은 아직 실감 나지 않는다. 겉으로는 평온하지만, 그 아래에는 보이지 않는 갈등과 변화의 조짐이 켜켜이 쌓여 있다.
이곳에서 만난 한 노인은 뿌듯한 얼굴로 자신이 키우는 땅콩을 소개했다. 매년 봄에는 땅콩을, 겨울에는 김장 채소를 심으며 이모작을 이어왔다고 했다. 하지만 올해 7월 땅콩을 수확하고 나면 그는 보상을 받고 이곳에서 떠나야 한다. 더 이상 김장 채소를 심지 못한다.
“손주 생각해서라도 빨리 지어야지.”
곧 떠나야 하는 그는 보상 절차를 당연한 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나라를 위해 필요한 일이라면 서둘러 협조해야 한다는 말도 덧붙였다.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조성 사업은 현재 토지 보상이 진행 중이다. 절차가 흔들리지 않도록 정부와 지자체의 세심한 관리가 필요한 상황이다. 종중 땅과 분묘가 많은 임야 지역 보상, 임시 거주지 확보 문제 등이 남아 있다.
그래서 현장에는 분명 크고 작은 불만이 존재한다. 그러나 방향 자체에 대한 이견은 크지 않아 보였다.
마을 곳곳에는 ‘결사반대’라는 거친 문구의 현수막이 걸려 있지만, 정작 주민들과 대화를 나눠보면 분위기는 다소 다르다. “반도체 공장 들어온다는데 진행돼야지”, “이왕 한다는 거 잘 돼야지”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나온다.
문제는 현장이 아니라 그 위에서 만들어지고 있다. 최근 정치권에서 불거진 ‘반도체 클러스터 이전론’은 사업 전반에 불필요한 불확실성을 키웠다. 지금 당장 착공이 늦어진 상황은 아니지만, 지방선거를 앞두고 표심을 의식한 발언 하나가 변수로 작용할 수 있다는 우려는 커지고 있다. 여러 요소가 겹칠 경우 사업 일정 전반이 흔들릴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반도체 산업은 타이밍이 곧 경쟁력이다. 특히 인공지능(AI) 확산으로 고성능 메모리와 데이터센터 투자가 급증하는 상황에서 생산 능력 확보 시점은 기업의 성패를 좌우한다. 글로벌 기업들이 막대한 자금을 투입해 선제적으로 설비를 확보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몇 달의 지연이 단순한 일정 문제가 아니라 시장 주도권의 문제로 이어질 수 있는 구조다.
땅콩을 키우던 노인은 반도체 산업은 잘 모른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이렇게 말했다.
“같이 사는 거지. 혼자만 살겠다고 그러면 못 써.”
삶의 터전을 떠나야 하는 사람이 할 말치고는 담담했다. 그러나 그 말은 오히려 지금 상황을 가장 정확하게 설명하는 문장에 가까웠다. 현장은 이미 변화를 받아들일 준비를 하고 있다. 필요한 것은 그 위에서의 책임 있는 판단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방향을 다시 논의하는 일이 아니라 이미 정해진 방향을 흔들림 없이 추진하는 일이다. 착공이 늦어지지 않게 만드는 것은 지금의 선택에 달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