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성함·풍자의 즐거움 다시 또 새롭게, 보테로

윤승민 기자 2026. 4. 26. 2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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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창간 80주년 기념 ‘페르난도 보테로:형태의 미학’전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 한가람디자인미술관에서 개막한 ‘페르난도 보테로 : 형태의 미학’ 전경. 예술의전당 제공

11년 만에 열리는 대규모 개인전
서거 후 발견된 작품들도 첫 공개
명화 패러디·투우·서커스 등 주제
양감 부각·크기 왜곡이 주는 묘미

작품만 봐도 이름이 단번에 떠오르는 작가들이 있다. 페르난도 보테로(1932~2023)는 그 중 하나다. 고전과 근대 명작에 특유의 풍성한 양감을 입힌 그의 ‘패러디’는 보는 이에게 즐거움을 끌어낸다.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 한가람디자인미술관에서 지난 24일 개막한 경향신문 창간 80주년 기념전 ‘페르난도 보테로: 형태의 미학’은 보테로가 평생 추구하며 그렸던 풍성한 양감의 그림과 만날 수 있는 자리다. 2015년 예술의전당 전시 이후 11년 만에 국내에서 열리는 보테로의 대규모 개인전으로, 페르난도보테로재단과 보테로 연구자 크리스티나 카리요 데 알보르노스가 공동기획해 이탈리아 로마, 스페인 바르셀로나, 아제르바이잔 바쿠를 거쳐 서울에 이른 순회전이다. 보테로 서거 후 그의 작업실 등에서 발견돼 처음 공개되는 작품들을 포함해 회화와 드로잉, 조각 등 총 112점이 선을 보인다.

보테로 하면 떠오르는 명화 패러디 작품이 먼저 눈길을 끈다. 그는 스페인과 이탈리아에서 고전 명작을 따라 그리면서 본인만의 화풍을 일찍이 정립했다. 보테로의 작업실에만 보관됐다가 순회전을 통해 처음 공개되는 ‘벨라스케스를 따라 그린 시녀들’(2006)이나 ‘마티스를 따라 그린 오달리스크’(2022) 등에서 보듯 16~17세기 명작 속 인물은 보테로의 방식대로 풍성하게 그려졌다. 작품 연대에서 알 수 있듯 서거 직전까지도 작업을 꾸준히 해왔다. 얼굴이 크고 볼살은 두툼하지만 이목구비는 작다. 팔은 두껍지만 그 끝의 손은 작다. 현대 귀여운 캐릭터가 그려지는 방식이다. 슬며시 웃음이 나온다.

‘벨라스케스를 따라 그린 시녀들’(2006)은 보테로가 서거한 후 그의 작업실에서 발견되어 이번 순회전을 통해 처음 공개됐다(위 사진). 보테로가 ‘투우’를 주제로 그린 작품들도 별도로 전시돼 있다. 예술의전당 제공


보테로는 생전 ‘왜 뚱뚱한 사람을 그리느냐’는 질문을 받으면 “뚱뚱한 사람을 그린 적이 없다”고 답했다. 풍성한 양감을 부각해온 이유도 뚜렷하게 밝힌 바 없다. 다만 보테로는 생전 “예술은 보는 이에게 즐거움을 줘야 하고 보편적이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래서인지 얼굴과 신체가 풍성한 사람을 그렸고 축제, 서커스 등 즐거운 시간을 주제로 삼았다. 보테로의 작품을 6가지 주제로 나눈 이번 전시에 ‘서커스’와 ‘투우’가 별도의 주제로 자리하는 것은 그래서다.

네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낸 보테로는 열두 살 때 삼촌의 영향으로 투우 학교에 입학했다. 소에도 받히며 투우사의 길은 접었지만, 소와 투우사, 투우를 그리는 데는 흥미를 느끼며 평생 투우와 관련된 회화나 드로잉을 200점 넘게 그렸다고 한다. 서커스 또한 보테로가 어린 시절 고향 메데인에서 접했던, 추억이 담긴 요소다.

전시의 한 부분을 차지한 ‘정물’에서는 보테로 특유의 기법을 확인할 수 있다. ‘배’(1976)에서는 가로·세로 모두 2m에 이르는 대형 캔버스를 누런색 배가 가득 채웠는데, 오른쪽 위를 보면 누군가 입으로 베어 문 흔적이 있다. 흔히 아는 배를 한 입 베어 문다면 절반 가까이 자국이 남을 텐데, 보테로는 자국을 배에 난 상처처럼 작게 그렸다. 중간에는 과육을 뚫고 빼꼼히 얼굴을 내민 벌레가 보이는데 역시 배의 크기와 비교하면 터무니없이 작다. 보테로가 단순히 신체 일부를 크고 귀엽게 그리는 데 초점을 맞춘 게 아니라는 점을 알게 된다. 어떤 부분은 크고, 다른 부분은 아주 작게 그려서 특정한 부분을 도드라지게 만들었다.

‘배’(1976)에선 캔버스를 채운 누런 배 오른쪽 위에 아주 작게 베어 문 흔적이 보인다(위 사진). ‘바티칸의 욕실’(2006)은 욕조에 누운 성직자와 수건을 들고 선 하위 성직자의 대조적 크기가 권력을 풍자한다. 예술의전당 제공·윤승민 기자


이런 특징은 명작 패러디뿐 아니라 그가 그린 풍자화에서 더욱 잘 드러난다. 그가 태어난 콜롬비아는 정부와 반군이 반세기 넘게 내전을 치르고, 정치인들과 교회 권력은 부패한 나라였다. ‘바티칸의 욕실’(2006)에서는 가톨릭 성직자가 너비 2m의 캔버스를 메운 욕조에 옷을 입은 채 누워 있는 동안 욕조보다도 키가 작은 하위 성직자가 수건을 든 채 서 있다. ‘교황 대사’(2004)에서는 백인 성직자의 뒤로 피부가 어두운 하위 성직자가 우산을 들고서 따르는데, 하위 성직자의 키는 백인 성직자의 허리에 미칠 정도로 작다.

대상의 대조적인 크기는 권력을 풍자하는 데도 쓰인 셈이다. 보테로는 콜롬비아의 마약왕 파블로 에스코바르의 죽음이나, 미군이 이라크 전쟁 중 아부 그라이브 교도소에서 포로들에게 저지른 만행을 작품으로 그리며 사회 문제를 직격하기도 했다.

보테로는 자신이 자란 중남미, 특히 콜롬비아의 풍경도 그려왔다. 어린 시절 메데인에서부터 본 지역의 권력자와 귀족, 매춘부까지 다양한 계층의 인물이 등장한다. 한 엄마와 세 아이가 나오는 ‘미망인’(1997)처럼 자전적인 내용도 담겼다. 지역사회의 어두운 면을 드러내면서도 보테로의 그림은 즐거움을 잃지 않는다. 풍성한 몸, 그리고 형형색색으로 표현된 지역의 축제는 자신이 자란 지역을 향한 그의 애정을 짐작하게 한다.

전시는 8월30일까지. 관람료는 일반(만 19~64세) 2만3000원.

윤승민 기자 mea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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