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적]피해자 연대가 이끈 전세사기법

소설가 김훈은 2019년 10월 ‘생명안전 시민이야기 마당’에서 “집에 누워 있으면 사람들 몸 터지는 소리가 매일매일 들린다”고 말했다. 매년 2000명가량의 노동자가 산업재해로 목숨을 잃는 현실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는 “돈이 많고 권세가 높은 집 도련님들이 산재로 죽었다면 이 문제는 진즉 해결됐다”고 했다. 하지만 “산재 현장에서 돌아가시는 분들은 거의 대부분이 가난하고 교육을 잘 못 받고, 말하자면 돈도 ‘빽’도 없는 사람들”이다.
돈도 없고 ‘빽’도 없는 노동자들이 ‘여의도 정치’를 조금이라도 움직일 수 있는 좁은 길은 연대와 싸움이다. 산업안전보건법 개정의 역사는 노동자들의 죽음과 투쟁의 역사다. 떨어져 죽고, 깔려 죽고, 끼여 죽거나 병들어 죽은 노동자의 동료, 노조, 노동안전보건 활동가들이 연대해 싸웠기 때문에 산안법은 이윤보다 생명에 무게중심을 두는 방향으로 개정됐다.
지난 23일 전세사기 특별법(전세사기 피해자 지원 및 주거 안정 특별법) 개정안이 국회 본회의 문턱을 넘었다. 개정안의 핵심은 피해자 임차보증금 중 최대 3분의 1을 국가가 보장하는 것이다. 2023년 5월 특별법 제정 뒤 약 3년 만에 피해자 다수가 적용받을 수 있는 실질적 피해구제 장치가 마련된 것이다.
전세사기 특별법 제·개정의 역사는 산안법 개정의 역사와 닮았다. 2023년 2월부터 석 달간 인천 미추홀구에서 피해자 4명이 잇따라 목숨을 끊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전세사기 피해 사례들이 부각되기 시작했다. 피해자들은 “국가 시스템의 방치 속에 모든 걸 잃었다”며 전세사기는 사회적 재난이라고 외쳤지만 ‘개인의 불찰’이라는 편견도 만만치 않았다. 피해자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서울 동작구 아트하우스 전세사기 피해자들은 누군가는 등기부등본을 분석했고, 누군가는 엑셀 정리를 했고, 누군가는 언론 인터뷰에 나서는 등 각자 할 수 있는 일을 찾았다. 이런 연대가 특별법 개정을 이끌어냈다.
아직 갈 길이 멀다. 피해자들의 일상은 아직 회복되지 않고 있고, 지난달 발표된 전입신고 즉시 대항력 발생, 공인중개사의 설명 책임 강화 등 전세사기 예방 대책은 입법을 거쳐야 한다. 예방 대책만큼은 정부·국회의 선제적 대응이 동력이 되길 기대해본다.
김지환 논설위원 baldki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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