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줌인] "여자도 남자도 똑같은 인간" 남녀평등 전파
1904년 공주 파견, 선교·교육 등 헌신
남편 샤프 목사와 초가집서 교회 시작
결혼 3년만에 남편 사망… 귀국길 올라

1900년 봄 파란 눈의 여성 선교사 한 명이 제물포항에 도착했다. 미국 본토에서 하와이, 일본을 거쳐 1개월의 긴 항해 끝에 조선에 발을 내디딘 29세의 앨리스 J. 해먼드였다.
해먼드는 1871년 캐나다 노바스코샤주 야머스 시에서 태어나 기독교 가정에서 자랐다. 10대때 기독교 신앙인으로 살아가기로 마음을 굳혔으며, 1897년 미국 뉴욕 브루클린에 있는 감리교 연합선교학교에 입학, 1900년에 졸업했다. 오하이오 주에서 교역자로 일하다 미국 북감리회에 의해 한국으로 파견됐다.

한국에서 그녀가 처음 담당한 일은 서울 남대문 근처 상동교회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일이었다. 교회에 다니는 여학생들이 영어 교육을 원했기 때문이다. 해먼드는 전도에도 힘을 기울였다. 한국인 전도부인과 함께 가정을 방문하여 기독교를 전파했다. 15~20일 일정으로 서울과 경기도 남부 일원으로 전도를 다녔다. 선교를 하기 위해 한국어도 열심히 배웠다.
1903년 6월 해먼드는 목사인 로버트 아서 샤프와 결혼식을 올린다. 남편 샤프는 해먼드처럼 캐나다 출신으로 미국 브루클린의 선교학교를 졸업했다. 1900년 오벌린 대학교에 입학, 1903년 대학교를 마치고 북감리회 선교사로 한국에 파견됐다. 그해 5월 서울에서 무어 목사로부터 목사 안수를 받았다.
해먼드와 샤프는 미국 브루클린 선교학교 때부터 알고 지낸 사이였다. 당시 샤프가 청혼을 했으나 해먼드가 대답을 미룬 채 한국으로 건너왔고, 샤프가 한국에 파견됨에 따라 2년 만에 다시 만나 결혼을 하게 된 것이다. 결혼식은 윌리엄 A. 노블 목사의 주례로 이화학당의 메인홀에서 열렸다. 결혼을 하면서 그녀의 이름은 남편의 성을 따라 앨리스 하먼드 샤프가 됐다. 당시 조선 사람들은 남편의 성인 샤프를 따서 사(史)씨를 만들고 이름 엘리스를 애리시(史愛理施)로 표기하여 '사애리시' 혹은 '사부인'이라고 불렀다. (이하 사애리시로 표기)

사애리시는 남편 샤프 목사가 공주 선교부 책임자로 임명되어 1904년 11월 함께 이사하게 된다. 이들 부부는 매우 열악한 환경에서 선교를 시작했다. 그들이 인수받은 공주시내 교회는 이전에 50센트를 주고 마련한 농가로 짐과 침대만 들여놓아도 꽉 찰 정도였다.
자그만 집을 빌려 예배를 드렸는데 주로 남자들만 교회를 다녔다. 당시만 해도 남녀유별이 엄격했고, 여성들은 바깥 출입을 못하게 했다. 남자 신도가 아내와 딸을 데리고 나와도 멀찍이 떨어져 예배를 드렸다. 사애리시는 여성들에게 "여자도 남자도 하나님 앞에서는 똑같은 인간"이라고 강조했다. 여성들 스스로 자신들도 소중한 존재이고 남녀가 평등하다는 의식을 갖도록 한 것이다.
사애리시는 초가집 교회에서 여성선교를 하고 야간에는 사경회를 열었다. 사경회(査經會)는 성경을 집중적 체계적으로 공부하는 한국 특유의 선교 방식이었다. 신도들이 며칠 동안 함께 숙식을 하며 목사나 전도사로부터 성경을 배우고 토론과 질문도 병행하며 신앙의 깊이를 더했다. 여성들이 사경회에서 한글을 깨우치는 것도 큰 소득이었다. 사에리시 부부는 100여리 안팎을 오가며 복음을 전했다.



미국 감리교회는 1902년 공주에 김동현 전도사를 파견하여 농가를 확보하여 전도를 시작했고, 1903년 의료 선교사인 윌리안 B. 맥길이 부임하여 하리동(현 영명학교 자리)에 초가 2동을 구입, 제일교회의 터를 닦았다. 맥길은 의료 선교사로 진료소도 운영했는데, 1905년 맥길이 귀국함에 따라 샤프와 사애리시 부부가 이를 그대로 이어받아 운영했다.
1905년 6월에는 공주에서 70리 떨어진 논산에 교회(논산제일감리교회)를 지어 예배를 시작했다.
공주시내에 선교사 사택도 지었다. 윌버 C. 스웨어러(서원보) 선교사가 확보해 놓은 하리동 언덕 위에 선교사 가족들이 생활할 공간을 짓기로 한 것이다.

1905년 2월부터 시작한 건축은 11월에 마무리 됐다. 자금이 부족하여 남편 샤프목사가 설계를 하고 선교사들이 직접 벽돌을 구웠으며, 수십리 산길을 헤치며 나무를 구해다 집을 완성했다. 붉은 벽돌로 외벽을 장식한 2층 양옥은 매우 아름다웠고, 공주의 명소가 돼 구경꾼이 끊이지 않았다. 사애리시 부부는 사택을 구경하러 온 사람들에게 커피와 과자를 나눠주고 복음서도 제공했다. 자연스럽게 선교 기지로 자리 잡은 것이다.



사애리시 부부와 선교사들은 공주를 비롯 충남의 부여 논산 강경 서천, 충북의 문의 충주 보은까지 선교의 무대를 넓혔다. 충청도 곳곳에 55개의 교회가 세워졌다. 당시 교회는 요즘처럼 십자가가 돋보이는 큰 공간이 아니라 대개 기존의 한옥을 활용하여 예배를 봤다. 이들 부부는 학교 설립에도 나선다. 기존의 학교는 대개 일본이 세운 학교로 일본인 자녀와 살림이 넉넉한 조선인 가정의 남자 아이들만 다녔다.
사에리시 부부는 공주시민들이 요청에 따라 1904년 남학생들이 다니는 명설학당, 1905년에는 여학생을 위한 명선여학당을 열었다. 남녀 차별이 없었고, 학비와 교과서 학용품도 무료로 제공했다. 여기서 배운 여학생들은 전도를 돕고, 성경공부반 반장으로 활동했다. 사애리시는 뛰어난 학생이 서울의 이화학당에 다니도록 추천서를 써주는 등 미래의 인재를 키웠다.
충청권 선교와 교육, 의료사업에 헌신하던 사애리시는 1906년 뜻하지 않은 불행을 만난다. 그해 2월 강경과 논산으로 선교에 나섰던 남편 샤프 목사가 중병에 걸린다. 진눈깨비를 피하기 위해 상엿집에 머물렀는데, 그 안의 사체로부터 발진티푸스에 감염된 것이다. 서울에 있던 스크랜튼 박사가 급히 공주로 내려와 치료했지만 끝내 3월5일 숨을 거둔다. 한국에 온 지 3년, 공주의 새집(사택)에 입주한 지 4개월 만에 세상을 뜬 것이다.



샤프를 치료했던 스크랜튼 박사는 추도사에서 "그는 인생의 마지막 2년 동안 부인(사애리시)과 함께 큰 짐을 맡았다. 수백리에 달하는 선교구역과 띄엄띄엄 흩어져 있는 교인들, 수백 곳을 헤아리는 교회와 2000 명이 넘는 교인들이 있다. 두 사람은 집을 짓고 감독하고 훈련할 조사(helper 전도 도우미)의 강습도 맡았다."라고 기록했다. 사애리시 부부가 얼마나 열성적으로 선교에 임했는지를 보여주는 기록이다.
남편이 죽자 사애리시는 1906년 4월말 귀국길에 오른다. 명설학당과 명선여학당은 스웨어러 목사의 부인(May Shattuck 서사덕)에게 맡겼다.
사애리시는 공주를 떠나며 "공주에는 여성들이 머물 수 있는 집과 두 명의 전도사업 담당자가 필요하다. 할 일은 엄청나고 그 짐을 홀로 감당하기에는 너무 벅찬데 도울 사람이 없다."며 걱정했다. 교인들은 강(금강)을 함께 건너 눈물을 흘리며 배웅했다.
그는 서울의 미국 감리교회 선교사와 목회자들에게 "하나님께서 왜 내게 이처럼 혹독한 시련을 주시는가 하는 마음도 없지 않지만, 이별은 뒤에 있지만 앞에는 만남이 있다는 말을 되새기며 이 큰 슬픔을 이겨내기 위해 보다 적극적으로 살고…. "라는 말을 남기고 미국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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