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퍼드 굶겨 방에 풀었다” 김일성의 2인자 숙청법 [호준석의 역사전쟁]
1950년 11월 7일. 북한 수뇌부는 국군과 유엔군의 공세에 중국 접경 지대까지 쫓겨 가 있었습니다. 인민군 최고사령부는 압록강 주변 고산진, 내각은 자강도 강계의 임시 방공호에서 업무를 봤습니다. 이날은 공산주의 소련을 탄생시킨 ‘러시아혁명 기념일’이었습니다. 강계에서 가까운 만포진에 임시 설치된 북한 주재 소련 대사관에서 축하 파티가 열렸습니다. 김일성, 박헌영, 김두봉 등 정권 수뇌부 30여 명도 초청됐습니다.
이날 6·25전쟁 주범인 39세 김일성은 주위에서 주는 술을 다 받아마셨습니다. 패전의 분노를 삭이지 못하는 모습이었습니다. 반면 정권 2인자이자 남로당 우두머리인 51세 박헌영은 평소 술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맞은편에서 소련 대사 라소바예프, 공사 둔킨과 대화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취한 김일성이 갑자기 박헌영에게 이렇게 도발했습니다. “스탈린 대원수께 패전의 원인을 어떻게 보고하려 하는가?”
박헌영이 받아쳤습니다. “패전 원인을 왜 부수상이 보고하나. 최고사령관인 수상 동지가 보고해야지”.
그러자 김일성은 “여보, 이론가, 지난 4월 모스크바에서 당신 입으로 스탈린 대원수에게 ‘인민군이 산보하듯 서울까지만 밀고 내려가면 남로당원 수백만 명이 폭동을 일으켜 남한은 곧바로 집어삼킬 수 있다’고 하지 않았는가”라며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이론가’는 김일성이 박헌영을 비꼬아 부르는 호칭이었습니다.
소련군 대위 김일성이 출현하기 전까지 ‘조선의 레닌’으로 떠받들려지던 박헌영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그는 김일성과의 경쟁에서 이기려고 남한에서 숱한 살인, 방화, 테러를 저지른 인물이었습니다. “차질이 있었소, 솔직히 시인하지. 그러나 최고사령관인 수상 동지는 패전의 결정적 요인들에 대해 답해야 할 거요. 첫째, 서울이나 후방에 군대를 하나도 남기지 않고 왜 낙동강으로 다 보냈는가. 그러니 후퇴할 때 다 독 안에 든 쥐가 되지 않았는가. 둘째, 미군 상륙 작전에 대한 정찰대의 정보가 늦어 많은 인민과 인민군이 희생됐는데 이것도 최고사령관 책임 아닌가?”
급소를 찔린 김일성은 이성을 잃었습니다. “야, 이 자식아. 만약에 전쟁이 잘못되면 나뿐 아니라 너도 책임이 있다. 무슨 정세 판단을 그렇게 하고, 보고를 그렇게 했는가”라며 책상 위 잉크병을 박헌영에게 집어던졌습니다. 박헌영은 피했지만 잉크병은 벽에 부딪혀 박살이 났습니다.

소련 대사 라스바예프가 “최고 지도자들끼리 무슨 짓인가. 남의 잔치를 난장판으로 만들려는가.”라며 화를 냈지만 둘은 계속 폭언을 내뱉으며 싸웠습니다. 소련 공사 둔킨이 김일성과 박헌영의 부하들에게 “빨리 저 개싸움을 말리지 않고 뭘하느냐”고 호통을 치자 그제야 자리는 정리됐습니다.

이 내용은 당시 현장에 있었던 박길룡 전 북한 외무성 부상(1959년 소련 망명)이 강상호 전 북한 인민군 총정치국장(1959년 소련 망명)에게 증언한 것입니다.(1993년 2월 16일 자 중앙일보 강상호 기고) 김일성과 박헌영의 충돌은 이날이 처음이 아니었습니다. 인천상륙작전으로 북한군이 패주하던 1950년 10월 8일 둘은 평양 모란봉 지하의 김일성 집무실에서 심한 언쟁을 벌였습니다. 김일성은 포위된 군대를 남한의 산악으로 보내 유격전을 시켜야 한다고 주장했고, 박헌영은 즉각 철수시켜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중국 대사 예지량이 이 장면을 목격했습니다. 11일 뒤인 10월 19일 평양은 국군과 유엔군에 점령됐습니다.
하늘 아래 두 개의 태양은 없습니다. 냉혹한 공산 독재 체제에서는 더 그렇습니다. 김일성과 박헌영의 충돌은 예정된 것이었습니다. 1925년 25세에 여운형 등을 제치고 조선공산당 창당을 주도했고 일제 치하에서도 공산당을 지킨 박헌영에게 갑자기 나타난 김일성은 핏덩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나 상황은 그의 자존심과는 다르게 흘러갔습니다. 1946년 7월 말 스탈린은 김일성과 박헌영을 모스크바로 불렀습니다. 김일성에게는 “소련군정의 협력을 받아 북한의 소비에트화(소련화)를 조기 실현하도록 투쟁하라”고 지시했습니다. ‘네가 북한 정권 책임자’라는 낙점이었습니다. 반면 박헌영에게는 “어려운 여건 속에서 분투하는 혁명 투쟁을 높이 평가한다”는 덕담만 해줬습니다.

권력의 저울추는 급격히 기울었습니다. 더구나 1946년 가을 박헌영은 거액의 위조지폐를 찍은 사건으로 월북하면서 김일성의 셋방살이 신세가 됐습니다. 1948년 9월, 36세 김일성은 정권 1인자인 수상이 됐고 48세 박헌영은 그 아래 부수상이 됐습니다. 그래도 둘의 동거는 한동안 계속됐습니다. 김일성에게는 박헌영의 ‘권위’가 필요했고, 박헌영은 김일성의 ‘권력’이 필요했습니다.

박헌영은 전세를 역전하려고 끊임없이 남한의 폭력 투쟁을 지시했습니다. 김일성 역시 ‘한반도 적화통일’을 위해 박헌영을 활용했습니다. 둘이 바라보는 한 방향은 남침전쟁이었습니다. 1949년 8월 김일성과 박헌영은 북한의 실질적 통치자인 소련 중장 스티코프에게 남침을 강력히 주장합니다.(<스티코프 비망록>) 미국과의 정면충돌이 부담스러웠던 스탈린은 전쟁을 승인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1949년 10월 마오쩌둥의 공산당이 중국을 장악하자 스탈린의 셈법은 바뀌었습니다. 소련 대신 중공(당시 명칭)이 전쟁 부담을 떠안으면 미국과 중공의 힘을 모두 뺄 수 있다는 계산이었습니다.

김일성과 박헌영은 1950년 3월 30일부터 4월 25일까지 소련 스탈린을, 5월 13일 중공 마오쩌둥을 함께 찾아가 남침을 승인받습니다. 이 중요한 방문에 김일성은 라이벌 박헌영을 왜 대동했을까. 소련과 중공이 ‘공산주의자 박헌영’의 권위를 인정하는 점도 작용했겠지만, 박헌영이 ‘남한 공작 총책임자’였기 때문입니다. 곁방살이를 하던 박헌영은 끊임없이 남로당의 위세를 과장했습니다. 스탈린에게 “인민군이 서울까지만 밀고 내려가면 남로당원들이 폭동을 일으켜 남한은 곧바로 집어삼킬 수 있다”고 보고한 것도 그래서였습니다.

박헌영의 호언장담은 완전한 허풍만은 아니었습니다. 1948년 8월 북한 정권 수립을 위해 남로당이 지하에서 실시한 ‘남조선 인민대표자 선거’에는 남한 유권자 850만명 중 80%인 700만명이 참여했습니다. 상당수가 과장·조작된 것이지만 김일성과 박헌영은 자신감을 얻었습니다. 남로당이 일으킨 제주4·3사건과 여수·순천사건은 진압되기는 했어도 한때 국가 존립을 흔들 정도였습니다. 특히 무력을 보유한 군 내 남로당 세력이 만만치 않다는 사실이 확인됐습니다. 지리산과 태백산 지구에는 ‘유격대’, 즉 남로당 빨치산들도 활개 치고 있었습니다.

박헌영에게 남침은 유일한 돌파구였습니다. 본거지인 남한을 손아귀에 넣으면 김일성과의 권력 경쟁도 해볼 만하다고 봤을 것입니다. 그러려면 남로당원들의 전국적 봉기가 반드시 일어나야 했습니다. 4·3 사건을 일으킨 뒤 월북했던 김달삼 등을 유격대로 남한에 침투시켰고, 6·25 직전에는 이중업 등 남로당 거물들이 비밀리에 월남해 전국에 파견됐습니다. 남침 한 달 전인 1950년 5월 17일, 평양 모란봉극장에서 열린 군 주요 지휘관 회의에서 박헌영은 “인민군이 서울만 점령하면 남로당원이 들고일어나 남조선 전 지역을 해방시킬 것이다. 인민군의 진격은 해방된 지역을 향한 승리의 행진이 될 것이다”라고 큰소리쳤습니다.

1950년 6월 25일 마침내 전쟁이 일어나고 서울은 3일 만에 함락됩니다. 김일성은 진격을 멈추고 서울에서 6일을 머무르며 인민 봉기를 기다렸습니다. 인명을 우습게 여기는 김일성이 인민군 희생을 줄이려고 진격을 멈춘 것은 아닙니다. ‘남한 인민들이 스스로 들고일어났다’는 명분이 있어야 미국이 개입하지 못할 것이라는 속셈이었습니다. 그러나 기다렸던 ‘인민 봉기’는 끝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1950년 6월 28일 박헌영의 방송 연설에는 그의 다급한 심정이 그대로 묻어납니다.

“인민군은 남조선 인민을 구하러 온 것입니다. 여러분의 원한을 풀어주고 역도들이 일으킨 내전을 끝내기 위해 진격해온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엄숙한 시기에 모든 남반부 인민들은 왜 총궐기를 하지 않습니까? 무엇을 주저하고 있습니까? 모든 사람들이 한 사람같이 일어서서 이 전 인민적, 구국적 정의의 전쟁에 적극적으로 참가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적의 후방에 있어서는 첫째도 폭동, 둘째도 폭동, 셋째도 폭동입니다. 전력을 다해서 대중적, 정치적 폭동을 일으키시오.” (하기와라 료(일본의 북한연구 전문가) <한국전쟁사> 중)
어쩌면 박헌영은 이미 인민봉기가 어렵다는 사실을 예감하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한 달 전 내려 보낸 이중업 등이 당 조직과의 접선조차 실패하고 빈손으로 올라왔기 때문입니다. 4.3사건과 여수순천사건 이후 국민들은 좌익의 폭력성에 등을 돌렸고, 1948년 12월 국가보안법이 제정되면서 남로당은 궤멸된 상태였습니다. 1949년 서울시당 부위원장 홍민표의 전향, 1950년 박헌영 대리자인 김삼룡,이주하의 체포로 남로당 조직은 해체 상태였습니다. 전체 병력의 10%에 달하던 국군 내 남로당원들도 숙군 수사로 모두 축출됐습니다. 남침 석 달 전에는 토지개혁이 단행돼 국민의 70%를 차지하던 농민들은 ‘목숨 걸고 내 나라, 내 땅을 지키자’는 마음이었습니다.

1950년 8월 15일 광복절 기념식을 부산에서 하겠다던 김일성의 망상은 물거품이 됐습니다. 나중에 김일성은 박헌영의 거짓말에 속았다며 이렇게 비난했습니다. “남조선에 당원이 20만은 고사하고 1000명만 있어서 부산쯤에서 파업을 하였더라면 미국 놈들은 발을 붙이지 못했을 것이다.”(1954.12.23. 인민군 간부회의)

김일성과 박헌영은 만포진 충돌 후 완전히 등을 돌렸습니다. 박헌영은 1950년 9월 중공군의 전쟁 개입에 공헌해 결과적으로 김일성을 살려줬지만 김일성의 마음을 돌리지는 못했습니다. 전쟁이 끝나가자 김일성에게는 패전 책임을 뒤집어씌울 희생양이 필요했습니다.

1953년 3월 박헌영이 체포됩니다. 김일성은 의아해하는 소련 대사에게 ‘박헌영이 종파를 만들고, 당 기밀을 미국에 누설했으며, 전쟁 패배의 원인을 만들었다’고 주장했습니다. 소련과 중공의 시선이 부담스러웠는지 김일성은 박헌영에게 집요하게 자백을 요구했습니다. 박헌영이 끝까지 거부하자 며칠 굶긴 셰퍼드를 방에 풀어 넣어 전신을 물어뜯게 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피투성이가 된 박헌영은 “다 인정할테니 빨리 총살하라”고 고함을 질렀습니다.(남로당 지하총책으로 숙청됐다 소련으로 망명한 박갑동의 저서 <박헌영> 중)

박헌영은 1955년 12월 15일 사형선고를 받고 1956년 7월 19일 총살됐습니다. 형장에서 그가 ‘역사의 날조자, 혁명의 찬탈자, 민족의 반역자, 인민의 원수 김일성을 타도하라’고 외쳤다는 기록도 전해집니다.(<혁명에 배반당한 비운의 혁명가들>(안성일 저)>

우리 민족 역사상 최대의 비극을 일으킨 두 냉혈한의 대결은 이렇게 끝났습니다. 만포진 충돌이 없었어도 박헌영은 제 명에 죽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김일성,박헌영,허가이,이승엽 등 조선노동당 초대 정치위원 10명 중 자연사한 사람은 김일성과 1951년 병사한 허헌 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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