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궁창성의 인문학 산책] 인열(仁烈)의 복주도(覆舟圖)

남궁창성 2026. 4. 26. 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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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13년(1635년) 12월9일 중전(中殿) 인열왕후(仁烈王后)가 숨졌습니다. 향년 42세. 대군의 죽음으로 인해 병이 위독해져 산실청(産室廳)에서 승하했던 것입니다.

사관의 평가입니다.

‘왕비 자리에 오른 지 13년 동안 외정(外政)을 궁 안에 들리게 하지 않았고, 내정(內政)을 궁 밖에 들리게 하지 않았다. 상(上)이 항상 복주도(覆舟圖)를 감상했는데 진언하기를 ‘바라건대 상께서는 이를 보시면서 위태로움과 두려운 바를 생각하시고 애완하는 물건으로만 여기지 마소서.’’

복주도는 배가 뒤집히는 그림입니다. 백성들이 거친 물이라면 임금은 물 위에 떠있는 조각배. 민심에 역행하는 위정자는 뒤집혀 버림을 받는다는 경계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중전이 숨지자 왕세자와 대군 이하는 관(冠)과 상복(上服)을 벗고 머리를 풀은 뒤 흰옷·흰장화·거친 베로 만든 버선을 신었습니다. 내명부(內命婦)의 빈(嬪) 이하와 왕세자빈 이하, 외명부(外命婦) 및 부부인(府夫人) 이하도 관과 상복을 벗고 머리를 풀고 흰옷·흰신발·거친 베로 만든 버선을 신었습니다. 백관은 천담복(淺淡服)·오각대(烏角帶)·오사모(烏紗帽)를 착용하고 추모했습니다.

여드레 후인 12월17일 중전의 시호(諡號)가 인열(仁烈)로 결정됐습니다. 인을 베풀고 의를 따르는 것(施仁服義)을 인(仁)이라 하고, 공로가 있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것(有功安民)을 열(烈)이라고 합니다. 중전의 시호에 그 의미를 담았습니다.
 
▲ 인조와 인열왕후가 잠들어 있는 경기 파주 소재 장릉(長陵)의 전경

인열왕후 청주(淸州) 한(韓)씨는 1594년(선조27년) 7월1일 강원도 원주 우소(寓所), 임시로 거주하는 곳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원주목사로 있던 서평부원군 한준겸(韓浚謙), 어머니는 회산 부부인 창원(昌原) 황(黃)씨입니다. 당시 임진왜란은 조·명(朝·明) 연합군이 일본의 주력 부대를 섬으로 밀어내고, 잔존 병력만 남해안에 주둔하고 있어 소강상태였습니다.

1610년(광해군2년) 선조(宣祖)의 손자이자 정원군(定遠君)의 장남인 능양군(綾陽君), 즉 인조와 길례를 올리고 청성현부인(淸城縣夫人)에 봉해졌습니다. 그리고 장남 소현세자(昭顯世子), 차남 효종(孝宗), 3남 인평대군(麟坪大君), 4남 용성대군(龍城大君)을 낳았습니다.

1623년 광해군15년 반정으로 능양군이 왕으로 즉위하자 그해 3월14일 왕비에 책봉됐습니다. 이날 혼군(昏君), 광해(光海)는 폐주(廢主)로 전락해 군(君)으로 강등됐습니다.

예조판서 임취정(任就正)이 왕 인조에게 아룄습니다. “구주(舊主)를 폐하여 군(君)으로 봉하는 것이 오늘날의 가장 큰 절목입니다. 속히 의논해 조처하소서.”

“내 어찌 스스로 결정하겠는가. 의당 자전께 여쭈어 조처하리라.”

반정 공신으로 병조 참판에 내정된 김류도 재촉했습니다.

“세조(世祖)가 즉위해 노산(魯山)을 폐했고, 중종(中宗)께서 반정후 역시 연산(燕山)을 폐하였으니, 이는 모두 종사와 신민을 위한 대계입니다. 폐(廢)자를 내리지 않고는 적합한 말이 없으니 중외에 교서를 반포하는 일이 일각이 급합니다. 속히 결단을 내리소서.”

인조가 마침내 허락했습니다.
 
▲ 장릉(長陵) 병풍석의 아름다운 조각.

반정후 정국은 혼란스러웠습니다. 중전 인열왕후 주변도 예외가 아니었죠.

광해군의 궁인(宮人) 가운데 나이가 많고 죄 없는 사람들은 그대로 궁궐에서 일하게 했습니다. 그 중 한보향(韓保香)이라는 궁인이 있었습니다. 그는 광해군을 잊지 못해 슬프게 울었다고 합니다.

한 궁인이 이를 보고 “보향이 옛 임금을 생각하니 변고가 생길까 두렵다”고, 중전에게 귓속말로 속삭였습니다.

인열왕후의 반응은 예상 밖이었습니다.

“이는 의로운 사람”이라고 평가했습니다. 그리고 궁인 한씨를 불러 “국가가 흥하고 망하는 것은 무상한 것이다. 우리 임금이 하늘의 힘으로 오늘 보위에 있지만 훗날 다시 광해처럼 왕위를 잃게 될지 어찌 알겠느냐. 너의 마음가짐이 이러하니 내 아들을 보육할 만하다.”

중전은 궁인 한씨를 보모상궁(保姆尙宮)에 임명하고 값비싼 후추 한 말을 하사했습니다.

반면 사특한 궁인은 불러 종아리를 피가 나도록 힘껏 내리쳤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너의 행동을 보니 훗날 너의 간사한 마음을 미루어 알 수 있겠다”며 꾸짖고 궁 밖으로 내쫓았습니다.

궁인 한씨는 감격해 눈물을 흘렸고 그동안 불안한 마음을 갖고 있던 다른 궁인들도 안심하고 중전과 새 임금에 복종했다고 합니다.

정재륜(鄭載崙)이 서술한 야사집, ‘공사견문록(公私見聞錄)’에 나오는 일화입니다.
 
▲ 원주문화원이 매년 개최하는 인열왕후 선발대회 2025년도 포스터.

인열왕후는 인조에게 따끔한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고 합니다. 야당(野黨)이었던 셈입니다.

어느 날 인조가 한 언관(言官)을 갈아치우려 했습니다. 그러자 왕후는 “말이 맞지 않는다 하더라도 대간의 관직인 이상, 처치할 때 공의(公議)를 따르지 않는다면 임금의 덕에 누를 끼치고 언로를 막게 된다”며 재고를 요청했습니다.

또한 청렴하고 검소했으며 엄동설한이나 무더운 여름철, 궁궐 경비 병력들이 고생하는 것을 염려해 때때로 음식을 내려 주었다고 합니다.

왕이나 대통령의 옆자리를 지키는 안주인은 예나 지금이나 한 정권, 혹은 한 나라를 흥하게도 하고 망하게도 합니다. 이 평범한 진리를 인열왕후를 통해 다시 확인하게 됩니다.

남궁창성 원주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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