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줌인] 美·이란 2차 협상 좌초… “우리가 모든 패 쥐었다” 트럼프式 거래 정치 재현
이란도 “외교 진정성 알 수 없다” 응수
브렌트유 다시 106달러 넘어
이란 전쟁이 개전 50일을 넘긴 가운데, 미국과 이란 사이 2차 직접 협상이 합의 조건이 아닌 만남 형식을 둘러싼 기 싸움에 발목을 잡혔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25일(현지시각) 스티브 위트코프 특사와 사위 재러드 쿠슈너의 파키스탄 출국을 막판에 취소했다. 이란 대표단을 이끌던 압바스 아라그치 외무장관이 파키스탄 이슬라마바드를 떠나 오만으로 향한 직후였다.

트럼프 대통령은 협상 결과보다 항복 연출을 우선시하는 거래 방식을 다시 꺼내 들었다. 그는 이날 폭스뉴스 인터뷰에서 “18시간이나 비행해 아무것도 아닌 대화를 하러 가지 않겠다“고 했다. 본인 트루스소셜에는 “우리가 모든 패를 쥐고 있다. 그들이 원하면 언제든 우리에게 전화하면 된다“고 적었다. 이란 지도부를 두고는 “내부 분란과 혼란이 극심해 누가 책임자인지 본인들도 모른다”며 평가절하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플로리다에서 워싱턴으로 향하기 직전에도 기자들과 만나 “이란이 종이 한 장을 줬지만, 내용이 충분하지 않았다”며 “취소하자 10분 만에 훨씬 나은 문서를 받았다“고 했다.
정치전문매체 악시오스 등은 이를 두고 트럼프 행정부가 이란과 2차 협상이 결렬된 사실을 협상력을 과시하는 카드로 쓰고 있다고 평했다. 미국 특사가 18시간을 날아가 매달리는 그림 대신, 이란이 10분 만에 새 제안을 들이미는 그림으로 구도를 바꿨다는 분석이다. 협상 채널을 직접 대면에서 전화 통화로 낮춘 것 역시 미국이 먼저 움직이지 않는다는 신호다.
캐롤라인 레빗 백악관 대변인은 폭스뉴스에 “트럼프 대통령은 해상 봉쇄에 만족하고 있으며, 이란이 매우 약한 위치에 있다고 본다”고 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협상단 파견을 취소한 배경에는 국내 정치 계산도 깔린 것으로 보인다. 이란 전쟁 개전 이후 트럼프 행정부 국정 지지율은 갈수록 바닥을 치고 있다. 21일 발표한 로이터·입소스 조사에서 트럼프 대통령 지지율은 36%까지 떨어졌다. AP·NORC 조사는 33%, NBC뉴스 조사는 취임 후 최저치인 37%를 기록했다. 경제 운영 지지율은 29%, 인플레이션 대응 지지율은 28% 선까지 주저앉았다. 이코노미스트·유고브 조사에서 이란 전쟁 지지율은 30%, 반대는 60%대 후반까지 치솟았다.
미국 휘발유 평균 가격은 팬데믹 시기였던 2022년 이후 처음으로 갤런당 4달러를 넘겼다. 국제 유가 벤치마크인 브렌트유 역시 25일 회담 결렬 후 배럴당 106달러 선을 돌파했다.
이런 점을 감안하면 ‘모든 패를 쥐었다’는 미국 표현은 협상용 과장에 가깝다는 게 중론이다. 특히 트럼프는 오바마의 이란 핵합의를 “최악의 합의”라고 공격해왔다. 현재 상황에서 미국이 이란 측 제시 조건에 합의할 경우 2015년 오바마 행정부 핵합의 전철을 밟는다는 부담이 크다. 미국 대표단이 이란을 찾아가 양보하는 듯한 모습이 그려지면, 대(對)이란 압박 전략을 성과로 강조해온 서사가 흔들릴 수 있다.
보수 성향 싱크탱크 애틀랜틱카운슬의 네이트 스완슨 연구원은 “트럼프 행정부는 그동안 이란 핵 문제를 넘어 미사일과 역내 활동까지 포괄하는 ‘항복문에 가까운 합의’를 요구했다”며 “오바마식 핵 합의를 되살리는 듯한 타협을 택하기는 정치적으로 쉽지 않다”고 분석했다.

이란 역시 출구가 시급하다. 전쟁 피해는 이란 지도부의 협상 여지를 좁히고 있다. 블룸버그는 25일 전체 전쟁 사망자가 5000명을 넘었고 대부분이 이란에서 발생했다고 전했다. 미국 기반 인권단체 HRANA는 4월 초 기준 이란 내 확인된 사망자를 3636명으로 집계했다. 미국의 호르무즈 해협 봉쇄 이후 경제에도 전면 마비에 가까운 충격이 쌓이고 있다. 로이터는 이란 경제 성장률이 올해 -10%를 기록할 수 있고, 최소 수백만 명이 일자리 상실과 소득 감소, 사업장 폐쇄 같은 문제를 겪고 있다고 했다.
그러나 미국이 설계한 대로 항복에 가까운 조건을 수용하면서 협상장에 끌려 나갈 수 없는 상황이다. 혁명수비대 등 강경파 반발이 여전한 현 상태에서 굴욕적 협상안을 받아들일 경우 그에 대한 책임론으로 정권을 빼앗길 가능성이 급격하게 높아진다. 월스트리트저널(WSJ)는 “이날 양보 수위를 놓고 이란 내부 책임 회피와 강경파 견제가 커진 상태”라고 전했다.
이란 측에서는 이번 협상을 아라그치 외무장관이 맡았다. 아라그치 장관은 25일 본인 엑스(X·옛 트위터) 계정에 “미국이 외교에 진지한지 아직 알 수 없다“고 적었다. 그는 이날 아심 무니르 파키스탄 육군참모총장과 회동한 뒤 곧장 오만으로 향했다. 미국이 정한 형식에는 응하지 않겠다는 신호다. 에스마일 바카에이 이란 외교부 대변인은 한발 앞서 X에 “이란과 미국 사이 회담 일정은 잡혀 있지 않다. 향후 이란의 입장은 파키스탄을 통해 전달할 것“이라고 못 박았다.

협상이 평행선을 달리면서 호르무즈 해협 해상 통행은 당분간 난항을 겪을 것으로 보인다. LSEG 선박 추적 자료를 보면 20일부터 23일까지 호르무즈를 통과한 유조선은 9척에 그쳤다. 전쟁 전에는 하루 100척이 넘게 통과하던 수로였다.
이란 혁명수비대는 23일에도 해협을 통과하던 외국 화물선 2척을 나포했다. 같은 날 미군도 인도양에서 제재 대상 이란산 원유를 실은 유조선을 차단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트루스소셜에 “미 해군 승인 없이는 어떤 배도 해협을 드나들 수 없다. 이란이 합의에 도달할 때까지 꽉 잠굴 것(sealed up tight)“이라고 적었다.
그 결과 국제 유가 벤치마크인 브렌트유는 24일 배럴당 106.80달러를 찍으며 심리적 저항선인 100달러를 크게 웃돌았다. 서부텍사스산원유(WTI)도 95.85달러까지 뛰었다. 마수드 칸 전 주미 파키스탄 대사는 워싱턴포스트에 “호르무즈를 둘러싼 양측의 쌍둥이 봉쇄가 풀리지 않는 한 2차 협상 돌파구는 마련할 수 없다“고 했다.
다만 일각에서는 이번 협상 무산이 외교 단절이나 전면전 회귀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분석도 나왔다. 트럼프 대통령은 회담 취소 직후 무력행사 재개를 묻는 질문에 “생각해보지 않았다“며 여지를 남겼다. 셰바즈 샤리프 파키스탄 총리는 협상 결렬 직후 마수드 페제시키안 이란 대통령과 50분간 통화하며 중재를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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