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기 위해 열매 쏟아냈다··· 봉산 편백나무 '붉은 유언장' [하상윤의 멈칫]

하상윤 2026. 4. 25. 1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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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최초' 집착이 부른 무리한 조림, 신음하는 편백나무
메마른 겨울 지나며 가지마름 심각
새순 없이 열매만 빼곡... 고사 직전 내몰린 ‘위기 번식’
무차별 가지치기로 쇠퇴 가속화
말라붙은 잎에 편백향 실종… 이름만 남은 '치유의 숲'
10일 서울 은평구 봉산 ‘편백나무 치유의 숲’에 식재된 편백나무들이 하단부부터 갈색으로 타들어 가는 ‘가지마름’ 현상을 보이고 있다. 하상윤 기자

새순이 돋아야 할 봄철이지만, 서울 은평구 봉산의 ‘편백나무 치유의 숲’은 생기 대신 짙은 갈색빛 쇠퇴가 역력했다. 지난 9일 찾은 현장에서는 남북 사면을 가릴 것 없이 편백나무의 다수가 전체 체적의 20~50%에 달하는 하단 가지가 갈색으로 변하는 ‘가지마름’ 현상을 보였다. 잎이 아래에서 위로, 줄기 안쪽에서 바깥쪽으로 타들어 가는 양상이 대부분 개체에서 확인됐다. 고사 직전에 이른 수목도 드물지 않았다.

봉산 편백숲 전방위에 걸쳐 가지마름 현상이 확산하고 있다. 사진은 20일 봉산 편백나무 숲 북쪽 사면의 개체들로, 하단부에서 상단부로, 줄기 안쪽에서 바깥쪽을 향해 말라가는 양상이 뚜렷하다. 하상윤 기자

서울시 은평구 신사동 방면 봉산에 조성된 이 숲은 서울 최초의 대규모 편백 조림지로 관할 구청의 핵심 사업이자 사회적 이목이 집중된 프로젝트였다. 특히 2020년부터 대벌레와 러브버그(붉은등우단털파리) 등 곤충이 이곳에서 창궐하면서, 평범한 동네 산이었던 봉산은 전국적인 주목을 받았다. 이 사업은 기존 자연림을 밀어낸 자리에 편백 단일 수종을 밀식하는 것을 골자로 한다. 은평구는 지난 12년 동안 봉산 내 6.5헥타르(㏊) 규모 산지에 약 1만 3,400그루의 편백을 심어왔다. 다만 온난 다습한 기후에 적합한 남부 수종을 중부 지방의 척박한 토양에 대규모로 식재하면서, 사업 초기부터 생태적 부조화에 대한 우려가 끊이지 않았다.

21일 봉산 편백나무 숲 북쪽 사면 한 모퉁이에 갈색으로 변한 편백 가지들이 잘린 채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지난겨울은 기상 관측 이래 손꼽힐 만큼 건조했다. 기상청이 발표한 '2025년 겨울철 기후 특성'에 따르면 전국 강수량은 45.6㎜로 평년(89.0㎜) 대비 53% 수준에 그쳤다. 특히 1~2월 누적 강수량은 21.5㎜로 1973년 기상 관측 이후 세 번째로 적은 기록이다. 본래 온난 다습한 환경에서 자라는 편백은 이 같은 극심한 건조에 취약한 수종이다.

현장에 동행한 엄태원 숲복원생태연구소장은 먼지가 풀풀 날리는 토양과 말라버린 가지를 가리키며 “수목이 새순을 힘껏 밀어내야 할 지금은 연중 수분이 가장 절실한 시기인데, 토양이 완전히 메말라 있어 수목들이 극도의 수분 스트레스 반응을 보이고 있다”고 진단했다. 숲의 쇠퇴 양상을 살피던 그는 “이런 편백숲은 처음 본다”며 “지독히 건조했던 지난겨울의 기후가 수목들을 한계 상황으로 내몬 기폭제가 됐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10일 봉산 편백나무 숲 북쪽 사면에서 확인된 고사 직전의 개체. 짙은 그늘에 가려져 쉽사리 보이지 않지만, 숲 전체에 걸쳐 생존 한계에 다다른 나무들이 적지 않다. 하상윤 기자

엄 소장은 사태의 근본 원인은 빗나간 식재 환경에 있다고 짚었다. 그는 “적합한 땅에 심어진 편백이라면 이 정도의 기후 등락은 충분히 감당할 수 있지만, 봉산은 토양 습도와 공중 습도, 연중 기온, 경사도 등 편백이 자랄 수 있는 조건을 전혀 갖추지 못한 곳”이라고 말했다. ‘기후 순화를 거쳤기에 활착이 양호하다’는 관할 당국의 해명에 대해서도 “중부 지방에서 순화를 거쳤다고 해도 편백 고유의 유전적 기후 특성 자체가 완전히 바뀌는 것은 아니다”고 선을 그었다.

21일 봉산 숭실고 방면 남측 사면에서 포착된 수많은 편백나무의 흔적들. 서 있기도 버거운 급경사지에 심어진 나무들이, 극도로 척박한 환경을 견디다 못해 결국 말라 죽어 그루터기로 남았다. 하상윤 기자

숭실고 방면 남측 사면은 이러한 부적합한 환경의 한계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화강암 지반에 경사가 급하고 일조량까지 많아 수분 손실이 극심한 이곳은 2024년과 비교해 쇠퇴 양상이 한층 도드라졌다. 초기에 식재된 개체 상당수가 이미 고사해 잘린 채 그루터기로 남았고, 황량한 능선에 남은 한두 그루조차 새순을 내지 못한 채 수형이 기괴하게 뒤틀려 있었다. 빈약한 가지에도 무게를 이기지 못할 만큼 빼곡한 열매만 매달려 있었다.

21일 봉산 숭실고 방면 남측 사면의 한 편백나무. 새순은 돋아나지 않은 채, 비정상적으로 맺힌 열매들의 무게로 인해 가지가 축 늘어져 있다. 하상윤 기자
17일 봉산 숭실고 방면 남측 사면에서 관찰된 한 편백나무의 정단부 모습. 생장을 멈춘 채 앙상한 수형으로 변했지만 가지마다 열매들이 버거울 정도로 매달려 있다. 하상윤 기자

엄 소장은 가지가 늘어질 정도로 열매를 맺은 편백들을 보며 “나무가 유언장을 써 놓은 것이나 다름없다”고 비유했다. 이는 수목이 생존 임계점에 도달했을 때 나타나는 전형적인 생태 반응이다. 나무는 생명을 위협받는 극한의 스트레스 상황에 놓이면 몸집을 키우는 ‘영양 생장’을 중단하는 대신, 종족 번식을 위한 ‘생식 생장’에 모든 에너지를 집중한다. 비정상적으로 과다하게 맺힌 열매는 풍요의 증거가 아니라, 고사 직전의 나무가 후대에 유전자를 남기기 위해 짜내는 마지막 몸부림인 셈이다. 현장 관리 관계자는 이 같은 생육 부진 상황을 인지하고 있다면서도 "최근 나무의사 두 명이 현장을 다녀갔으나 특별한 이상 소견은 없었다"고 밝혔다.

어린 나무도 예외가 아니다. 초창기 심은 편백나무가 고사한 자리에 다시 심어진 어린 개체마저, 정단부에 새순을 내지 못한 채 과도하게 맺힌 열매의 무게로 휘어져 있다. 하상윤 기자

문제는 당국의 맹목적인 사후 처리다. 나무가 죽어 나간 척박한 비탈에는 어김없이 새로운 편백 묘목이 다시 심어진다. 어린나무가 수분 부족과 사투를 벌이다 끝내 위기 번식 징후를 보이며 고사하면, 이를 다시 베어내고 새 묘목을 갈아 끼우듯 찔러 넣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여기에 최근 진행된 과도한 가지치기 작업이 쇠퇴를 부추겼다. 숲 전역에서 이뤄진 작업은 관리가 아닌 벌목에 가까웠다. 수목 체적의 30% 이상이 잘려 나갔고, 심한 경우 절반 가까이 가지를 쳐낸 개체도 있었다. 직경 7cm, 길이 2.5m에 이르는 굵은 가지들도 베어졌다. 생사 구분 없이 가지를 잘라낸 탓에 나무의 ‘광합성 공장’ 역할을 하는 잎이 대거 사라졌다.

잎마름이 진행 중인 편백나무 하단에 커다란 절단면이 흉터처럼 남았다(왼쪽 사진). 잘려 나간 가지를 직접 들어 확인해 보니 직경 7cm, 길이 2.5m를 훌쩍 넘겼다. 하상윤 기자
굵기나 생사(生死) 구분 없이 가지가 잘려 나간 편백나무들. 통상적인 수목 관리 원칙상 전정 범위는 수관 체적의 20% 이내로 권장되며 쇠퇴 중인 나무는 더 엄격한 기준을 적용받지만, 현장에서는 절반에 가까운 가지를 쳐낸 개체도 관찰된다. 엄태원 숲복원생태연구소장은 "목재 생산의 목적이 아닌 이상 이러한 전정은 이해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하상윤 기자

서측으로 이어지는 꽃잔디 구역은 편백 조림 사업의 허술함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붉은 꽃잔디가 만개한 사면 위로는 화석연료 펌프를 이용해 끌어올린 물이 스프링클러를 통해 쉴 새 없이 흩뿌려진다. 이 이질적인 풍경의 이면에는 무리하게 추진된 식재 과정의 사연이 숨어 있다. 본래 참나무와 소나무가 우거졌던 이 구역은 편백나무를 심겠다는 목적 아래 정밀한 지질 조사 없이 일거에 벌목됐다. 그러나 막상 수목을 밀어내자 식재가 불가능한 거대한 암반 지대가 드러났고, 당국은 얕게 복토한 뒤 임시방편으로 꽃잔디를 심어 산의 맨살을 덮었다. 수분이 부족한 상층부 식물이 고사할 때마다 매년 예산을 들여 새로 심고 물을 대야 하는, 거대한 '인공 경작지'가 된 셈이다.

21일 봉산 편백나무 숲 꽃잔디 구역 모습. 만개한 꽃잔디 사이로 암석이 드러나 있다. 현장 관계자들은 당초 편백나무 식재를 목적으로 기존 숲을 개벌했으나, 뒤늦게 암반 지대가 드러나며 식재가 불가능해지자 임시방편으로 현장을 꽃잔디로 덮었다고 증언했다. 하상윤 기자
17일 봉산 편백나무 숲 꽃잔디 구역에서 스프링클러가 쉴 새 없이 물을 뿜어대고 있다. 하상윤 기자

당초 '편백나무 치유의 숲' 조성의 핵심 명분은 시민 건강 증진이었다. 편백이 발산하는 항균 물질인 피톤치드가 스트레스 호르몬인 코르티솔 수치를 낮추고 면역력을 강화한다는 점을 지속적으로 홍보해 왔다. 그러나 생존 한계선에 선 편백은 당국의 기대와 달리 피톤치드를 제대로 내뿜지 못한다. 한나절 숲을 헤매도 편백향을 느끼기 어렵다. 수목은 생존이 위협받는 극심한 스트레스 상황에서 이차 대사산물인 테르펜(피톤치드) 합성을 최소화하는 대신, 모든 에너지를 생존과 번식에만 집중하기 때문이다.

21일 봉산 편백나무 숲에서 포착된 한 개체. 본래의 수형을 잃은 채 지지목과 끈에 의지해 위태롭게 서 있지만, 생존의 위기 속에서 마지막 에너지를 쏟아낸 듯 가지마다 열매를 주렁주렁 매달고 있다. 하상윤 기자

또한 산림청 산림치유연구사업단 연구 결과에 따르면, 여름철 기준 소나무림의 대기 중 피톤치드 평균 농도(3.26±0.66ng/㎥)가 편백나무(0.78±0.22ng/㎥)보다 오히려 4배가량 높았다. 생육 상태가 양호한 숲을 기준으로 측정한 것이기에, 수분 스트레스로 생장이 둔화된 봉산의 편백나무에는 이 수치마저도 기대하기 어렵다. 편백나무를 심어 힐링하겠다고 베어낸 수많은 봉산 소나무의 그루터기가 떠오르는 대목이다.

21일 봉산 편백숲 꽃잔디 구역에 덩그러니 남겨진 참나무(갈참나무 추정) 그루터기. 현장 관계자들은 당초 편백나무 식재를 목적으로 기존 숲을 개벌했으나, 뒤늦게 암반 지대가 드러나며 식재가 불가능해지자 임시방편으로 현장을 꽃잔디로 덮었다고 증언했다. 화려하게 핀 꽃 사이로, 편백나무 조림을 위해 베어내야 했던 원래 숲의 흔적이 현장의 모순을 드려내고 있다. 하상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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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언에겐 말을 타고 달리다 '멈칫' 말을 세우고 내려 뒤를 돌아보는 오래된 의식이 있었습니다. 발걸음이 느린 영혼을 기다리는 시간이라고 합니다. [하상윤의 멈칫]은 치열한 속보 경쟁 속에서 생략되거나 소외된 것들을 잠시 되돌아보는 멈춤의 시간입니다.

하상윤 기자 jonyyu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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