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혈 처제와 선을 넘었습니다”…성폭행 일삼았던 국부가 있다? [히코노미]
그는 흑인을 누구보다 사랑했다. 전제(前提)가 있었다. 정치적으로 이득이 될 때거나 침대 위에서 쾌락을 맛볼 때거나. “모든 인간은 피부색과 관계없이 평등합니다”라고 사자후를 토해내던 백인 사내의 집에서 수백명의 흑인 노예들이 강제 노동에 시달렸다.
나이 많은 흑인부터, 아주 어린 흑인까지. 그들에겐 이름이 없었다. 단지 그의 재산이었을 뿐이니까. 흑인 노예들끼리 눈이 맞아 아이를 가졌을 때 그는 누구보다 기꺼워했는데, 그 자식이 다시 자신의 노예가 될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가축을 흘레붙이는 축산업자의 표정으로 그는 흑인 노예들의 잠자리를 부추겼다. 밖에서는 흑인을 위한 자유의 투사, 안에서는 흑인 가축으로 부리는 농장주. 미국 건국의 아버지, 3대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의 이야기였다.
제퍼슨은 흑인의 단물을 알차게 빨았다. 경제적으로도, 성적으로도 그랬다. 흑인 여성 노예 샐리 헤밍스를 자신의 침대로 끌어들여, 여섯 명의 사생아를 봤다. 헤밍스는 제퍼슨의 사별한 아내의 이복동생(다른 말로 처제)이었다. 헤밍스의 엄마는 농장주의 성 노예였고, 헤밍스 그 자신도 형부 제퍼슨의 성노예에 가까웠다. 저주의 악순환. 제퍼슨의 노예제를 향한 이율배반은 경제사에 얼룩을 남겼다.

본인은 와인과 캐비어를 즐기면서, 퍽퍽한 빵으로 끼니를 때우는 민중의 고단함을 이해한다는 위선자의 역사는 유구한데, 제퍼슨은 그 단적인 예였다. 제퍼슨은 사람은 피부색과 관계없이 누구나 자유인으로 살아갈 권리가 있다고 외치는 계몽주의자였다. 인디언도, 흑인 노예도, 양질의 교육과 문명 교화로 당당한 자유 시민이 될 수 있다고 힘줘 말했을 때, 그의 노예들은 채찍을 맞고 있었다.
![버지니아의 제퍼슨 저택. [사진출처=Martin Falbisoner]](https://img4.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604/25/mk/20260425160903501swom.jpg)
해밍스는 그의 재산이었으므로, 제퍼슨은 그녀의 육체를 탐했다. 제퍼슨은 40대였고, 헤밍스의 나이는 고작 14살이었다. 주인의 요구를 10대의 노예는 거절할 수 없었다. 헤밍스는 그렇게 여섯 아이를 낳았다. 여섯 모두 노예 목록에 이름을 올렸다. 제퍼슨의 계몽주의는 언제나 제집의 노예들을 비추지 않았다. 다른 대감 댁 흑인 노예들이 “제퍼슨이야말로 우리 흑인을 위한 정치인”이라고 목에 핏대를 세울 때, 제퍼슨의 노예들은 속이 메슥거렸다.

거대한 영토의 힘으로 미국을 다시 한번 자유의 나라로 세우고자 했다. 자영농을 기반으로 민주주의를 굳건히 세울 수 있다는 청사진이 마음에 그려졌다. 해방된 노예들도 그곳에서 새로운 인생을 그릴 수 있을 것이었다. 더 많은 자영농이 미국의 자유 시민으로 설수록, 제퍼슨의 위상은 더욱 굳건해질 것이었다.

루이지애나는 하얗게 물들었다. 백인과 그들의 목화밭이 뒤덮어서였다. 조면기가 개발되면서 19세기 초 목화 산업이 융성했다. 루이지애나 남부는 덥고 습해서 목화가 생육하기 좋았다. 많은 농장주가 루이지애나로 몰려들었고, 그보다 더 많은 노예들이 루이지애나로 끌려들었다. 하얀 목화밭에 검은 노예들이 붙들렸다. 농장주가 휘두른 채찍에 흑인의 피가 하얀 목화를 물들였다. 해방된 흑인들이 루이지애나에 도착했을 때 그들이 마주한 건 자유의 땅이 아니라, 또 다른 노예 지옥의 땅이었다.
![하얀 목화밭. [사진출처=Bubba73]](https://img4.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604/25/mk/20260425160907454xsep.jpg)
남부로 팔아넘겨진 노예가 얼마나 많았는지. 지금도 ‘Sold Down the river’(누군가를 배신하다)라는 표현이 영어에 남았다. 미시시피강 지역에서 노예를 더 가혹한 남부 지역으로 팔아넘기는 행위를 가리키던 것이었다. 미국 남부는 노예 지옥이 되고 있었다.

새로운 땅, 새로운 수익을 찾아 나서야 할 시간. 그들의 눈에 들어온 건 신생 독립국 멕시코의 영토 ‘테하스’였다. 오늘날 텍사스라고 불리는 땅이었다.

멕시코의 땅은 광활한 만큼이나 텅 비어 있었다. 새 나라의 지도자들은 멕시코 시민들에게 테하스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라고 채근했지만, 아무도 말을 듣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집도, 절도 없는 곳에 가고 싶은 사람은 없는 법이었으니까.

멕시코의 위정자들은 세 가지를 몰랐다. 미국 이민자들은 가톨릭이 아닌 개신교도였고, 노예제를 성경만큼이나 찬양하던 인물들이었으며, 멕시코의 법과 규칙에는 나초 만큼도 관심 없었다는 사실을. 백인 이민자들의 뒤에는 수천 명 흑인 노예들이 짐짝처럼 끌려왔다. 멕시코는 노예제가 불법이었으므로, 그 나라 관리들은 “이들이 누구냐”고 물었지만, 백인 이민자들은 “계약직 노동자”라고 둘러댔다.
테하스는 그렇게 목화와 노예로 가득해졌다. 가톨릭교도인 자유 시민이 세운 멕시코의 테하스는 개신교 미국인 농장주들의 땅이었다.


미국은 마치 집 나간 아이를 되찾아오기라도 한 듯이, 텍사스를 합병했다. 멕시코는 빼앗긴 물건을 찾으러 왔다가, 캘리포니아·유타·네바다·애리조나까지 빼앗겨 버렸다(미국-멕시코전쟁, 1846~1848년). 그만큼 목화밭이 멀리 퍼졌고, 흑인의 피비린내가 곳곳에 흩날렸다.
![워싱턴 D.C. 제퍼슨 기념관. [사진출처=Joe Ravi]](https://img2.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604/25/mk/20260425160915307loqx.jpg)
ㅇ토머스 제퍼슨은 미국 건국의 아버지이자, 흑인 노예 해방에 일조한 정치인이었다.
ㅇ그러나 그는 사적으로 엄청나게 많은 노예를 거닐었고, 흑인 혼혈인 처제를 건드리기도 했다.
ㅇ처제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 역시 노예 목록에 올렸다.
ㅇ제퍼슨은 내로남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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